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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Mar 09. 2023

<TAR 타르>, 호령하는 영화

그리고 케이트 블란쳇의 영화.

<TAR 타르>의 심층 리뷰입니다. 아래 분석과 해석은 <TAR 타르>의 트리비아 및 '이동진의 언택트톡', 저의 개인적인 사견까지 종합한 것임을 밝힙니다. 꽤 깁니다. 4번부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TAR 타르>는 호령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완벽하게 축조한 지휘봉으로 관객석을 호령한다. 의미는 희미하게 놔두고 구조는 촘촘하게 구축하여 새로운 전락의 드라마를 서술한다. 이 영화는 영화가 끝나고 첫 장면부터 다시 되짚어볼 때 진가가 드러난다.




2.


<TAR 타르>는 케이트 블란쳇의 영화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 보았던 '노에미 메를랑', <피닉스>의 '니나 호스'도 인상적이지만, 이 영화는 오로지 케이트 블란쳇의 영화다. 케이트 블란쳇은 '리디아 타르'라는 인물을 완벽하게 융화한다. 거의 모든 장면에서 리디아 타르가 나오는데, 모든 장면마다 케이트 블란쳇의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그녀는 영화를 위해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독일어를 익히며, 오케스트라 지휘법을 배웠다. 또한 교양 있는 말투를 구현하기 위해, 그녀가 "진정 예리하고 절대적으로 진실한 대중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수잔 손택의 녹음테이프를 들었다. 케이트 블란쳇은 현재 아카데미상을 2번 받았는데, 과연 프랜시스 맥도먼드에 이어서 3번 받는 배우가 될지 이번 아카데미에서 결정된다. 현재 올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은 양자경과 케이트 블란쳇의 2파전 구도이다.




3.


<TAR 타르>는 음악의 현장감이 살아있는 영화다. 케이트 블란쳇의 피아노 연주, 소피 카우어의 첼로 연주, 드레스덴 필하모닉의 연주를 포함한 모든 영화 속 음악은 촬영 현장에서 라이브로 녹음됐다. '올가'역을 맡은 소피 카우어는 프로 첼리스트이며 친구의 권유로 오디션을 보았다. 소피 카우어는 마이클 케인이 진행하는 유튜브 강좌를 보며 연기를 배웠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장면은 실제로 케이트 블란쳇이 지휘한 것이다.


4.


<TAR 타르>는 모호한 영화이다. 토드 필드 감독은 "이 영화가 완성된 순간, 나는 이 영화와 무관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했을 만큼 최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있다. 또한 토드 필드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자기의 시각대로 이야기할 때 비로소 이 영화는 살아있다"라는 말까지 한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모든 의미와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관객 또한 이 영화를 해석하면서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가는, 또 한 명의 제작자인 셈이다. 이 영화는 리디아 타르와 크리스타와의 관계, 권력이 구동하는 방식, 캔슬 컬처에 대한 코멘트도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질문만 던질 뿐, 규정하지 않는다. 이렇게 간접적인 태도로 관객의 생각의 폭을 넓힌다. 그러니까 간접성이야말로 예술의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5.


<TAR 타르>는 구스타프 말러의 5번 교향곡이 중요한 영화이다. 첫 장면에서 타르는 인터뷰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전부를 다 녹음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5번 교향곡만 아직 녹음을 끝내지 못했다고 말한다. 즉 타르가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할 것은 바로 말러의 5번 교향곡을 녹음하는 것이다. 말러가 5번 교향곡을 작곡할 당시와 타르의 상황은 여러 가지로 겹쳐 있다. 때문에 당시 말러의 상황과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말러는 살아 있을 당시 작곡가라기보다 지휘자로 유명했던 사람이다. 그러다가 현대에 이르러 재평가를 받아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인데, 그 재평가를 하게 만든 핵심 인물 중 하나가 영화에도 등장하는 레너드 번스타인이다.


말러는 5번 교향곡을 만들 당시 인생의 행복에 있어서 정점에 있었다. 4번 교향곡까지 만들었고 작곡가로 주목받지 못하여도 오스트리아 빈에 있으면서 지휘자로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영화에서도 언급되는 '알마'라는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한다. 그 시기에 만들어진 곡이 5번 교향곡이다.


