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fe 365 #2

English

by LiSA

2019년 어느 날. 일에 매진하며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하고 살던 때가 있었다. 이혼을 하고 5년이 지나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일도 궤도에 올라 나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작한 회사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을 하고 쥐꼬리만 한 월급이었기에 나름으로 쪼개고 쪼개 얼마고 저축도 하며 살고 있었다. 없는 돈에 힘겹게 어학연수까지 하고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쓸 일이 없자 혼자 나름으로 영어가 잊어질까 나 홀로 영어공부를 시작했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엄마와 스페인 여행을 패키지여행을 갔더랬다. 수많은 인파 속에 가볍게 허락된 짧은 자유시간 속 바르셀로나 광장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오랜만에 쓰는 영어로 두근거리는 가슴과 함께.


그는 싱가포르에 사는 사업가로 동그란 얼굴에 다부진 턱을 가졌고 옆머리를 짧게 자른 전형적인 유학생 헤어스타일을 한 한국계 미국인이었다. 정확하게는 한국과 일본의 혼혈이자 미국인이었다. 전체적으로 예리하고 강인해 보이는 인상을 풍기는 그는 시니컬하고 진지했다. 다정하고 유쾌했지만 한편으로는 오만한 구석도 있어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드는 재주도 있었다. 그는 매력적이었다.

메신저 아이디를 주고받은 우리는 처음엔 영어 공부나 할 요량이었다. 그는 나의 영어공부를 도와주고 나는 공부를 하고. 그렇게 만난 이후로 거의 매일 대화를 나눴다. 결국 우리는 사랑에 빠졌으며 모든 게 진심이었다. 밤마다 영상통화를 해가며 물리적 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다. 때문에 매일같이 그를 만나는 기분이었다. 한 번 시작된 전화통화는 몇 시간이고 이어졌고 우리는 거기서 진심을 다해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찾아갔다. 당시 그는 사업문제로 필리핀에 있었는데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없는 돈을 모아 모아서 설렘을 한가득 품고 마닐라로 향했다. 도착한 당일은 그의 일정상 만날 수 없어 성대한 결혼식을 앞둔 새 신부처럼 그를 만날 다음 날만을 기다리며 호텔에서 잠이 들었었다. 다시 만난 그는 생각보다 훨씬 키가 크고 작은 얼굴에 카리스마 있는 인상이었다. 전체적으로 알 수 없는 포스와 귀티가 흘렀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한눈에 그를 알아본 나는 긴장이 풀어져 엉엉 울었다. 주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의 제대로 된 첫 만남이었다. 당시 그의 일정 때문에 우리는 비록 하루에 몇 시간씩 밖에는 함께 있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들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이 깊었고 행복했다.


시간은 흘러갔고 우리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졌다. 그러던 중 코로나 판데믹이 우리를 덮쳤다. 그의 몰락하는 사업과 함께 필리핀은 격리되었고 나도 한국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우리의 관계도 삐그덕 대기 시작했다. 기약 없는 만날 날과 불안한 미래 때문에 거의 매일 다퉜다. 모든 걸 포기하고 나에게 오라고 철없는 소리만 했던 기억이다.


결론이 없는 다툼과 신경전에 당해낼 재간이 있었을까.

결국 우리는 끝이 나고 말았다.

달콤했던 시작과는 달리 끝은 언제나 그렇듯 허망하다.


그와 크게 싸우고 헤어졌던 당시 나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를 지우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그의 연락처들을 삭제해 버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다시 찾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에 나는 여느 장거리 연애가 그렇듯 그와의 직접적인 소통이 매우 중요했고 전화 통화와 메신저에만 몰입했던 나머지 그 흔한 메일 주소 하나 알지 못했다. 돌이켜보니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나의 어리석음과 그를 잃은 상실감에 황폐해져만 갔다. 다시 그를 찾을 길을 알 수 없었다.


결국 나는 그를 잃어버렸다.


몇 년의 시간이 흘렀고 나는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가 없었다. 대게는 짧게 스쳐 지나간 인연들일뿐. 누구 하나 진지하게 만나기 힘들었다. 종종 그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 그가 간절히 그리워졌고 문득문득 그가 어떻게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고 나선 이내 내가 죽기 전에 그를 다시금 볼 수는 없겠지라며 혼자 눈을 질끈 감곤 했다.


코로나 상황이 거의 막바지에 닿았을 때쯤 지인의 지인을 통해 만나게 된 꽤나 진지하게 결혼까지 논했던 사람이 생겼다. 마지막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 사람은 결혼식을 두 달 앞두고 식당에 말도 없이 날 버리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헤어짐의 이유조차 알 수 없었던, 알고 싶지도 않았던 진짜 사기꾼 같았던 놈. 이 와중에 대단히 감사했던 것은 내가 그를 그다지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단지 그가 필요했다.

드라마처럼 모든 불행은 한꺼 번에 몰려온다.

당시에 내가 그 사기꾼을 만나던 중 아버지는 급작스럽게 치유가 불가능한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었는데 한국에 혼자 있던 나는 혼자 아버지의 끝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나는 두려웠다. 때문에 그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끝자락이 다가올 때 즈음 그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그다지 그 헤어짐이 슬프지 않았다.


같은 해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결국 나는 무너져 내렸다. 꾸준히 해왔던 요가도 그만두었고 운동은커녕 하루가 멀다 하고 만취하기 일쑤였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졸업논문을 작성하며 나는 점차 황폐해져 갔고 흐트러진 삶 속에서 부유하며 지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일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몸도 마음도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잃어버렸던 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전 한국이에요.'


'정말요? 그럼 시간 될 때 언제 차 한잔 해요.'


결국 대화가 시작된 그날 우리는 재회했다. 취기에 네가 나를 버린 거라며 나를 원망하던 그를 잊을 수가가 없다. 우리는 헤어진 적이 없었던 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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