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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Mar 05. 2023

<스즈메의 문단속>, 3번의 포옹 속에서

그렇게 스즈메는 다시

무너진 기억과 마음을 복원하고 다시 이으려는 힘이 있다. 그토록 간절한 '안간힘'이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은 전작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 이어서 재난을 다루고 있다. <초속 5센티미터>와 <언어의 정원>에서는 문학적이고 서정 가득한 세계를 묘사했다면,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 <스즈메의 문단속>까지 재난 3부작은 무너진 마음을 끝내 이으려는 간절함과 안간힘이 가득하다. <초속 5센티미터>에서 문학성이 극에 달했다면 <너의 이름은.>에서 대중성까지 사로잡으며 확고한 거장의 위치에 올라섰다.



역시 빛의 마법사답게


이번 신작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과 <날씨와 아이>와 비슷하면서도 큰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의 전매특허 연출은 여전하다. '빛의 마법사'라는 별명답게 이토록 빛을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는 감독은 현재 신카이 마코토밖에 없어 보인다. 단순히 빛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풍경을 뒷받침하며 어우러지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더욱 훌륭하다. 빛이 뻗어 나가는 방향까지 세부적으로 묘사하고, 압도적인 풍광이 주는 느낌은 큰 스크린으로 보면 더욱 극대화된다. 그리고 빛과 풍경을 이용하여 시간을 표현하는 방식도 좋다.

구름의 움직임, 하늘의 색으로 유려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그 자체로 인물의 마음까지 움직인다.



영화 중간에 가사가 있는 음악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작들과 큰 차이점이 있다. <너의 이름은.>과 <날씨의 아이>에서 중간마다 노래 가사가 틈입하며 인물의 심경을 대변하곤 한다. <너의 이름은.>은 적재적소에서 활용되며 큰 여운을 남겼지만 <날씨의 아이>에서는 다소 과하다는 비판이 있곤 했다. 하지만 <스즈메의 문단속>은 일본의 대중가요를 활용하지만 오리지널 음악은 엔딩을 제외하곤 사용하지 않는다. 이는 영화가 이야기에 집중하겠다는 포고와 같다. 이야기와 소재에 가볍게 접근하지 않고 진중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겠다는 발걸음이다. 또한 여성 캐릭터의 묘사 또한 전작의 비판과는 다르게 성적으로 소비하는 장면도 없다. 캐릭터를 묘사하는 신도 섬세하게 다가간다.




또한 전작들과 다르게 카메라를 사용하는 방식도 눈에 띈다. 특히 트래킹(카메라가 상하좌우로 매끄럽게 움직이는 기법)을 활용한 역동적인 화면은 관객에게 박진감을 선사한다. 또한 열쇠가 움직이는 방향과 소리를 활용하거나 매끄러운 쇼트의 전환은 영화의 리듬감을 탁월하게 형성하고 있다. 흡사 쇼트로 치는 드럼과 같다.




전체적으로 지브리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보인다. 고양이의 모습을 한 신 '다이진'은 <귀를 기울이면>(영화에 직접 언급되기도 한다.), <이웃집 토토로>가 생각난다. 자연과 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은 <모노노케 히메>가 떠오르고 스즈메의 여행과 위치를 생각하면 <마녀배달부 키키>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떠오른다. 직접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귀를 기울이면> 정도이고 나머지 작품은 오마주 되거나 간접적으로 떠오른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간절한 안간힘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 영화이면서 모험 영화이고, 성장 영화이면서 가족 영화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세 번의 포옹으로 상흔을 위무한다.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재난, 특히 지진은 목적 없는 뒤틀림이다. 그저 신의 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로 인해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가지만 운명의 작동 방식은 잔혹하다. 스즈메도 어머니를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잃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로 인해 상처를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이다. 이는 이모의 삶을 빼앗았다는 죄책감과도 이어진다.

이렇게 스즈메는 지진으로 인해 무너진 마음의 폐허를 가지고 있다.



쇼타가 행하는 '토지시'의 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역할이다. 재난을 막는 중대한 일이지만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다. 영화는 토지시의 임무인 재난이 나타나는 문을 닫는 일을 상세히 묘사한다. 즉 재난에 맞서 자신의 소임을 다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두드리고 있다.(특히 동일본 대지진 때 쓰나미가 몰려와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재난 경보를 방송하던 사람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그리고 열쇠를 통해 폐허의 목소리를 들으며 문을 잠그는데 그때 하는 말은 "돌려드리옵니다"이다. 즉 토지시의 일은 폐허 속에서 사라져간, 잊혀간 목소리를 발굴하고 기억하고 되새기는 것이다. 영화는 이 장면들을 통해 일상의 소중한 기억들을 묘사하며 집단적 상흔을 치유하며 '돌려주고' 있다.




결국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가장 중요한 동력은 재난을 막기 위한 '안간힘'이다. 소중한 사람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다.

그렇게 폐허를 쓰다듬으며 일일이 기억을 묘사하는 것도, 사라져간 사람들의 기억을 다시 이으려는 마음이다. 막는 마음, 연결하는 마음, 복구하는 마음, 그토록 간절한 마음이 모여 있다.