그런데 알마는 말러만큼이나 유명한 사람이다. 알마도 작곡가로 활동하였고, 말러를 만나기 전에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사귀기도 했었다. 그리고 자기보다 스무 살 많은 말러와 결혼을 하였는데, 알마와 자유분방한 성격과 말러의 완벽주의적인 성격은 그다지 맞지 않았던 것 같다. 알마는 '바우하우스'로 유명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외도를 하였고, 말러는 괴로웠던 나머지 상담을 받는데 그 사람이 그 유명한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말러는 그 이후 몰락의 세월을 걷는다. 아내에 대한 실망과 동시에, 너무 사랑했기에 아내로부터 버림받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시달린다. 또한 심장병도 걸리게 되는데, 때문에 말러는 걸을 때 걸음걸이 숫자를 속으로 세면서 통제하며 걸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심장이 너무 나빠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걸음조차 마음대로 걷지 못한 것이다. 결국 말러는 고통받다 세상을 일찍 떠나게 된다.


말러의 이야기와 영화의 이야기는 굉장히 많이 겹치고 있다. 말러가 5번 교향곡을 만든 이후 펼쳐진 이야기가 타르가 정점에서 추락하는 이야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또한 알마에 대한 말러의 사랑은 올가에 대한 리디아 타르의 사랑으로 변환되어 있다. 타르는 올가에 매혹되어서 그녀를 부정한 방식으로 첼리스트로 채용하기도 하는데, 끝내 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타르는 올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같이 뉴욕으로 출장까지 가는데, 올가는 시차 때문에 피곤하다며 일찍 자버린다. 하지만 올가는 밤중에 몰래 밖으로 나가며 타르를 저버린다. 타르가 등이 아프거나 얼굴이 다치는 육체적인 고통도 말러의 건강적인 문제와 겹쳐있다.


6.


<TAR 타르>는 첫 장면부터 이상한 영화다. 이 영화는 애덤 고프닉이 리디아 타르를 인터뷰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실제 뉴요커 기자이자 작가인 애덤 고프닉이 자신의 역할로 출연한다.) 애덤 고프닉이 리디아 타르의 경력을 나열하면서 영화는 시작하는데, 사실 영화 문법상 굉장히 이상한 시작이다.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음성으로 경력과 업적을 말하는 것인데, 이는 시나리오의 대원칙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를 정확히 위배하는 방식이다. 영화는 이 첫 장면을 통해 관객에게 리디아 타르의 정보를 청각으로 주입하는 것이다. 이 방식을 통해 관객은 리디아 타르가 얼마나 정점에 위치한 인물인지 주입식으로 전달받는다. 


이렇게 정보를 주입식으로 전달받으면 우리가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없어진다. 시각적으로 보여주면 관객이 다르게 판단할 수 있지만, 이미 판단이 끝난 아주 긴 약력을 전달받기 때문이다. 즉 영화의 첫 장면이 끝나면 우리는 리디아 타르가 무슨 인물인지 명확히 알 것만 같다. 그런데 놀랍게도 2시간 40분 동안 영화를 통해 리디아 타르를 보고 나면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도통 알 수 없다. 2시간 40분 동안 리디아 타르를 보지만 마지막 장면이 끝나면 우리는 그녀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골똘히 생각하게 만든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의 캐릭터 스터디는 일반적인 방향과는 큰 차이점이 있다.




7.


<TAR 타르>는 전락의 스토리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보통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밑바닥의 사람이 정상으로 올라가는 신데렐라 스토리이고, 하나는 정상의 사람이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전락의 스펙터클이다. 일반적으로 이 영화를 보면 후자에 해당한다. 실제로 리디아 타르는 정점에서 시작해서 끝에서 가장 바닥까지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리디아 타르의 전락을 스펙터클하게 중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이상할 정도로 길다. 영화의 종반부에서 리디아 타르는 동남아시아로 떠난다. 영화에서 정확히 어떤 지역인지 묘사하고 있지 않으나 강에서 나누는 악어에 대한 대화를 통해 필리핀임을 알 수 있다.(말론 브란도는 <지옥의 묵시록>을 베트남에서 찍지 못해 필리핀에서 찍었다.) 사실 타르의 전락은 한두 장면 정도로 충분히 묘사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필리핀에서의 이야기는 독립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길게 묘사가 되고 있다.


