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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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년 전, 초록색과 붉은색이 대비되어 마치 평화로운 삶과 비극적인 죽음을 암시하는 듯한 표지가 눈에 띄어 계획형 인간답지 못하게 충동적으로 사두었던 책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라는 작가는 익히 들어 보았지만,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이 책을 통해 처음으로 작가의 스타일을 접해보았지만, 이 600페이지 남짓의 책 한 권은 '무라카미 하루키' 라는 작가의 세상을 들여다보기에 충분했다.
등장인물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한 명 한 명 뚜렷한 입체감을 지니고 있었고, 어느 하나 미운 인물이 없었다.
세상의 공식과는 반대로 역행하며 답답한 모습을 보이지만, 누구보다 세심해 보였던 특공대 룸메이트,
이성을 희락거리로 여기지만 나름의 친절함도 갖춘 나가사와 선배,
조금은 안쓰러울 정도로 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걸어버린 현숙한 여인 하쓰미,
젊을 때의 상처를 이겨내고 이제는 남들의 상처를 쓰다듬어주고 있는 레이코 아주머니,
이유를 알 수 없는 끝을 선택하지만, 주인공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기즈키,
결핍이라는 감정이 잘못된 부분으로 발현되어 나오는 것 치고는 단단한 면이 많았던 미도리,
사랑을 받는 것에 인색하여 과거의 상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끝내 숲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나오코,
사랑이라는 감정에 있어서 누구보다 우유부단했던 주인공 와타나베까지,
모두가 하나씩 '결핍'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결핍에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었고, 독자로 하여금 그 결핍을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도록 만들었다.
이야기에 악역은 없었다. 그저 누군가에게는 악한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선한 사람이 되어있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가장 닮아있는 인간관계를 글로 담아낸 모습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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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책을 다 읽고 덮는 순간까지도, 어째서 제목이 '노르웨이의 숲'인지 몰랐다. 정확히는, 어째서 ‘숲'이라는 소재를 사용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끝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해답을 찾고자 책을 다시 펼쳐 처음부터 빠른 속도로 읽다가, 작가의 의도가 느껴지는 문장을 찾아냈다.
그 해답은 다름 아닌, 책의 극초반부에 이미 30대가 되어버린 와나타베가 과거를 회상하며 내뱉는 독백 한마디에 있었다.
나오코는 나를 사랑하지조차 않았던 것이다.
600페이지에 다다르는 길고 긴 이야기를 읽으며, 아마 모든 독자들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와타나베는 나오코를 사랑하는구나" 라고.
비록 미도리와 나오코 사이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여러 번 보이기는 하지만, 나오코를 사랑했다는 사실에는 어떤 이도 이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오코는 와타나베를 정말 사랑했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여진 문체 특성상, 독자들은 와타나베가 나오코를 어떠한 형태로 사랑하고 있었는지는 뚜렷하게 그릴 수 있다. 그러나, 나오코의 마음은 그저 지극히 와타나베의 입장에서 간접적으로만 보여질 뿐, 그녀의 진짜 속마음은 독자들이 알 방법이 없다.
돌이켜보면, 나오코가 와타나베를 사랑해 보고자 노력했다는 것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그에게 편지도 수차례 쓰고, 누구보다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끝내 선택한 종착지는 '죽음' 이었다. 와타나베를 사랑하는 감정보다, 상실로 인한 아픔과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 컸던 것이다. 물론 나오코의 마음은 그녀 스스로만이 알고 있겠지만, 와타나베의 마음속에서 나오코는 그저 자신을 저버리고 도망가버린 과거의 이성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그것이 작가가 내놓은 결론이었다.
작가는 책의 초반부에 이미 나오코는 와타나베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명확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우리는 책이 진행됨에 따라 두 사람에게 몰입한 나머지 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다. 결말은 '이루어지지 않음' 으로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어느새 망각한 채, 책을 덮은 우리 마음에는 여전히 찝찝한 마음이 남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의도한 '상실감'이라는 이런 느낌을 말하는 게 아닐까. 결말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미친 척 몸부림치며 방황하다가, 끝끝내 결말을 맞이하고서는 서서히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숲'이라는 상징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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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숲'이라는 비틀스의 노래는, 와타나베가 자신의 상실되어 버린 청춘을 회상하게 만드는 효시로서 작용했다. 평범한 노래제목일지 모르겠으나, 와타나베에게는 '상실'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곡으로 작용한다.
더 나아가 '숲'은, 나오코에게 있어서는 입원해 있던 산속 요양원을 뜻하기도 하지만, 와타나베에게 있어서는 혼돈의 연속이었던 청춘을 상징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숲은, 한번 들어가서 길을 잃으면, 마치 미로에 갇힌 듯 방황하게 되지 않나.
나오코와 와타나베 모두, 어떠한 이유로 감정의 혼돈을 겪으며, '감정의 미로'를 헤매는 듯한 청춘을 보낸다.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상실되어 버린 청춘을 '숲'이라는 요소에 빗대어 표현한 듯하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관계 가운데, 손을 뻗으면 언제든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랑을 쫓다, 결국 상실을 맞이하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마저도 서서히 잊혀지는, '청춘'과 '상실'을 단 7명의 등장인물만으로 그려냈고, '숲'이라는 절묘한 비유대상에 빗대어 표현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비유는, 은유 중에서도 은유이다.
책을 덮고 난 후에 몇 번이고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돌이켜보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진짜 의도들이 숨겨져 있다.
‘노르웨이의 숲’은,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미성숙함에서 기인하는 상실과 방황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은유법 자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