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달 아래, 널 찾아 헤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를 보았다.
처음에는 2화만 보고 잘 생각이었다. 4화까지 보았다.
자려고 누웠다. 천장에서 4화의 엔딩이 아른거렸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결국 다시 일어나 끝까지 다 보고 말았다.
밤을 꼴딱 새웠다. 하지만 그날 맞이한 아침 햇살은 이상하리만치 여운이 가득했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올해의 최고 화제작이면서 동시에 올해의 최고 애니메이션으로 평가해도 손색없다. 적어도 나는 12월에 무슨 애니메이션이 나와도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가 올해 나온 애니메이션 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마이시 히로유키 감독의 작품 중 <천원돌파 그렌라간>과 <킬라킬>을 무척 좋아하지만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를 본 순간 나는 완전히 매혹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성'이고, 그리고 그것을 납득시킬만한 설득력이라고 생각한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만점이다.
탁월하고 매력적이면서 도취하지 않는 표현
우선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양두구육(羊頭狗肉)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사이버펑크 세계관을 다룬다고 해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다. 흔히 이런 세계를 다루면서 하는 실수 중 하나가 자극적인 표현에 도취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팔다리가 절단되거나 피가 낭자한 연출이 관객에게 파격적이고 효과적인 인상을 줄 수 있지만 남발하면 본질은 놓친 채 표현법만 남기도 한다. 정작 중요한 이야기나 형식을 놓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의 표현법은 인물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방식이면서 관객과 세계가 상호작용하는 중요한 방식이다. 그러니까 이 애니메이션에서 나타나는 표현은 다 이유가 있다. 사이버펑크 세계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도덕관이 결여된 사회이다. 그리고 우리가 부도덕하다고 여겨졌던 것이 당연하게 작용하는 세계이다. 신체를 개조하고 생명의 중요성이 경시되는 사회이다. 성적 쾌락이 최우선이고 범죄는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반대되는 지점에서 자신의 신념을 믿고 가치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 즉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가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는 순수한 가치를 지키는 사람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다. 또한 관객은 사이버펑크 세계를 목도하면서 모든 도덕관이 풀리는 해방감과 쾌락을 즐기고, 순수한 가치를 지키는 인물들의 감정에 더욱 몰입할 수 있다. 이 양가적인 감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후반부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만드는 동력이다.
이 밖에도 원작 게임에서 가져온 연출도 독창적이다. 특히 화면 전환할 때 게임에서 보았던 노이즈를 사용하거나, '산데비스탄'이라는 기술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액션은 굉장하다. 기존의 액션을 재활용하기보단 어떻게 하면 사이버펑크 세계에 어울리는 액션을 연출할 수 있을지 고뇌한 흔적이 느껴진다. 이로써 다른 액션과 차별화되는 지점을 확실히 만들어냈다.
강력한 사회비판 드라마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를 강력한 사회비판 드라마로 볼 수도 있다. 즉 주인공 '데이비드'가 범죄조직 '엣지러너'에 가담하게 된 계기를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한 경고와 비판을 엿볼 수 있다. 데이비드는 가난하지만 어머니의 불법 자금을 통해 명문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다. 하지만 명문 학교에서도 차별을 받고 각종 말썽을 일으킨다. 데이비드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하면서 돈을 벌고 싶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유일한 희망 데이비드가 학교를 다니고 가난에서 탈출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범죄조직의 도로 추격전을 통해 어머니가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데이비드에게 남은 것은 수많은 통지서와 요금 청구서이다. 사회는 잔인하게 데이비드를 몰아붙인다.
가난의 극한까지 간 데이비드가 유일하게 이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바로 범죄이다. 사회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복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데이비드는 이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 군사용 산데비스탄을 장착하고 사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굉장히 위험한 산데비스탄을 여러 번 사용해도 버틸 수 있는 몸이란 것을 깨닫는다.
데이비드의 상황을 현대 사회에 대입하면 여러 가지 지점에서 흥미롭다. 우선 10대 청소년이 어떻게 범죄에 빠지는지 알 수 있다. 그냥 선천적으로 사악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범죄밖에 없는 것이다. 실제로 남미에서 수많은 청소년들이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아니면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범죄밖에 없기 때문에 마약 사업에 이용되곤 한다. 그들을 보호해 줘야 할 사회는 그저 방치한다. 어쩌면 현대 사회와 사이버펑크의 사회는 크게 다르지 않다.
데이비드가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다시 학생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니까 산데비스탄은 데이비드가 가난을 탈출할 수 있는 '축복'이면서,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저주'이다. 그는 이제 가난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인간관계를 맞이하지만 살인이 넘치는 위험한 환경에 몸을 던져야 한다.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삶의 굴레에 갇힌 것이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 모든 사회비판 드라마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나의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는 이렇다.