8.


<TAR 타르>는 예술가와 예술 작품의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는지 묻는다. 초반 인터뷰에서 타르는 말러의 음악을 의도 담아서 해석하고 싶다고 말한다. 즉 말러의 삶을 지휘자가 해석하는 것이 음악적인 해석과 불가분의 관계임을 말한다. 그리고 5번 교향곡은 비통함이 아닌 사랑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5번 교향곡의 4악장은 현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굉장히 슬픈 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죽음의 테마 혹은 비통의 감각 같은 말러의 마음이 투영되었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타르는 당시 말러는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사랑의 테마를 지지하는 것이다. 즉 타르는 예술가의 삶과 예술 작품은 함께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타르가 겪는 가장 중요한 사건, 소위 '캔슬 컬처'에 관련해서 세상으로부터 저항을 받는다. 그때 그녀의 항변은 예술과 예술 작품은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초반의 주장이 후반에서 뒤집히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종반부에 이르게 되면 뒤집혔다고 볼 수도 있고, 유지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영화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9.


<TAR 타르>는 결국 전락의 이야기가 아니다. 초반 인터뷰에서 애덤 고프닉은 리디아 타르에게 지휘자로써 시간을 무대 위에서 어떻게 통제하는지 묻는다. 타르는 모든 것은 이미 리허설 단계에서 끝났고 무대 위에서 정확히 시간을 통제한다고 말한다. 즉 무대 위에서 즉흥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영화의 엔딩과 붙여서 생각하면 이야기를 복합적으로 만드는 요소가 된다. 필리핀의 무대 이전의 모든 이야기를 리허설로 생각하는 것이다.


5번 교향곡을 제대로 연주하는 것이 염원이라던 타르는, 끝내 영화에서 단 한 번도 5번 교향곡을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다. 오케스트라에서 쫓겨난 타르는 엘리엇이 대신 연주를 하려 할 때 무대에 난입해서 주먹까지 날린다. 그렇게 전락의 순간이 펼쳐지고 필리핀의 무대에 서 있는 그녀를 보여주며 영화는 끝나는데, 그 순간 타르가 연주하는 곡은 게임 <몬스터 헌터>의 음악이다. 마지막 무대만 본다면 전락의 순간에서 버둥대는 한 인간의 비참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영화 본편에 해당하는 긴 이야기들을 필리핀 무대에 오르기 위한 리허설로 생각한다면 전락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10.


<TAR 타르>는 마지막 장면이 이상한 영화다. 서구 세계에서 쫓겨난 리디아 타르는 변방의 무대인 필리핀으로 향하는데, 마지막 연주 장면에 있어 몇 가지 이상한 일을 겪는다. 타르가 강에서 수영하고 싶다고 말하자 같이 간 사람이 여기는 악어가 우글거리기 때문에 안된다고 하고 말론 브란도 영화에서 뛰쳐나온 놈들이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그 자체로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한 악어가 예술의 세계 바깥으로 뛰어나와서 강에 서식하며 위협자가 되고 수영을 못 하게 하는 것이다. 즉 악어는 타르의 마음이 투영된 대상이다. 그 순간 타르는 자신이 악어임을 깨닫는다. 초반 인터뷰에서 '카바나'라는 히브리어를 언급하며 과거의 행동들의 의미를 새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이는 후반부에서 '카바나'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포에서 사람들이 즐겁게 놀 때 정작 타르는 폭포 뒤에서 그 모습을 우두커니 볼 수밖에 없다.