3번의 포옹 속에서 한 뼘 더


<스즈메의 문단속>은 스즈메의 모험담으로써 더욱 훌륭하다. 이 영화는 모험의 플롯을 빌려와 스즈메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집을 떠나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이 한 뼘 더 나아간 채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모험의 중요한 본질이다. 그리고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스탤지어가 진하게 드러난다. 스즈메와 쇼타가 함께 규슈, 에히메, 고베, 도쿄 그리고 도호쿠까지 모험을 떠나며 변화하는 마음을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감독의 전작 <별을 쫓는 아이>와 유사하다.)




스즈메가 모험을 떠나며 총 3번 포옹한다. 첫 번째는 에히메에서 친구와 포옹한다. 감귤이 쏟아진 것을 도와준 스즈메는 '치카'의 도움을 받으며 뒷문을 닫는다. 그리고 치카에게 식사를 제공받으며 그들만의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리고 떠나기 전 포옹하고 스즈메는 치카에게 옷과 가방을 받는다. 두 번째는 고베에서 쌍둥이 엄마 '루미'에게 받는다. 쌍둥이를 돌보기도 하고 난생처음 알바를 해보기도 한다. 그렇게 루미와 포옹하며 스즈메는 모자를 받는다.




스즈메는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어머니를 잃은 상처 때문에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모험 속에서 옷을 받고, 모자를 받고 신발을 빌려 신고 차를 타며 사람에게 선의를 받는다. 이 따뜻한 선의는 이 세상을 나 홀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스즈메는 토지시의 일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다. 하지만 선의는 치카가 말한 것처럼 그 사람이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스즈메에게 무엇을 하냐고 책망하지 않고 보이지 않더라도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믿어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그 누구도 스즈메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캐묻지 않는다.

이렇게 따뜻함으로 충만한 느슨한 믿음은 스즈메에게 한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를 제공한다.



마지막 포옹은 스즈메 자신과의 포옹이다. '저 세계'로 넘어가 스즈메가 보고 싶은 것은 이젠 볼 수 없는 어머니였다. 하지만 저 세계에서 기다리고 있는 바로 과거의 자신이다. 그리고 그 순간 스즈메는 간명한 사실을 마주한다.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는다. 잃어버린 어머니는 다시 찾을 수 없다. 그저 어머니의 기억이 살아 숨 쉬는 의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토록 비관적인 세계에서 어떡할 것인가. 그렇게 '과거의 스즈메'와 '내일의 스즈메'는 포옹한다. 자신이 있을 곳을 깨닫는 것, 아무리 슬프더라도 나아가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감정을 나누는 것, 덧없을지라도 계속 살아가는 것, 그렇게 내일을 만들어 가는 것. 은하수가 찬란하게 빛나는 세계에서 스즈메는 한 뼘 더 성장한다.

영화 내내 문을 닫으며 '문단속'을 하는 영화가 정작 마지막은 문을 열면서 끝난다. 그토록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문.


그렇게 스즈메는 다시


스즈메의 3번의 포옹은 결국 무너진 마음의 폐허와 가족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어머니가 선물로 준 한쪽 다리가 없는 의자처럼 모든 관계는 불완전하기 마련이다.(다리가 하나 없는 의자는 인물과 사물로 계속 흥미롭게 변주되고 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부모가 없거나, 남편이 없는 것처럼 상실을 안고 있다. 세리자와가 운전하는 자동차는 지붕이 고장나있고, 지붕이 고쳐지면 문이 고장난다.) 상흔의 흉터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 속에 남아 계속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의자처럼 서로의 다리가 되어주며, 함께 기대어주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상흔을 치료하고 위로할 수 있다. 그렇게 함께 앉고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눈다면 희망의 볼 수 있다. 그렇게 사람의 선의를 포옹하며 하루라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스즈메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며 그동안 도움을 받았던 사람을 다시 만난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며 자신의 내일을 꿈꾼다. 스즈메의 방에 '간호사가 되려면'이라는 책이 있는 것을 보아 어머니와 같은 직업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상처를 치유하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영화의 전체적인 테마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여름에 시작된 영화는 끝에 겨울에 도달한다. 그리고 스즈메가 '오카에리나사이(어서 와요)'라는 말과 함께 쇼타와 조우하며 영화는 끝난다.(더불어 '어서 와요'라는 대사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끝내 이 말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스즈메의 입을 빌려 현실 속에서 닿지 못한 말을 전달하고 있다.)

현대의 일상을 그린 많은 일본 영화가 천착해온 '잇테키마스(다녀오겠습니다)', '잇테랏샤이(다녀오세요)', 그리고 '다다이마(다녀왔습니다)'와 '오카에리나사이(어서 와요)'라는 정밀한 세계가 스즈메의 성장담과 맞물리는 순간이다.



집단적 상흔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대답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에 이어서 재난에 따른 집단적 상흔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대답이다. 경솔하게 다루지 않으며, 개인의 기억을 집단의 기억으로 확장해 나가는 방식으로 상처를 위무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현재까지도 일본에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는 따뜻한 위로의 포옹이 될 것이다. 그토록 무너진 기억과 마음을 복원하고 다시 이으려는 간절한 '안간힘'이 <스즈메의 문단속>에서 형형하게 드러난다.




<스즈메의 문단속>으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재난 3부작은 마무리된 듯싶다. 물론 차기작도 비슷한 테마로 4부작이 될 수도 있다. 반면 <초속 5센티미터>처럼 서정 가득한 세계를 다시 창조할 수도 있다. 과연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어디로 나아갈까. 그의 오랜 광팬으로서 더욱 설레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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