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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매일 밤, 11시 50분이 되면 내 머리맡에는 항상 조그마한 라디오 플레이어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느덧 고정이 되어버린, 89.1 채널에 맞추면,
익숙한 유희열의 목소리가 노이즈와 함께 흘러나왔다.
그리고 첫 번째 사연을 다 듣기 전에 나는 항상 잠에 들었다. 라디오가 내게 주었던 건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연들이 아닌, 편안하고 잔잔한 잠자리였다.
초등학생이 뭘 안다고 라디오를 듣냐 할 수도 있겠지만, 밤이 되면 고요해지는 세상 속에, 라디오의 자글거리는 노이즈가 얕게 깔리는 순간, 마치 다른 세상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그 기분이 좋았다. 그런 기분 좋은 노이즈 세상 속에서 유영했던 밤들이 내 유년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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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유튜브나 넷플릭스처럼 세상의 큰 틀은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공동체 속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 하나하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매개채가 없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후자의 영역은 라디오만의 고유한 영역이었다. 뉴스나 신문이 다룰 수 없는 아주 좁디좁은 이야기들을 엿들을 수 있었고, 그것이 하나의 이슈가 되어 반대로 넓은 범위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음질에 열화가 심하고, 비 오는 날에는 뚝뚝 끊기는 일도 많았지만, 그 당시에는 그런 게 중요하지 않았다. 정확한 청취가 목적이 아닌, 세상의 이런저런 그림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라디오의 역할은 끝이었으니까.
심지어는 그 열화 노이즈가 좋아서 들었던 적도 있었다. 요즘의 어린 친구들에게 노이즈는 ‘방해되는 무언가’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라디오를 들었던 세대에게 노이즈는 ‘왠지 모를 포근함을 주는 무언가‘ 의 의미를 갖는 것도, 라디오의 영향이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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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이런 생각도 든다.
”약 15년 전에 라디오를 통해 듣던 사연들의 주인공들은, 지금도 그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에, 나는 단연코 ‘아니다’ 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시에는 라디오의 주체자가 그 사연들에 일일이 답을 해주고,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지만, 정작 그 말들이 그들의 고민거리를 당장에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충분히 흐른 지금, 그들의 문제는 잊혀가는 추억 중 하나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라디오는 나에게 이런 의미가 있다.
‘내 하루하루가 노이즈가 잔뜩 낀 사연들 같이 느껴질 때, 그 노이즈들도 결국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옅어지다 결국 가벼운 이야깃거리 혹은 추억이 될 것’ 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몇 번의 이사를 거친 지금,
라디오 플레이어는 항상 간직하며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