다음 장면은 더욱 의미심장하다. 타르는 약을 처방받은 다음 마사지를 받고 싶다고 말하자 상대방은 그것을 매매춘으로 오해한다. 그곳에서 프런트 직원은 타르에게 어항으로 가라고 한다. 매춘을 하는 여성들이 모여 있는 곳이 어항처럼 꾸며져 있기 때문에 어항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앞서 타르는 악어로 묘사되었다. 그녀의 과거 권력관계가 이 장면에서 명확하게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매춘 여성들의 위치이다. 모두 고개를 내리고 있는 매춘 여성들 가운데 5번 여성만이 타르를 쏘아 보고, 타르는 당황하며 바깥으로 나와서 구토를 한다. 이는 말러의 5번 교향곡과도 관련되어 있으며, 5번 여성의 위치가 정확히 첼리스트 올가의 위치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흥미롭다. 그러니까 자신의 순수한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올가와의 관계가 사실 매매춘과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충격을 받고 구토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르가 무대에 올라서서 비디오 게임의 음악을 녹음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엄청난 전락으로 보이지만, 묘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 순간 내레이터의 이야기 때문이다. 내레이터는 "5함대에 탄 승무원들이여, 우리는 드디어 장엄한 여행을 떠날 텐데 혹시라도 두려워지면 당장 하산하라. 절대 나는 거기에 대해서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밑바닥에서 타르가 연주하는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녀가 완벽한 새로운 출발처럼 보이기도 한다. 앞서 서구 사회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리허설로 생각하면 마지막은 그녀가 준비한 무대의 실현으로 볼 수도 있다.


더군다나 필리핀에 가기 직전에 고향에 간 리디아 타르는 어릴 적 보았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강연을 본다.(실제 레너드 번스타인이 출연한 <청소년 음악회> 첫 에피소드 '음악이란 무엇인가?'이다.) 그녀가 클래식에 빠지게 된 감동적인 첫 경험일 텐데 그 영상에서 번스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어떤 감정은 언어화해서 이야기할 수 없다. 깊고 폭넓고 복합적인 어떤 감정은 절대 언어로 옮길 수가 없는데, 음악은 그것을 전달한다. 그래서 음악은 위대하다. 그리고 음악은 움직임이다. 그 움직임에 따라서 흘러가는 것이다." 타르는 번스타인에 대한 추종자이기 때문에 뉴욕에 가서 자기 자서전을 낭독할 때 읽는 문장도 이 말의 요지와 같다.


또한 세바스찬이라는 보조 지휘자를 해고하려고 할 때 타르는 "지휘자는 떠돌아 사는 것이 숙명이고, 지휘자의 집은 결국 세계 어디를 가나 지휘대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마지막 순간에 그녀에게서 실현된다. 아무리 비참한 필리핀에 있다 할지라도 타르는 흐름에 따라서 그 자리에 도착한다.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움직임이라는 번스타인의 말을 생각한다면, 타르에게 닥쳤던 수많은 불행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그 순간만큼은 음악의 위대함이 살아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장 비참한 순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영화의 엔딩은 굉장히 복합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11.


<TAR 타르>는 캔슬 컬처에 관한 영화이다. 캔슬 컬처는 유명인 혹은 특정 일반인을 그가 과거에 했던 말, 행동에 대한 잘못된 요소를 고발에 가깝게 공론화하는 것이다. 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격하고 그 사람의 위치를 박탈한다. 이 영화는 캔슬 컬처를 다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거나 복합적이다. 즉 리디아 타르가 했던 나쁜 행동들로 인해 쫓겨나는 전형적인 과정과 처벌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영화는 정확하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크리스타와 타르와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최종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혐의는 제시되지만 그녀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다. 영화는 이것을 모호하게 만들어 그녀의 진실이 무엇인지 드러내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사건을 은폐하는 과정에서 명백한 범죄를 저지르지만 이야기가 풀려가는 과정을 보면 영화에 대한 태도가 모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푸르트뱅글러의 이야기도 나온다. 푸르트뱅글러는 나치가 아니었지만 나치 시대에 독일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위치와 자격을 박탈당한다. 명백하게 리디아 타르가 푸르트뱅글러와 비유되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그녀의 다른 지점을 건드리고 있다.


