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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순범 Jul 07. 2023

<말없는 소녀>,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의 포옹

말해야 한다는 격려 대신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의 포옹

본 영화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말없는 소녀>의 원작 소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우리는 조용한 사람을 보고 할 말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반대도 성립할 수 있다. 할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 조용할 수도 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목구멍에 꽉 차서 나오지 않아 억지로 말을 삼키는 사람이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소녀의 이야기이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오히려 말 없는 소녀의 이야기.



세상 구석에 숨은 소녀

영화 <말없는 소녀>는 한 소녀의 이름 '코오트'를 호명하면서 시작한다. 하지만 정작 그 장면에서 코오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수풀이 가득한 풍경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카메라가 패닝하는 순간 수풀 속에 숨어 있는 '코오트'의 모습이 보인다. 이는 코오트의 심적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녀는 아빠의 폭력적인 억압을 받고 있으며 자매들로부터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그녀는 이 모든 세상의 압박 속에서 그저 조용히 숨어 지내고 싶다.




코오트는 글자를 잘 읽지 못한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별종 취급받아 늘 혼자 있다. 혼자 우유를 먹는 순간 또래 아이들이 뛰어가는 바람에 엎지르고 옷에 묻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주위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채, 학교 밖으로 뛰어나가고 만다. 그때 그녀는 화면 바깥쪽으로 뛰어가 우리의 시선에서 점점 멀어진다. (이는 후술할 코오트의 동선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학교를 나가 집으로 걸어가는 코오트의 표정을 다시금 떠올린다. 할 말이 너무 많아 억울하지만, 끝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소녀의 얼굴. 그래서 그 장면에서 그 얼굴, 그 소리, 그 풍경은 더욱 곡진하게 다가온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의 초반 장면은 원작 소설에는 없다. 또한 코오트의 시점과 독백으로 진행되는 소설에서 코오트는 생각보다 머릿속에서 말이 많은 소녀이다. 하지만 영화는 소설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간다. 즉 앞서 언급한 영화의 초반 장면은 코오트가 세상으로부터 받는 억압을 드러내는 동시에, 사랑을 받지 못해 어깨를 푹 숙이고 걸어가는 초라한 마음을 영상으로 탁월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구태여 소설의 독백을 빌려와 내레이션을 하지 않는다. 그저 풍경으로 보여주고 시점으로 답한다. 우리는 자그마한 햇살 속에서도 기쁨을 느끼는 코오트의 시점을 통해 그녀의 마음을 어림짐작한다.



둘만의 비밀

코오트는 임신한 엄마와 아빠 때문에 강제로 먼 친척 에이블린과 션 부부에게 여름 방학 동안 맡겨진다. 코오트가 에이블린 부부 집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는 장면을 자세히 보자. 코오트의 시점 숏으로 시작하는 이 장면은 정면에서 에이블린이 코오트를 쳐다본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코오트를 내려다본 것과 다르게 에이블린은 기꺼이 무릎을 꿇어 코오트와 시선을 맞춘다. 에이블린은 코오트에게 기꺼이 사랑을 건네줄 준비가 되어있다는 자세이다. 아빠 '댄'이 모진 말에도 불구하고 에이블린은 신경쓰지 않는다. 댄은 식사 자리에서 "아이들 먹이는 게 문제"라고 말하고 코오트도 "엄청나게 먹을 거"라고 말한다. 그는 접시에 담배를 지지고, 에이블린이 건네준 선물이 떨어지지만 션이 다시 주워줄 때까지 가만히 있는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아일랜드 언어 '게일어'를 쓰지만 유일하게 댄만 영국식 영어를 구사한다. 언어를 통해서도 코오트와 아빠가 얼마나 먼 사이인지 알 수 있다.




코오트는 에이블린 부부에게 난생처음으로 애정 어린 말, 정성스러운 목욕, 사랑이 담긴 머리빗질을 받는다. 에이블린과 코오트가 샘터를 향하는 풍경도 코오트를 따스하게 축복하는 듯하다.(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비단 부모뿐만이 아니라, 자연도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는 풍경으로 상처 난 마음을 봉합한다.) 샘물에서 그들이 양동이에 물을 담는 순간, 카메라는 수면에 비친 모습을 잡는다. 코오트가 국자로 수면에 다가가는 순간, 파동이 일렁인다. 코오트의 마음의 표면 또한 일렁이는 것을 탁월하게 묘사한 장면이다. 이때부터 코오트의 세상은 따스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사실 에이블린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코오트는 이 사랑을 쉽게 손에 쥐지 못한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아이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잘 때 침대에 오줌을 지리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에이블린은 오줌을 적당한 거짓말로 넘어가 준다. 분명 에이블린은 코오트에게 "이 집에 비밀은 없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둘만의 비밀'은 일종의 구원으로 작동한다.



