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생활 이모저모
온다. 봄은 언젠가 오기 마련이다
그 곳이 대학원이든, 다른 유토피아 혹은 디스토피아든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면 언젠가 봄은 온다.
근래 중 가장 따뜻했던 오늘 오전, 하늘은 푸르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온기는
"곧 봄이 오겠구나"를 전신의 세포로 느끼게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은 2월 중 가장 바쁜 하루가 예정되어 있다.
혹시 주변에 대학원생 친구들이 있는가? 그 친구들이 약속을 전날, 당일, 혹은 직전에 깨더라도
한 번 쯤은 이유를 물어보는 여유를 가진다면 당신은 참된 지성인이다.
자율 출퇴근을 주장하는 대학원생일지라도, 그의 하루는 교수님의 일언반구에 의해 저당 잡힐 수 있다.
필자는 오늘이 그러하였으며, 나의 하루는 두 명에게 저당잡혀 있었다.
당장 금일 새벽이 오기 전에, 1) 졸업한 J 선배와 같이 작성하는 논문 리비전 수정본을 제출해야 했으며,
2) 교수님께 과제 제안서 초안을 보고드릴 수 있어야만 했다.
사람의 하루는 24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다지만, 어제도 새벽퇴근을 한 나에게 물리적으로 주어진 시간은
단 12시간.
나의 하루는 틀림없이 문서 작업으로 가득찰 예정이었다.
일반적인 소설이라면 "틀림없이 ~ 예정이었다" 라는 문장 뒤에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동반되었겠지만,
오늘 나의 하루는 정확히 출근 당시에 예상한 대로, 문서 작업으로 가득찬 하루였다.
교수님과 메일을 통해 과제 제안서의 가닥을 잡고, 나의 우산(항상 내 위에서 고생하는 선배이기에..)이자 존경하는 M 선배와 (현재 과제의 실질 인력은 단 두명이다..) 제안서를 작성하는 한편, J 선배와 진행하는 리비전 ver 3 작성까지.....
1달의 짧은 인턴 생활을 제외하고는 회사를 다녀본 경험이 없지만, 회사에서 평생 이러한 문서 작업만을 요구한다면 나는 도저히 20년 이상 근무할 자신이 없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대학원생이 아니라면 알기 어려운, 대학원만의 짜릿한 순간이 있다.
바로 친한 박사들간 연구 노가리 시간이다.
시작은 과제의 "Self-align" 구조의 필요성이었다.
관심 없는 사람들은 잠시 한 문단을 건너 뛰어도 되지만, 요약하자면 Si 반도체의 self-align은 마스크 갯수를 줄이기 위함인가? 2D 반도체의 self-align과 gate-first 구조는 동일한 워딩인가? 디스플레이의 self-align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이 오가기 시작했고,
내가 가장 친하다고 말할 수 있는 M 선배와 H 후배, 그리고 나의 논쟁 아닌 논쟁이 시작되었다.
"Self-align은 마스크 갯수를 줄임으로써 소자의 cost를 감소시키기 위함이다"
"아니다. RC delay를 최소하 하는 것이 가장 우선적 목표이다"
"그렇다면 디스플레이에서는 왜 self-align이 필수인가"
"이 논문을 봐라. RC delay를 가장 중요하게 언급한다"
"...~~~~..."
"~~~~~~~~~~~~~"
여러분들도 알겠지만, 바보들은 얼굴만 서로 바라보아도 흥겹고, 비슷한 지식을 보유한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주장이 확고한 이상, 완벽한 답을 찾기 어렵다.
이 논쟁은 결국 연구실 최고참 S 선배의 의견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S 선배까지 동참한 연구 이야기, H 후배에게 주고 싶은 새로운 주제, S 선배의 프로포졸 등을 신나게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치킨을 시키고,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다시 과제 제안서를 작성하는 흐름이 되었다.
제안서 및 리비전 수정본은 어느정도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고 (다만 토/일/대체공휴일 출근은 기정 사실)
필자는 자취방에 도착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확보하였지만,
대학원의 꽃은 오늘 저녁 시간과 같은 상황이 아닌가 싶다.
X라는 주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인재들과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허점을 짚어가며 논리를 뒤엎고, 새로운 주장을 제시하며 해답을 찾아가는....
스스로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이런 상황을 행복해 하는 나는 대학원에 오지 않았으면 평생을 후회했을 것 같다.
결국 금일 아침 9시 출근, 새벽 2시 퇴근, 토/일/공휴일 출근이 예정되어 있지만 ㅠ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과, 나를 존중해주고 의지해주는 후배와, 6년 가량의 시간을 바쳐 연구하는 주제에 대한 토론을 가질 수 있는 이런 진귀한 시간들이 나를 행복한 대학원생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 물론, 필자는 박사 과정을 이미 선택한 이상 낙장 불입. 후회는 사치이기에, 긍정적인 사고회로를 보유하고 있을 뿐, 혹시라도 본문을 읽게 될 학계의 후배님께서는 최대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길 바란다.
대학원은 언제나 바쁘고, 우울한 상황의 연속이고, 본인 혹은 동료의 자존감이 하락하는 모습을 보며
"이곳은 언제나 겨울이구나" 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곳만의 행복이 존재하고, 여기에서만 느낄 수 있는 봄의 향기가 존재한다.
나를 존중해주는 선배, 내가 존경하는 후배와 함께 내가 몰두하는 주제로 토론을 하는 순간만큼은
나의 계절에 봄이 도래한 것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