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엄마의 생신상
생일이다. 옛날 사람답게 음력으로 챙겨 먹는 생일이다. 사십 년 넘게 챙기는 생일이니 심상하다. 내 생일 보다 2주 앞선 엄마의 생신을 생각해 본다. 그것도 30년 전의 엄마 생신 말이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고 언니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단칸방에서 엄마, 언니, 나 셋이 살았다. 중2인 언니는 호되게 사춘기를 앓아댔고, 나는 나대로 국민학교 졸업을 반 년 앞두고 전학 온 터라 이도저도 아닌 마음으로 살았던 듯하다.
엄마의 생신에 사춘기 언니는 생일상을 차리자고 했다. 이제 막 추위기 시작되는 철이었을 것이다. 아침상을 차리자고 했고 언니와 장도 같이 보고, 선물도 사러 갔다. 아, 물론 같이 간 거지 나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태어난 직후부터 현재까지 그녀들에게 영원한 막내일 뿐이니까 말이다.
언니가 맞춰놓은 알람시계에 맞춰 같이 깼다. 언니는 나에게 시키는 거만 하라고 하고 칼은 만지지도 못 하게 했다. 그럴 거면 왜 깨워. 나는 그때부터 늘 쉐프가 되지 못하는 만년 주방 보조이다.
부엌은 살짝 추웠다. 입김이 났던 것도 같은데. 언니가 전 날 저녁에 불려 놓은 미역을 달달 볶았다. 아는 언니가 알려줬다는 미역국 끓이는 법이 적힌 공책을 보고 차근차근 미역국을 끓였다. 예전의 레시피란 그렇게 손에서 손으로, 종이에서 종이로 이어졌던 걸까. 간장이 조선간장이 있고 진간장이 있다는데부터 언니의 고뇌는 시작됐고, 언니는 미역국을 끓이면서 맛만 수십 번을 봤다. 이미 식사 전에 국 한 사발은 먹었으려나. 언니가 식칼을 세워 칼 밑의 동그란 부분으로 마늘을 콩콩 찧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것. 꼬마돈까스. 그게 뭐 대단한 잔치음식이라고 그걸 메뉴로 택한 걸까. 그러나 사실은 그 대단치도 않은 음식을 도시락에 싸간적이 한 번도 없으니 그때의 우리에게는 대단한 음식이었으려나. 프라이팬에 기름을 붓고 꼬마돈까스를 튀겼다. 물론 언니가. 지금도 어쩌다 꼬마돈까스를 보면 기분이 조금 좋아진다.
부엌에서는 어쨌든 미역국과 어쨌든 돈까스인 음식들의 냄새가 풍겼다. 찬 부엌에 그런 음식 냄새들이 풍기고, 날이 밝아지면서 조금의 온기가 돌았던가.
밥상에 밥 세 그릇, 계란말이, 케첩이 뿌려진 꼬마돈까스, 미역국이 차려졌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언니가 맛 봐라 할 때 간을 보는 것, 수저와 젓가락, 컵 하나-그때는 컵 하나로 다 함께 물을 마셨다!-를 놓는 일 정도였을까.
그럼 그때 엄마는 뭘 하고 있었을까. 부스럭거리는 딸들의 기척을 못 느끼고 주무실 수는 없었다. 왜? 부엌과 연결된 단칸방이었으니까. 화장실도 밖에 있었던 집이었다. 부엌과 방은 방음이 되지 않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딸들이 알람시계를 끄며 일어날 때부터 엄마는 일어나 있었다. 언니가 일어나며 엄마 보고 ‘엄마, 절대 나오면 안돼!’ 엄포를 놓고, 나를 깨워 부엌으로 간 걸 기억한다.
엄마는 장녀의 요청대로 절대 부엌으로 나와 간섭하지 않았다. 조선간장이 뭐고 진간장이 뭐지?의 순간에 나와보지 않았고, 뭔가 나를 혼내는 언니의 목소리에도 자신은 그 자리에 없는 척 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부엌 너머 방에서 불도 켜지 않고 누워 딸들의 기척을 듣던 엄마의 마음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마음이 엄마의 고단했던 어떤 날을 맨들맨들 어루만져 주었길 바래보는 것이다.
언니가 밥상을 들고 방으로 갔다. 동네 제과점에서 산 케이크를 호호 불었고, 선물 전달식도 했다. 아, 그 선물이 뭔지도 기억한다. 비너스에서 산 브래지어였는데, 엄마에게는 시장에서 사지 않고 속옷 매장에서 산 첫번째 속옷이었으리라.
그리고 그때 엄마의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네 살 어린 나이였는데, 엄마는 어쩜 그렇게 엄마 같았을까.
늘 앵돌아진 표정의 사춘기 딸과 늘 조금 멍하고 맹한 막내가 차린 밥상에서 엄마가 행복했기를. 그리고 삼십 년이 지난 지금 엄마는 여전히 팔팔하시다는 것이 눈물겹게 다행이며, 여전히 장녀는 앵돌아져 있고, 막내는 여전히 멍하고 맹하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