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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Nov 27. 2022

<비상선언>, 위험한 영화

이 영화는 위험한 영화다.

본 글은 영화의 결말까지 포함한 영화 해석, 리뷰입니다. 스포일러에 주의해 주세요.




위험한 영화다. 한재림 감독의 <비상선언>을 보고 들었던 생각이다.




영화 <비상선언>의 초반부는 흥미진진하다. 긴박하고 촘촘한 편집을 동력 삼아 가파르게 움직이는 연출과 이야기는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임시완, 이병헌, 송강호, 김소진 배우들의 형형하게 빛나는 연기도 볼만하다. <비상선언>이 이야기를 제시하는 과정은 합격점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풀어내고 마무리하는 과정이 의아할 정도로 이상하다. 그러니깐 영화의 의중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위험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우선 <비상선언>의 안 좋은 점은 혐오와 분노의 감정으로 손쉽게 관객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는 것이다. 비행기가 하와이에 착륙을 시도한 순간 미국이 착륙을 불허한다.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이 착륙을 불허하고 심지어 한국에서도 착륙이 불투명한 순간 영화의 창의성은 동이 나 버린다. 그러니깐 이 영화는 미국, 일본, 착륙을 반대하는 한국의 국민들까지 '적(敵)'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는 존재로 표적을 둔다. 이를 통해 관객은 적들을 향해 분노의 감정을 쏟아낸다. 이 '분노(怒)'는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감정이라기보다는 특정한 대상을 향한 '혐오'라는 점에서 위험하다. 이 점에서 <비상선언>은 '영화 윤리'라는 선을 넘어버린다.

물론 영화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윤리를 지켜가면서 영화를 만들 수는 없다. 우리가 액션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람을 향해 총을 쏘고 죽이는 점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는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가 즐거움이라는 점에서 윤리는 헐렁하게 적용되곤 한다. 하지만 영화 <비상선언>은 중후반부를 들어서면서 사회 드라마를 자처하고 나선다는 점에서 영화 윤리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특히 '세월호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 강하게 느껴진다. 특히 비행기가 한국으로 착륙을 시도할 때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져 시위를 하는 장면은 흡사 '세월호 사건' 당시 광화문에서 단식과 폭식으로 나누어져 투쟁하던 모습과 유사하다.




결국 영화 <비상선언>이 국민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 상흔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하지만 <비상선언>은 피해자들의 슬픔을 '전시'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특히 피해자 가족들이 비행기와의 가족들과 화상 통화 후 오열하는 모습을 부감(버즈아이 뷰)으로 잡는 장면은 피해자의 슬픔을 물화(物化) 하고 전시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조심성 없고 폭력적인 방식이다.

장 뤽 고다르가 말한 것처럼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 아니고 반영의 현실"이다. 그러니깐 아무리 현실이 이 모양 이 꼴이라고 그걸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현실의 사회와 체계를 가져오더라도 결국 영화라는 예술의 세계 속에서 재정립이 이루어지고, 그 안에서 그 세계만의 윤리 체계가 작동해야 한다. 불쾌감 가득한 장면을 나열하고 "현실은 이것보다 더하다"라는 변명은 사실상 성립하지 않는다. 결국 모든 폭력은 상상력의 실패를 나타낸다. 비폭력은 창조성을 요구한다. 그 점에서 <비상선언>은 창조성이 부족한 영화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영화 <비상선언>의 '신파(新派)'는 그 자체로서 문제가 아니다. 이건 신파의 과도한 남용과 오용의 문제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창의적이고, 어떻게 인간의 슬픔을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고, 그 부족함을 신파로 채우려고 한다. 많은 관객들이 '신파'라는 요소를 기피하는 흐름에서 굳이 이 정도까지의 남용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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