너를 달에 데려다줄게. 가장 순수한 사랑 이야기
나는 <사이버펑크: 엣지러너>가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 이야기로 느껴진다. 즉 데이비드와 루시의 관계에서 사랑의 역학을 느낀다. 데이비드는 아마 루시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루시를 향한 데이비드의 사랑은 맹목적이며 강렬한 끌림이다. 루시는 그런 데이비드에게 달을 보여주며 자신의 꿈을 공유한다. 이내 '메인'이 등장하며 이 모든 것이 데이비드의 산데비스탄을 회수하기 위한 작전임이 드러난다. 루시는 흡사 데이비드의 사랑을 이용한 팜므파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드는 여전히 루시를 사랑한다. 모든 것이 단순하며 쾌락만을 추구하는 이 세계에서 데이비드가 루시에게 주는 영원한 사랑은,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더는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다. 데이비드에게 루시는 자신에게 희망을 준 존재이다. 앞으로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방식을 알려주었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래서 데이비드는 루시에게 '너를 달에 데려다줄게'라는 말로 사랑을 맹약한다.
훌륭한 로맨스는 사랑을 단순히 '사랑해'라는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자신만의 사랑의 언어를 창조한다. 너를 달에 데려다줄게. 그 말은 <사이버펑크: 엣지러너>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사랑의 언어이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은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다는 것은 더욱 애틋함을 남긴다. 그러니까 루시가 겪은 이 가혹한 세상의 풍파 속에서 데이비드가 약속한 사랑은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일 것이다. 사실 루시는 데이비드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데이비드는 몸에 아무런 금속도 장착하지 않았고 총을 쏠 줄도 모르며 단순히 산데비스탄을 다룰 수만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사실 아무런 기계를 장착하지 않은 데이비드의 몸은 사이버펑크 세계에서 이질적이다. 그래서 모두 기계처럼 살아가는 세계에서 데이비드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맹목적인 사랑의 언어를 건네는 것은 루시에게 큰 감정의 파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4화에서 루시와 데이비드가 키스하는 장면은 숨이 멎을 것만 같다. 보는 순간 호흡이 멈추는 것만 같다. 앞서 기계적이며 인공적으로 느껴졌던 사이버펑크의 형형색색의 조명이 그 순간 그들의 사랑에 환호하고 축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은 순수한 사랑의 순간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이며 그들의 약속을 확인하는 존재이다. 그 순간 흘러나오는 음악은 생명력을 가지고 꿈틀거린다.
후반부에 가면 데이비드가 자신의 신체를 금속과 기계로 대체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루시의 믿음에 대해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루시가 데이비드를 챙겨주었던 처음과 달리 관계가 역전되어 데이비드가 루시를 챙겨준다. 사랑에서 약자는 더 사랑하는 쪽이다. 처음에 약자였던 데이비드는 강자가 되었고, 루시는 약자가 되었다. 인간적이었던 데이비드가 점점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모습은 옅어져 가는 사랑의 말로처럼 보인다. 그래서 루시는 사랑의 끝을 붙잡기 위해 데이비드가 더는 군사용 장비를 장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루시의 진정한 사랑을 깨달아서일까. 데이비드가 루시의 바람과는 달리 군사용 장비를 장착하지만 그 모든 장비와 신체를 루시를 구출하기 위해 이용한다. 자신의 인간성을 상실하는 '사이버 사이코'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약물을 주입해서라도 루시를 구출한다. 그리고 아담 스매셔에게 패배하고 죽고 말지만 끝내 루시는 그토록 원하던 달에 도착한다.
좌절에 빠진 데이비드를 구원한 것은 루시였다. 루시가 없었으면 데이비드는 가난의 수렁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데이비드는 루시를 달에 도달시키며 이 사랑 이야기는 끝난다. 루시도 데이비드를 통해 잔인하고 가혹한 삶의 끝에서 구원을 얻는다. 그들은 서로에게 회복이며 구원의 되었다. 달에 도착한 루시가 햇살에서 느끼는 것은 데이비드가 건넨 삶의 안식이면서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기억되는 방법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다.
<사이버펑크: 엣지러너>의 가장 중요한 대사일 것이다. 데이비드는 어떻게 죽는지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루시의 세상에서 평생 기억될 것이다.
푸른 달 아래, 널 찾아 헤매.
미칠 것만 같은 사랑의 마력을 다룬 데이비드와 루시의 이야기를 보며 검정치마의 노래 <Fling; Fig From France>가 떠올랐다. 날 가지고 노는 걸 알지만 그래서 그녀가 좋은 데이비드. 그리고 푸른 달 아래에서 데이비드를 찾아 헤매는 루시. 이 노래는 가사 속에 그들의 사랑을 영원히 봉인한 것만 같다.
미친 그녀 더 미친 나는
내 모든 걸 다 주었네
내 술도 마셔 난 선명하게
이 밤을 다 기억할래
내 몸을 모두 담궈도 fig
난 눈물론 안 젖어
날 가지고 노는 걸 알어
그래서 난 니가 좋아
니가 좋아
오래전의 얘기지만
내 무덤까진 못 가져갔네
푸른 달 아래
널 찾아 헤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