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by 어떤 바람


창밖으로 한순간 우두두둑 엄청난 비가 쏟아진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치 은색 빗줄기의 향연이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햇빛이 강렬했고 나는 집 안으로 들어오는 볕을 차단하기 위해 갈색 레이스 커튼을 치고 선풍기를 켰다. 그런데 어느 찰나 슬그머니 먹장구름이 한가득 몰려왔나 보다. 덥지만 아직 장마는 오지 않았고, 열대야 한여름도 시작되기 전이니 스콜도 아니고, 여름 초입의 기분 좋은 소나기다. 아, 좋다!

나는 이슬비, 가랑비보다 굵고 세찬 소나기를 좋아한다. 얼굴빛을 찬연히 달리하는 저 뻔뻔함, 세차고 강한 기세, 멈추고 나서 다시 선연하게 돌변하는 깔끔한 태도도 멋지지만 한순간 쏟아지는 빗줄기가 되기까지 얼마나 옹골차게 압력과 밀도를 참아냈을까 싶어 대견하기도 하고 온몸을 다해 한순간 쏟아져 하강하는 빗줄기에 내 마음도 한없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 창밖 비풍경에 눈을 뗄 수 없다. 우산 없이 저 비를 온몸으로 맞아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순간, 노래 한 곡과 시 한 편이 떠오른다.


중고등학교 시절, 나는 내내 교내 방송반이었다. 아침 조회 때마다 마이크와 앰프들을 설치 조정하고, 간간히 안내방송을 하고, 점심시간 낮방송을 위한 멘트를 쓰고 음반을 고르고 때로는 아나운서로 방송을 했다.

여중 여고생 시절의 낭만은 단연코 비 내리는 날과 첫눈 오는 날에 펼쳐진다. 그중 비 내리는 날의 낮방송은 그냥 모든 학우들의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국내외 수많은 비에 대한 명곡들을 선정하여 감성적인 멘트와 함께 방송을 하면 교실에서는 환호성과 함께 난리가 났다. 그 많은 곡들 중에서 나는 학창 시절의 순수함과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대한 불안한 기시감을 시니컬하면서도 소년미 가득하게 담아냈던 조규찬의 ‘무지개’가 이런 날이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소나기를 함께 흠뻑 맞은 친구들과 무지개를 쫓아 따라간다는 그 꿈같은 가사는 이제 한없이 그리운 나이가 되었지만 노래는 여전히 들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다.


대학생이 되고는 더 큰 세상을 향한 많은 경험들의 변곡점을 만나며 지냈다. 그 변곡의 대표적인 장소는 캠퍼스. 캠퍼스 안 구석구석에 깃든 추억은 간간히 바닷가 모래사장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며 아련한 기억들을 소환해 낸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교양과목 철학 수업 대강의실 오른편 창가 3번째 자리는 거의 나의 지정 좌석이었는데 존경하는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도 딴생각하기 너무 좋은 자리였다. 창밖으로 아카시아 나무들이 우거져 있고 나뭇잎 사이로 파란 하늘과 농염한 능선을 자랑하는 나지막한 동산이 펼쳐졌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너무 완벽한 낭만의 자리였지 싶다. 철학 강의를 들으며 딴생각을 하며 청춘을 지나며 나는 우주 만상의 점같이 작고 작은 존재라는 것을 온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또, 인문관과 대학원 건물 사이에 바위산 둔덕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을 '폭풍의 언덕'이라 작명하고는 숱하게 수업을 빼먹고 때론 홀로 때론 동기, 선배들과 무수한 고민을 나누고 하릴없는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내가 이름 지은 '폭풍의 언덕'은 히드클리프처럼 격정적인 바람이 부는 곳이어서 언제나 마음을 잘 지켜야만 했고, 나중엔 우리 과의 비밀스럽지만 전설적인 장소가 되었다.

존경하는 스승님, 다정했던 친구, 선후배, 동기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부서지기를 무한 반복하다 상처와 슬픔을 껴안고 어느 순간 말수가 줄고 무채색 표정이 내 것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피고 지기를 반복했던 그 시절,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위로가 되었던 시 한 편이 있다.



살았을 때의 어떤 말보다

아름다웠던 한 마디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 말이 잎을 노랗게 물들였다.


지나가는 소나기가 잎을 스쳤을 뿐인데

때로는 여름에도 낙엽이 진다.

온통 물든 것들은 어디로 가나.

사라짐으로 하여

남겨진 말들은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말이 아니어도, 잦아지는 숨소리,

일그러진 표정과 차마 감지 못한 두 눈까지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그 순간

삶을 꿰매는 마지막 한 땀처럼

낙엽이 진다.


낙엽이 내 젖은 신발창에 따라와

문턱을 넘는다, 아직은 여름인데.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나희덕



내 기억의 편린 속에 있는 것들은 간혹 이런 날 펼쳐진다. 아주 짧고 강렬한 그 무엇이 스치는 순간. 그것으로 내 삶의 방향과 태도가 바뀌고 인연이 닿았다 끊어지고 내가 움츠러들었다 커지고를 수없이 반복했다. 결국 나에게 한없이 크고 짙게 드리워진 것들을 반추해 보면 그 속에 내가 있었다. 아니 내 안에 그것들이 존재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같이 내 삶 안팎으로 이어져 흐르고 있달까.

이제는 그 시절처럼 마음이 많이 소란스럽거나 불안하지 않다. 그 숱한 생각의 뒤안길에서 일정 거리를 둘 수 있는 나이가 되기도 했고, 많은 것을 이해하고 품을 수도 견딜 수도 있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보내는 무수한 모스부호 저편에 또 다른 차원의 세상이 열릴 것만 같은 마음으로 살게도 되었다.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의미다.


그사이 소낙비가 그쳤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집을 나선다.

걷자걷자걷자걷자.

비릿한 비내음 맡으며 오늘은 석촌호수 한 바퀴,

아무 생각 없이 걸어보자.



(5/29/2025, 水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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