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fe 365 #3

Liverpool

by LiSA

하룻밤을 보내고 이튿날 새벽. 술에 취해 곤히 잠든 그를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술독에 빠져 들어와 잠들어 있던 엄마는 내가 날을 새고 들어온 줄도 몰랐다. 그런 엄마가 싫었지만 그날만큼은 취해 들어온 엄마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늦은 나이까지 부모와 함께 사는 사람에게 자유란 허락되지 않는다. 늦으면 늦는 대로 언제 들어오냐는 독촉 전화를 받아야 하고 어디를 가는지 명확하진 않아도 대략적인 설명은 해야 한다. 예전 내 목표는 서른이 되면 집에서 나가 독립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른 나이의 결혼과 이혼 후 얼마 있지 않았던 돈으로는 가게를 차리는 바람에 나이 삼십의 독립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후로도 독립할 기회들이 있었지만 아버지까지 돌아가신 마당에 홀로 엄마를 남겨두고 독립을 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파혼을 한 이후로는 결혼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고서는 날 휘한 것이라며 모으는 돈 하나 없이 흥청망청 돈을 써 재꼈다. 그렇게 나는 빚뿐인 불안정한 마흔이 되어있었다.


그와의 첫 만남이 있던 바로 그다음 날, 그와 나는 함께 영화를 보기로 했다. 1년 반의 장거리 연애와 4년간의 헤어짐 동안 우리가 무언가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던가? 함께 영화를 본다는 것은 보통의 연인들에게는 너무나 흔하고 쉬운 일이었지만 우리에게는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고른 영화는 누아르 장르로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으나 무슨 말을 전하고자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영화의 구성적 문제보다는 내가 그와 함께 있었기에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 더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집중할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며 그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4년 전과 나를 대하는 마음이 같을 수가 있어? 나는 믿을 수가 없어."


그렇다. 나는 그에게 4년 전과 같은 마음이라고 말했다.

그와 다시 연락이 닿고 그를 만나 함께 한 순간들은 나에게는 기적과 같이 느껴졌다. 잃어버렸던 몹시 소중한 것을 되찾은 것 같은 안도감이 찾아왔고 그것과 함께 그를 다시는 잃고 싶지 않다는 강렬한 다짐이 뒤따랐다.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4년간 헤어져있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누군가와는 결혼까지 약속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이 다시 나에게 왔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감정은 어쩌면 광기에 가까웠으리라.


약속했던 우리의 일정은 끝이 났지만 헤어지기 아쉬웠던 우리는 이태원에 위치한 한 스포츠 펍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날은 리버풀 경기가 있던 날이었는데 그는 리버풀의 팬이었기에 축구 경기를 보자는 핑계였달까. 이태원 뒷골목에 위치한 그 자그마한 펍은 밖의 허름함과는 달리 내부에는 꽤나 많은 손님들이 있었다. 자리 잡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빽빽했던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는 바 좌석을 하나 잡았다. 가벼운 주전부리로 바삭하게 튀겨져 나온 치킨 윙과 나초칩을 시켰다. 그리고 씁쓸 달콤한 파울라너를 한 잔씩 시켰다. 한 잔, 두 잔... 여러 잔이 되고 나서야 드디어 경기가 끝나고 새벽이 되었다. 비록 리버풀은 패배하고 말았지만 그래도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어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그러고도 어딘가 아쉬웠던 우리는 근처 유일한 24시간 해장국 집에 들어가 아무 메뉴나 주문했다. 우리 두 사람 중 누구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더 이상 할 얘기도 남아있진 않았지만 그냥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자 우리는 매우 아쉬운 발걸음을 뒤로하고 각자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돌아갔다. 리버풀을 핑계 삼아 돌아가기를 미뤄왔던 40대 우리가 어딘가 유치하기도 하고 조심스럽기도 했다. 나이가 들었어도 노골적이지 못하고 소심했던 우리의 두 번째 데이트였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기약 없었던 그날 밤. 리버풀의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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