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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저녁에 만나기로 했다. 하루 종일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비는 그저 우리에게 낭만을 주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넌지시 "우산 안 들고 갈게요"라는 카톡을 보냈다. 애초에 의도를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부끄러울 정도로 의도를 바로 파악한 그 사람은 "가져오지 마요. 오는 길에 버리고 와요"라고 받아쳤다. 양산이라고 가져온 그 사람의 우산은 참 민망할 정도로 작았지만, 작디작은 우산 하나를 쥐고 그 사람의 키를 맞추며 어깨를 부딪히지 않으려 보폭을 유지하며 걸었다. 팔을 애써 내리느라, 거리를 유지하느라 온몸이 불편했지만, 그 순간이 그저 좋았다.
그렇게 10분이 지났을까, 내 왼쪽 어깨가 흠뻑 젖고서야 우리는 비를 피하려 벤치에 앉았다. 그제야 우리는 비를 구경할 여유가 생겼다. 한적한 아파트 단지 중앙에 있는 놀이터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더 선명히 들을 수 있도록 만들었고, 이상하게 밝았던 가로등의 불빛은 그 사람의 눈을 더 깊게 쳐다보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순간에 우리는 무슨 대화를 했는지, 다시 우산을 들었을 때는 이미 내 눈이 잔뜩 부어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이제 어깨를 꼭 붙인 채 걸었다. 우산 하나로 마음을 표현하려 서투른 노력을 해봤지만, 결국 우리를 묶어놓는 건 우산이 아니라 비였다. 장마가 이미 지나간, 7월 한복판의 어느 하루가, 어쩌면 우리에게는 어깨를 내어주기 시작한 하나의 기념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내 달력에는 아무도 모르는 기념일이 가득하다.
이런 기념일들을 어떻게 챙길까? 사실 대단한 건 없다. 해마다 비가 오면 일부러 놀이터를 찾아가 본다던가, 의자가 젖어 있으면 괜히 웃어보기도 하고, 그 당시 들었던 음악을 같이 듣기도 한다. 다른 커플들은 꽃다발로 기념일을 준비하지만, 우리는 작은 우산 하나만 챙기면 된다. 남들에게 설명할 필요 없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되었다.
누군가에겐 아무 의미 없는 날이지만, 우리에겐 비 오는 놀이터가 달력 한가운데를 장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