이 영화의 초반부의 흥미로운 장면인 줄리아드 음대 특강 장면도 리디아 타르가 얼마나 권력에 도취되어 인물인지 묘사함에 동시에 그녀를 대변하는 장면이다.(실제로 이 장면은 끊김 없는 하나의 테이크로 찍었다.) 리디아 타르는 맥스라는 흑인이자 팬젠더(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성 정체성이 바뀌는 사람)를 굉장히 공격적으로 몰아붙인다. 구태여 슈바이처의 말을 인용하면서 '니그로'라는 말을 사용하며 자기 스스로 레즈비언임을 드러내며 발언권이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타르는 'U-Haul' 레즈비언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여기서 U-Haul은 혼자서 이사를 할 때 차량 뒤에 고리를 통해서 보조차를 연결해 이사 트럭을 빌려주는 회사 이름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 금방 빠지는 레즈비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충만한 레즈비언의 정체성으로 맥스를 공격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격의 핵심은 "바흐의 여성 혐오적인 태도 때문에 나는 그 음악을 들을 수 없다"라는 맥스의 주장이다. 그것이 얼마나 낮은 생각인지 타르는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장면이 구성되어 있다. 얼핏 보면 타르가 얼마나 권력에 중독된 인물인지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캔슬 컬처에 의해 왜곡된 진실을 대변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처럼 영화에서 캔슬 컬처를 어느 한 방향으로 다루지 않는다. 지금 이 시대 예술에서 가장 화두인 딜레마 '삶으로부터 예술 작품을 분리해서 볼 것인가'에 대한 수많은 문제를 끌고 온다. 잘못된 말을 하거나 혹은 범죄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 만들었던 예술 작품을 과연 과거로 소급해서 배격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딜레마를 복합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영화는 결국 관객에게 몫을 돌리며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있다.


12.


<TAR 타르>는 권력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리디아 타르라는 인물에 대한 캐릭터 스터디로 볼 수도 있다. 영화는 단순히 그녀를 권력에 도취된 인물로 묘사하지 않고 권력관계를 다루는 방식을 통해 복합적인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녀가 최고의 지휘자로 오르게 된 계기 중 하나가 영화 초반부에 언급되는 페루에서의 토속 음악 연구이다. 그것이 큰 성과로 소개되고 있는데 이 연구 중에서 '크리스타'와 '프란체스카'와 관계를 맺었다. 정확히 묘사가 되지 않으나 여러 여자와 관계를 가지는 환상 같은 장면이나 정글에 침대 위에서 누워있는데 불이 붙는 꿈같은 장면을 통해 제시되고 있다. 셋의 관계는 굉장히 친밀했으나 여러 가지 사건으로 뒤틀리고 갈라진 것이다. 타르는 크리스타와 함께 어떤 성적인 사건이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 혐의를 받게 된다. 또한 프란체스카가 힘들어서 안아달라고 하자 타르가 지금은 그런 장소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둘과도 성적인 관계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르는 부인 샤론, 새로운 첼리스트 올가까지 포함해서 과거의, 현재의, 미래의 연인이 함께 공존하고 있다.


이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권력이 작동한다는 것이고, 거래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타르가 사람들을 권력으로 이용하기도 하지만 거래로 인한 상호 계약 관계이기도 하다. 영화 후반부, 타르가 뉴욕 일정을 끝내고 베를린으로 돌아왔을 때 샤론은 타르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꺼낸다. 샤론은 1번 바이올린이 되기 위해, 타르는 상임지휘자가 되기 위해 서로 거래를 하는 권력이 작동했다.(영화에 언급되는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카라얀은 베를린 필하모닉을 30년 넘게 강압적으로 통제해 진행을 해서 수많은 업적과 동시에 잡음을 낸 인물로 유명하다. 카라얀 이후 독일의 대부분 필하모닉은 민주적인 절차로 지휘자를 뽑는다.) 그러니까 샤론도 1번 바이올린이라는 권력을 잡기 위해 타르와 동맹 관계를 맺은 것이다. 즉 둘의 관계에서 권력과 사랑은 분리할 수 없다.


타르와 보조 지휘자 '세바스찬'의 관계를 보면 영화가 얼마나 세밀하게 권력 작동 방식을 묘사하는지 알 수 있다. 세바스찬은 타르의 스승 '안드리스'의 추천으로 보조 지휘자로 올 수 있었다. 타르가 세바스찬한테 안드리스 아파트 같은 층에 산다고 언급하는 것을 보아 세바스찬과 안드리스는 예전에 연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바스찬은 보조 지휘자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 타르에게 아부를 한다. 클라리넷 소리가 너무 크다는 조언도 1번 바이올린 샤론의 소리를 더 키우기 위함이다. 음악적인 조언 같아 보여도 사실 권력을 위한 아부인 것이다.


