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순범 Dec 23. 2023

[월간 영화기록] 가을의 기록들

가을의 영화 별점과 단평

[월간 영화기록]은 월마다 간단한 소회와 함께, 영화관에 개봉 혹은 OTT에 공개된 영화들을 총정리하여 별점과 간단한 평을 남기는 공간입니다.

예술은 희망이자 구원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우리는 예술을 탐미하며 삶을 영위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철학부터 칸딘스키의 미술에 이르기까지, 이해할 수 없더라도 예술은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였다. 예술이야말로 이 세상에 하나 남은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가치이다. 우리는 예술의 위대함을 받들어 찬미해야 옳다. 안 그런가?


안 그렇다. 예술이 삶의 희망이자 구원이라는 말은 '개소리'이다. 예술이 어떤 지고지순한 가치가 있어서 인간의 의식주보다 위에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당장 주위를 둘러보자. 우리는 오늘 먹을 음식을 걱정해야 한다. 메뉴를 생각하고 거기에 알맞은 음식을 구해야 한다. 사 먹으면 그만이라고? 사 먹는 음식의 돈은 땅 파서 나오는가. 우리는 노동을 통해 시간을 돈으로 바꿔야 한다. 자본주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이상 돈은 만사형통의 도구이므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돈을 번다고 집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는 평생 일해도 자신의 집을 온전히 가지기 힘든 사회에 살고 있다.


자, 어떤가. 저 문제를 예술이 해결할 수 있는가? 안타깝지만 예술은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할 힘이 전혀 없다. 물론 예술 활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내 경험상 예술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1%라고 봐도 무방하다. 내가 만난 예술가들은 예술이 정말 좋아서 돈을 하나도 신경 쓰지 않거나, 부업으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만약 예술가가 아니라면 예술의 의미는 더욱 희미해진다. 오히려 예술 취미는 돈 먹는 하마이다. 예술을 즐길수록 의식주를 해결할 돈이 점점 사라진다. 예술은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지만, 의식주는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 최우선 가치이다.


그럼 예술의 존재가치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잠깐의 시간을 내어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들을까. 심지어 즐기면 즐길수록 돈이 빠져나가는 데 말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삶은 불행하다. 미디어가 행복 전도사가 되어 주야장천 행복을 외치지만, 앞서 말한 의식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노동을 통해 시간을 돈으로 바꾸고, 그것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끊임없는 삶의 굴레를 반복한다. 반복은 권태를 만들고, 권태는 허무를 만든다. 결국 우리 삶은 허무하다.


이때 예술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현한다. 예술은 환상이다. 영화는 스크린으로, 문학은 활자로, 음악은 선율로 상상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우리가 예술을 향유하는 순간만큼은 권태로운 삶을 벗어난다. 그것이 찰나의 순간일지라도 말이다. 결국 예술은 '더 행복'한 것이 아니라, '덜 불행'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문득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엄동설한 속에서 가을의 기록들이다.

(이번 가을의 기록들은 10월과 11월에 개봉한 영화들의 별점과 단평을 남깁니다.)



<화란>

감독 : 김창훈


기필코 벗어나려는 자와 늪처럼 가라앉은 자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강렬한 페이소스의 인력과 척력.

그리고 마침내 서로 밀어올리기 위해 뒤엉키는 손이 현현하다.

★★★(3.0)



<당나귀 EO>

감독 :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당나귀의 마음과 시선까지 표현해 내고야 마는 촬영, 편집, 음악, 그리고 눈(Eyes).

★★★★(4.0)



<플라워 킬링 문>

감독 : 마틴 스코세이지


역사에 대한 울분. 무지에 대한 탄식.

그리고 영화적 의식으로 그들의 넋을 위로한다.

★★★★



<블루 자이언트>

감독 : 타치카와 유즈루


죽어가는 음악을 연주하며, 무대 위에서 자신을 산화하며 죽는 것에 대하여.

★★★(3.0)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


당신들의 비극은 역사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알아도, 어떻게 살 것인가.

거장의 고집스러운 미학적 뚝심, 노장이 다음 세대에 전하는 따스한 전언.

자신의 작품을 집대성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발걸음으로 나아간 미야자키 하야오.

★★★★☆(4.5)



<더 킬러>

감독 : 데이빗 핀처


영화가 그 자체로 '암살자'이다.

자로 잰 것만 같은 정교한 구성.

말라서 갈라질 것 같은 건조한 연기.

긴장감을 쥐락펴락하는 신들린 사운드 디자인.

★★★★(4.0)



<너와 나>

감독 : 조현철


혼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엉킨 이어폰을 꺼냈다.

잔뜩 꼬여서 풀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하고 다니니까 맨날 엉키지.

너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엉킨 이어폰을 풀지 못했다.

짜증 나고 분했다.

그리고 네가 그리워서 울었다. 그냥 한없이 울었다.

★★★★(4.0)



<우리의 하루>

감독 : 홍상수


홍상수의 술 게임을 계속 보고 싶다.

★★★☆(3.5)



<키리에의 노래>

감독 : 이와이 슌지


힘 있는 목소리에 비해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영화의 리듬.

★★☆(2.5)



<톡 투 미>

감독 : 대니 필리포 / 마이클 필리포


잔뜩 웅크리다가 어마어마한 폭발력으로 영화관을 숨도 못 쉬게 움켜쥐는 공간 장악력.

신선한 아이디어와 특유의 연출이 잘 결합했다.

★★★☆(3.5)



<소년들>

감독 : 정지영


갑갑한 사건을 그저 갑갑하게.

★★(2.0)



<더 마블스>

감독 : 니아 다코스타


외화내빈.

좋은 유머와 액션으로 소소한 재미는 챙기지만 텅 빈 이야기로 정작 중요한 흐름을 놓친다.

★★☆(2.5)



<괴인>

감독 : 이정홍


모두 똑같이 서있지만 교묘하게 어긋나있는 연결과 분리의 괴인들에 대하여.

시각적 연결과 청각적 분리로 영화 형식마저 괴인 같다.

★★★(3.0)



<헝거게임: 노래하는 새와 뱀의 발라드>

감독 : 프란시스 로렌스


전작의 휘광을 벗어던지면서 그들의 세게로 다시 쓴 '로미오와 줄리엣'.

사회와 계급을 뛰어넘는 사랑의 필요조건은 '얼마나 사랑하는가'가 아니라, '상대를 위해 주변을 얼마나 무시할 수 있는가'의 문제.

★★★(3.0)



<만분의 일초>

감독 : 김성환


공피고아(攻彼顧我).

상대방을 공격하기 전에 먼저 나를 살피고 돌아보라는 의미의 바둑 용어.

복수를 위해 움켜쥔 손가락은 자신의 손바닥도 파고든다.

영화가 지나치게 관객에게 의미를 떠먹여준다.

★★☆(2.5)



<서울의 봄>

감독 : 김성수


속도감으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그해 서울의 봄은 짧고 추웠다.

★★★(3.0)



<빅슬립>

감독 : 김태훈


잠자리를 찾기 위한 고난한 여정, 정작 밖을 맴돈 채 자리를 잡지 못한 영화.

★★☆(2.5)



<괴물>

감독 : 고레에다 히로카즈


정밀한 형식의 씨줄과 외로운 이들을 향한 염원의 날줄로, 세상을 향한 시선마저 바꾼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영화가 상영된다.

★★★★☆(4.5)




작가의 이전글 <너와 나>, 문득 네가 그리워서 울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