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가진 지 20주 쯤 되니 제법 임산부 태가 났다. 임신 후 출산까지 걸리는 시간이 대략 40주니 절반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정기검진 차 산부인과를 방문했을 때 초음파 기계로 태아를 살피던 의사는 넌지시 아기가 엄마를 닮았다고 말했고 나는 그 의미를 대번에 알아챘다. 병원을 나서는데 왠지 모를 서운함이 밀려왔다.
지금은 대다수 산모가 아이를 가진 40주 동안 부지런히 산부인과를 다니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이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많은 산모들이 불러오는 배를 쓰다듬으며 '때가 되면 어련히 나오겠거니' 하고 기다릴 뿐이었다. 산골마을 새댁이었던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런 엄마의 기다림을 40주 동안 넉넉히 채우고 나왔다.
나를 받은 것은 할머니였다. 엄마는 저녁부터 진통을 시작해 자정을 한참 넘긴 새벽녘에야 해산하셨다. 밤새 산고를 치른 엄마에게나 그런 며느리를 뒷바라지 하신 할머니에게나 참 고된 밤이었을 것이다.
내가 첫 울음을 터뜨리자 엄마는 지친 목소리로 "뭐예요, 어머니?" 하고 물으셨단다. 할머니의 대답은 밤새 기다리신 정성이 믿어지지 않을만큼 심드렁한 어투였다.
“맨날 낳던 그거다!”
사실 나를 ‘맨날 낳던 그거’라고 칭하신 할머니의 표현에는 다소 억지가 있다. 내 위로 자매라고는 두 살 터울의 언니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첫 손주로 딸을 본 아쉬움에 애타게 아들손주를 기다리셨던 할머니는 둘째마저도 딸이라는 게 어지간히 서운하셨던 모양이다.
다행히 엄마는 셋째 손주로 고대하던 아들을 할머니께 안겨드렸다. 그런데도 이따금씩 나를 보며 ‘네가 아들이었으면 좋았을텐데’하고 아쉬워하셨던 걸 보면 그날 밤 ‘맨날 낳던 그거'라는 할머니의 볼멘소리는
막 해산한 엄마에게도 몹시 서운한 기억이었나보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내가 아들이 아닌 것이 늘 미안했다.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나 역시 태중의 아이가 아들이기를 바랐다. 어느 성별을 선호해서가 아니라 딸일 경우 혹여 어른들께 나와 같은 실망을 안겨드릴까봐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가 딸이라고 말씀드리자 시댁 어르신들은 “괜찮다, 하나 더 낳으면 되지.”라는 반응이셨다. ‘뱃속의 딸’인지 ‘괜찮다고 말하는 시댁’인지 대상을 특정하지 못할 서운함은 괜히 더 깊어졌다.
아이는 42주가 넘도록 뱃속에서 한껏 여유를 부렸다. 촉진제를 맞고서야 시작된 진통이 하룻밤을 꼬박 넘겼는데도 나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결국 제왕절개수술을 하기로 하고 수술실로 이동했다. 차가운 금속의 수술대 위에 누워 산통을 참아내느라 끙끙 대고 있는데 눈앞의 밝은 전등 사이로 익숙한 장면이 떠올랐다. 작은 단칸방 아랫목에 지쳐 몸을 늘어뜨린 엄마와 그 발치에서 등을 돌린 채 앉아있는 할머니였다. 간혹 꿈에도 나왔던 그 장면은 잠깐 잦아든 산통에 선명해지는가 싶더니 마취와 함께 이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소리가 귓가에서 한참이나 반복되는 것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남편이 내 옆에 서서 우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날카롭지만 부드럽고 작지만 우렁찬 소리가 일정한 속도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묵직한 고통이 온몸을 짓누르는 통에 꿈쩍도 할 수 없던 나는 가만히 누워 아이의 울음을 들었다. 반복되는 울음은 어느덧 운율이 되어 귓가로 파고들었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아이를 안을 수 있었다. 아이는 달싹이는 가슴으로 작은 울음을 끊임없이 밀어내고 있었다. 자그마한 몸에서 따뜻한 울림이 느껴지자 눈물이 핑 돌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신비로웠다. 한때나마 이 존재가 아들인지, 딸인지 연연했다는 사실을 영원히 숨기고 싶었다.
내 품에 안겨 한참이나 꼬물거리는 딸에게서 나는 수술 전 흩어졌던 장면 가운데 미처 발견 못했던 나를 떠올렸다.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날 새벽, 가냘프게 반복되는 나의 울음이 엄마의 서운함을 어떻게 위로했는지, 하얀 강보에 쌓인 나의 서툰 몸짓이 할머니의 냉대를 어떻게 녹였는지에 대한.
설령 그러지 못했다하더라도 더는 상관없었다. '맨날 낳던 그거'라서 지금 이 아이의 엄마가 되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모든 게,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