하지만 타르는 세바스찬을 해고하고 프란체스카를 보조 지휘자로 임명하고자 한다. 그래서 타르가 고상한 말로 해고하려고 하자 세바스찬이 '그 여자 때문이냐'라는 말로 핵심을 짚는다. 타르는 이것이 들통나면 자신에게 위기가 찾아오니까 프란체스카에게 거절을 표현한다. 이후에 프란체스카가 크리스타와 관련된 이메일을 넘기면서 영화 후반부의 상황이 찾아오는 것이다.


크리스타는 타르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성공을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관계가 틀어지면서 타르가 크리스타의 앞길을 막는 이메일을 기관과 오케스트라에 보내고 활동할 수 없게 된다. 그 상황에 대해서 크리스타가 분노의 이메일을 보내지만 타르가 이를 무시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영화 초반부에 나타나는 붉은 머리의 여인은 아마 타르를 지켜보는 크리스타일 것이다.


타르는 이에 대해 혐의를 받지만 영화는 타르를 단순히 나쁜 사람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타르는 크리스타와의 관계를 통해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다. 영화에서 타르가 겪는 환각과 환청은 이 죄책감으로 인한 것이다. 알 수 없는 여자의 비명, 밤중에 메트로놈 소리, 계속해서 등장하는 이상한 문양은 타르가 겪는 정신적 이상이다.(호러 영화의 틀로 보면 죽은 크리스타가 타르를 괴롭히는 것이다.) 심지어 그녀가 등이 아파서 병원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의사가 'Notalgia(등 통증)'라고 말하자 이를 'Nostalgia(향수)'라고 오해한다. 즉 과거의 상처가 그녀를 계속 괴롭히는 것인데 의사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쉽게 치유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타르가 권력관계에서 벗어나 사랑을 주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입양한 딸 '페트라'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자금을 주는 '엘리엇'의 연주회를 내팽개치고 페트라의 행사에 참여할 만큼 딸을 아낌없이 사랑한다. 또한 페트라가 난민이라는 설정에서 타르가 선의의 측면이 있음을 묘사한다. 타르는 자신의 자작곡의 제목을 'For Petra(페트라를 위해)'라고 지을 만큼 딸을 진심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영화는 타르의 다양한 이면을 보여주고 우리가 타르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게 만든다.


페트라뿐만 아니라 권력관계에서 벗어난 인물이 한 명 더 있는데, 바로 올가이다. 올가는 앞서 말한 권력적인 관계에서 통제할 수 없는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다. 타르와 올가는 처음 식사하는 장면에서 타르는 올가를 채식주의자로 생각하고 오이 샐러드나 생선을 권하며 자신의 경험을 과시한다. 하지만 올가가 주문하는 것은 송아지 요리이다. 그러니까 올가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라 육식주의자였던 것이다. 올가는 타르에게 자작곡의 음을 바꾸는 것이 어떻냐고 거침없이 제시하고, 자신에게 큰 영향을 준 연주회를 유튜브로 통해 봤다고 말할 만큼 자신만만하다. 즉 타르에게 작동하였던 권력 방식이 올가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타르가 올가의 곰인형을 돌려주는 장면은 이를 굉장히 잘 나타내고 있다. 타르는 올가에게 곰인형을 돌려주기 위해 지하로 내려가는데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거대한 검은 개다. 그리고 거기서 도망쳐 나오다가 넘어져서 얼굴을 다치게 된다. 타르는 올가를 곰인형 같은 존재로 인식하였는데, 사실 올가는 포식자와 같은 검은 개인 것이다. 이 장면은 사실적인 흐름을 이어오던 영화에서 동떨어져서 큰 차이를 가지고 파장을 가지고 온다. 이후에 타르는 프란체스카가 남긴 메모에서 자신의 이름 TAR가 RAT으로 변형된 것을 발견한다. 즉 타르는 이제 개에게 쫓기는 쥐의 신세가 되는 것이다.


13.


<TAR 타르>는 걸작이다. 케이트 블란쳇의 연기뿐만 아니라 각본이나 연출에서도 영화는 굉장히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탄탄한 구조를 가지면서 동시에 하나로 해석되지 않는 모호함을 통해 관객에게 여러 가지 상념을 남긴다. 예술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이루어낸 성취는 탁월하다. 하나의 해석이 아닌, 그 이상을 남김으로써 끊임없이 영화를 곱씹게 만든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호령하는 영화란 바로 이런 영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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