함부로 정의하지 않는 순간 소녀는 뛰어간다

단순히 '말 없는 아이', '별종'이라고 취급한 가족과 달리 영화도 코오트를 쉽게 정의하지 않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 에이블린 부부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카드놀이하는 장면에서 복권을 팔러 온 사람이 '이 아이는 누구야'라고 말하며 코오트를 가리킨다. 그 순간 영화는 대답을 듣지 않고 장면을 전환시킨다. 이는 에이블린 부부의 과거를 가리는 동시에, 코오트를 함부로 정의하지 않는 영화의 시선과 일치한다. 아이의 기질과 성격을 하나의 단어 속에 가두는 것을 지양하는 것이다. 그저 영화는 소녀와 소녀를 둘러싼 세계를 가만히 응시하고 시점으로 보여줄 뿐이다. 영화는 한 아이를 규정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기존의 폭압적인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마음을 쉽사리 열지 못하는 사람은 코오트뿐만 아니라, 션도 해당한다. 션은 코오트에게 별로 관심이 없고 TV만 보며 "잘 자렴"이란 말만 반복한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코오트와 밖으로 나가 농장을 청소할 때, 코오트가 사라지자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인다. 이후 션은 코오트와 함께 농장을 청소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코오트는 가족과 사회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를 통해 코오트는 세상을 배워나가기 시작한다.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떠돌던 코오트가 이때부터 '소젖을 왜 소한테 양보 안 하는가'와 같은 천진난만한, 지극히 아이 같은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션이 달리기 시간을 재준 다며 우체통까지 뛰어갔다 오라고 코오트에게 말한다. 그 순간 코오트는 영화에서 무력했던 모습을 벗어던지고 생기 넘치게 앞으로 뛰어간다. 그때 코오트가 뛰는 방향은 뒤쪽에서 앞쪽이다. 앞서 도망치듯이 관객에게 멀어지는 모습과 달리 관객 쪽으로 뛰어온다. 그렇게 코오트는 세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1:33의 화면비(아카데미 비율)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화면은 늘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자연의 풍경뿐만이 아니고 집에서도 그렇다. 원래 집에서 답답하게 느껴졌던 화면은 에이블린 부부의 집에선 깔끔하고 소박하여 정겹게 느껴진다. 단순히 창문을 잡더라도 열려 있는 창문을 잡아 열려 있는 도움의 손길이 있음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자연 속의 인물들도 익스트림 롱숏으로 잡아 한 아이의 성장에 자연도 속해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아무 말도 안 해도 된다

마을 사람의 장례식 도중 '아일린' 아주머니와 함께 집으로 가는 코오트는 에이블린 부부의 비밀을 듣는다. 바로 에이블린 부부의 아들이 개를 따라가다가 물속에서 익사했다는 것이다. 코오트가 숨어 있던 세상의 진실을 듣는 순간, 코오트를 클로즈업한다. 그리고 아일린의 집에 도착한 순간 보이는 풍경은 본인의 원래 집이다. 남의 비밀을 떠들고 다니는 아일린의 집은 코오트의 원래 집과 비슷한 공간 구성을 가지고 있다. 그 순간 션이 코오트를 데리러 오고, "아이가 말이 없다"라는 아일린의 말에 "할 말은 하는 아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보기 드문 아이"라고 말한다.




코오트는 여태까지 죽은 아들의 옷을 입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에이블린은 무의식적으로 코오트에게 옷을 입혀 아들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 이후 션은 코오트에게 밤바다에 나갔다고 오자고 한다. 그들은 해변에 서로 기대어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그리고 션이 바다에서 말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건넨다. 그리고 어부들이 바다에서 말을 건진다고 말한다. 그때 바다의 떠있는 등불은 2개이다. 션은 코오트에게 "아무 말도 안 해도 된다. 그걸 기억하렴"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집으로 가려고 할 때 바다 위의 등불은 3개가 된다. 각 등불은 션과 코오트, 그리고 죽은 아들을 상징한다. 바닷속으로 떠난 아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비추는 빛으로 그들을 위로한다. 마치 바다에서 사라진 말을 어부가 건진 것처럼.



두 번의 '아빠'

여름 끝 무렵 코오트가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다. 마을에서 송아지가 태어나 잠깐 일정이 미뤄진 사이에 코오트는 자기 혼자서 양동이를 들고 우물로 향한다. 양동이에 한꺼번에 많은 물을 담으려 하자, 그 무게에 못 이겨 코오트는 우물 속에 빠지고 만다. 아이가 세계를 한꺼번에 마음속에 담으려 할 때 일어나는 실수이다.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코오트는 감기에 걸리고 만다. 나중에 자신의 원래 집에 도착했을 때 기침하는 코오트의 모습을 보고 아빠는 감기에 걸렸다고 말하며 에이블린 부부를 질책한다. 그러자 코오트는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말한다. 영화 내내 아빠에게 아무 말도 못 하는 아이는 이제 할 말은 하는 아이가 되었다.




에이블린이 "우리야말로 고마웠다"라고 말하며 작별 인사를 건네지만 코오트는 작별 인사를 하지 않는다. 이는 정말 작별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이 목구멍에 차올라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것이다. 에이블린 부부가 떠나고 망설이던 코오트는 이내 그들에게 뛰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건네는 대신 션과 힘껏 포옹한다. 그리고 "아빠"를 두 번 말한다. 첫 번째 "아빠"와 두 번째 "아빠"는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는 자신의 아빠를 보고 말하는, 일종의 호명에 가깝다. 하지만 두 번째는 포옹하며 말하는, 진심을 담은 마음이다. 중의적으로 느껴지는 첫 번째 "아빠"라는 단어는 두 번째 "아빠"에서 명확하게 뜻을 가진다.





말해야 한다는 격려 대신 말하지 않다고 괜찮다는 위로의 포옹

차근차근 소녀의 시선을 풍경 속에 아름답게 담은 이 영화는 한 발짝 떨어져 지켜보는 태도를 가진다. 그러니까 소녀에게 다가가 '말을 해야 한다'라고 등을 두들기며 격려하지 않는다. 다만 한 발짝 떨어져서 소녀에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다음 소녀가 가진 상처와 마음을 응시하며 차근차근 보듬는다. 그리고 때가 되면 꽉 껴안아준다. 소녀에게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연거푸 말하며 위로의 포옹을 건넨다. 말이 없다고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말보다 중요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곡진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말이 아닌 몸짓일 수도, 애틋한 시선일 수도 있다. 그렇게 말보다 더 큰 마음의 풍경이 다가올 때 소녀의 마음은 세상을 향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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