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남자는 몇살까지 어린아이일까

대학원 생활 이모저모

by 띠에

먼저, 놀랍게도 브런치 작가가 되어버렸다.

물론 일기와 비슷한, 어쩌면 스스로 대학원 생활을 조금 더 가치있게 만들고자 하는

나의 작은 일탈에 불구한 이런 글 마저도

"작가" 라는 요상한 명칭이 붙게 되면 부담이 되지만,

최대한 부담 없이, 담담하게 글을 작성해볼까 한다.


내 글을 보게 될 누군가가

"아 나도 대학원생 때 이랬지", "와 대학원은 실제로는 이렇구나", "대학원 생각보다 꿀이네?"

어떤 생각을 하든, 내 낙서장을 읽어주는 것 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

필자는 운동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평소에 구기 종목을 즐겨 하진 않는다.

선천적인 척추 분리증을 탈출하고자, 생존을 위해 헬스를 다녔고

좋아하는 맥주, 양주, 막걸리 등등을 마시며 최소한의 건강을 지키고자 몸을 움직일 뿐.


옛 기억을 되짚어 보면, 대부분의 남자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최소한 한번이라도

축구 혹은 농구, 그도 아니면 탁구, 배드민턴 등을 즐긴 바 있을 것이다.


나 또한 학생때는 잘하지도 못하는 축구가 그렇게 재밌었고,

작든 크든, 공만 있으면 친구들과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며 스포츠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현생에 치이며 스포츠라는 단어가 잊혀지기 시작했다.

내 글을 보는 당신이 20대 후반이라면, 평소에 구기 종목을 즐겨 할 확률은 5% 이내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남자들을 움직일 수 있는 마법의 단어가 존재한다.

"쫄?"


평소에 매우 유하고 성격이 순한 친구도, 어떤 장난도 웃어 넘기는 친구들도

게임, 혹은 운동 이야기가 나왔을 때

"에이 너 개못하잖아 ㅋㅋ"

라는 이야기를 듣고 웃으며 넘기는 친구들은 단 한명도 없었다.


대학원생 또한, 어쩔 수 없는 남자들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시시콜콜한 이유를 핑계로 술자리를 가지며 웃고 떠들고

기분좋게 취한 상태로 2차를 마치고 나온 우리들의 눈 앞에는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던 J 탁구장이 유독 반짝였다.


"하 탁구 한번 치면 내가 다 이기는데"

우리 연구실의 최고참이자, 정신적 지주인 S 선배의 한마디.


평소같으면 "형이 최고시죠", "에이 형을 어떻게 이겨요" 라는 말이 나왔을 법 하지만,

이미 알코올에 지배되어 충분히 들뜬 나는, 이성적 판단에 앞서 "형 한판 ㄱ?" 를 내뱉고 말았다.

문제는 나만 내심 들뜨지 않았다는 사실.

5:5 풋살을 해도 충분한 인원이 탁구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겉과는 다르게 분홍분홍한 시설.
20대 후반 아저씨들의 땀냄새로 가득찬 더러운 공간이 되어버릴 줄은 몰랐을 것이다.


직경 5cm도 채 되지 않는 작은 공이 뭐 그렇게 좋다고, 1시간 가량 서로 상대를 바꿔가며 랠리를 이어갔고, 탁구장을 나설 즈음에는 모두 얼굴이 벌개진 채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기서 끝났다면 채 한시간도 되지 않는 일탈로 여겨졌겠지만,
흥에 겨운 우리는 (특히 연구실에서 짬을 먹을대로 먹은 나와 S 선배, H후배)

후배들에게 다음에 한번 풋살과 족구를 하자는, 한국인으로 따지면 "언제 밥 한번 먹자" 와 같은 말을 남기고

다음날을 위해 모두 해산하였다.


나는 몰랐다. 내 후배들이 싹싹하고, 기합이 가득찬 줄은 알았어도

엠티가자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웃으며 넘기던 녀석들이 이렇게 진심일줄은....


항상 일도 잘하지만, 이번은 유독 빨랐다


그렇게 이번주 화요일, 풋살 일정이 잡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주일 중 화요일만 비 예보가 있었다.


애매한 상황에 모두 말로는 "다음에 하죠~~" 라고 넘겼지만,

H 후배는 몸이 근질근질한게, 뒷자리인 내 피부에 와닿을 찰나, 단톡방에 한마디가 올라온다.

ㅎㅈ.jpg 평소에는 단톡방에서 별 말도 없는 놈이다


이미 비는 그쳤고, 사실 필자 또한 가방에 운동복을 챙겨왔으며....

가장 먼저 풋살장을 예약한 후배는 시키지도 않은 축구공을 사왔고,
나머지 후배 두세명도 풋살화를 꺼내기 시작했다.

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최고참 S 선배를 필두로 H 후배를 비롯해 8명이 순식간에 모였고,

풋살장으로 향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비온 직후 날씨는 절대 따뜻하지 않다.

평균 체감 온도는 5도 아래였지만, 다들 패딩을 내팽겨치고, 몇명은 반팔을 입고 공 찰 준비를 하니

이렇게 행복해보일 수 없었다.


랩미팅, 실험실에서 피곤에 쩔어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아이처럼 공 하나에 꺄르륵 대는 우리는

20대 후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우스웠던 것 같다.


음료수 내기 족구에 이어 풋살에 임한 우리는

평소 직접 흡연 및 간접 흡연의 폐혜를 온 호흡기관으로 느꼈지만,

잘하면 어떠하고 못하면 어떠하리.


그저 공 하나에 선,후배를 잊고,
당장 저녁의 스터디, 내일의 실험도 모두 잊은채


어린 시절 부모님이 부르기 전까지 얼굴에 모래칠을 하고

놀이터에서 그네 하나에, 미끄럼틀 한번에 세상을 다 가진것처럼

체육 시간에 자유시간과 함께 공 하나를 던저준 것 마냥

세상 만사 행복했던 것 같다.


풋살.jpg 사진에서는 청명한 날씨지만, 너무 추워서 결국 패딩을 입었다

행복했던 시간이 끝나고, H 후배는 맥주 한잔을 간절히 원했지만

20 보단 30에 가까운 우리들은 후일을 기약하며 다들 집으로 돌아갔고

다음날 모두 본인들이 얼마나 숙면을 취했는지, 오랜만에 느끼는 근육통이 어떤지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대학원은 이런 곳 같다.

평소에는 죽을 것 같이 피곤해 하는 후배도,

졸업 걱정에 한숨과 담배가 눈에 띄게 늘어가는 선배도

다같이 걱정 없이, 위아래 없이 잠깐이나마 찢고 까불면서 놀 수 있는 곳.


당연히 대학원의 밝은 면을 이야기 하는 중이기에 그럴 수도 있고

평소에 인복이 몹시 좋은 나이기에, 사람 좋은 선후배를 둔 덕일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회사를 간다면 이렇게 직장 동료들과 번개로 아무생각 없이 옴팡지게 놀 수 있을까?

직장 생활에서도 누군가는 이런 삶을 즐길 수 있겠지만

나는 기나긴 대학원 과정에서, 이런 찰나의 순간들이 원동력이 되어 한 주, 한 달을 버티게 해주는 것 같다.


글을 쓰며 느끼지만 나는 참 좋은 사람들 덕에 행복한 대학원 생활을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런 일기에 속아 쉽게 대학원을 오지는 말길 바란다.


정말로.


당신은 더욱 행복할 수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1] 대학원에도 봄은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