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도 없이 주말 아침 여섯 시부터 눈이 떠져 몸을 일으켰다. 아내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 이미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무얼 하는지 모를 소리가 요란하다. 이 년 전 정년퇴직 후 이 시간에 침대를 벗어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다시 눕지 않고 아내의 곁으로 갔다. 아내는 이미 두 시간은 전에 일어난 듯 식탁에 반찬통을 그득 쌓아두고도 무언가 만들고 있다. 가만 보니 채소를 듬뿍 넣어 알록달록한 계란말이다. 나는 옆에서 조용히 싱크대에 쌓인 냄비 몇 개를 씻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내는 배시시 웃었다. 나도 마주 웃었다.
무슨 계란말이까지 해, 그건 슬아가 알아서 해먹을 수 있을 텐데.
어휴, 당신은 모르는 소리 말아. 임신한 몸으로 서서 계란말이 부치는 게 좀 일인 줄 알아?냄새는 또 어떻구. 나는 슬아 가졌을 때 밥솥이 그렇게 미웠어. 밥 냄새도 역해가지구선.......
나는 재빨리 입술이 보이지 않도록 입을 합 다물었다. 내가 경험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 좋다. 내 딴에는 아내가 고생스러운 것이 보여 한 말이지만, 아내 딴에는 딸애가 고생스러울 것이 보여 하는 일이니, 그냥 나는 내가 할 걱정을 하기로 한다. 아내가 가르쳐준 대로 손잡이까지 꼼꼼하게 닦은 냄비를 탈탈 털어 식기건조대에 차곡차곡 올려둔 후 여기저기 튄 물기까지 행주로 깨끗이 훔치고 행주를 판판히 도로 펼쳐 싱크대 턱에 걸었다. 한 발 떨어져 널린 모양새를 본다. 흡족하다.
당신 이제 얼른 나갈 준비 해, 이러다 늦겠다.
몇 시까지 가기로 했는데?
......뭐 그냥, 일찍 다녀오는 거지.
아내가 내가 방금 열심히 닦은 자리를 행주로 다시 훔치며 내 등을 밀었다. 내가 보기엔 다 치운 것 같은데, 여전히 아내 눈에는 미덥지 못한가보다. 조금 머쓱했지만 곱게 밀려나 욕실로 발을 옮겼다. 걸려있는 시계를 슬쩍 보니 이제 겨우 아침 여섯시 삼십 분을 넘겼다. 딸아이와 사위는 아직 눈도 뜨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내를 조금 말려야 하나 싶었지만 한시 바삐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나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 같은 것은 모르는 체 하기로 했다.
-
딸 슬아의 임신 소식을 들은 것은 나흘 전이었다. 아내는 나보다 이틀 앞서 알고 있었다고 한다. 두 줄을 확인하기는 했지만 병원에 가야 확신을 할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서운하지 못했다. 서운하기에 너무 지나치게 기뻤기 때문이다. 아기, 아기라니. 내 아기가 언제 자라 어른이 되어 뱃속에 아기를 품게 되었는지 너무나도 벅차고 놀라웠다. 곧이어 메신저로 받은 초음파 사진에는 사람이라기엔 점에 가까운 어떤 것이었으나,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점이었다.
놀라운 감정이었다. 삼십 여년 전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도 더 벅차고 놀라운 감정이었다. 세상에 이보다 어여쁘고 귀여운 존재는 다신 없을 것이라 믿었었는데,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것을 어찌 이토록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아내는 검은 배경에 담긴 하얀 점 한 개를 보고 눈물을 글썽였다. 나도 그 눈물을 이해했다.
아내와 나는 반찬이며 과일을 바리바리 싸서 식탁에 쌓아두고서는 오전 아홉 시가 될 때까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어서 딸아이에게 가 그 기특하고 어여쁜 얼굴을 보고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시간은 우리에게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아내는 상자를 열어 사과를 하나하나 손수건으로 문질러 닦았다. 사과에서 광이 반질반질 나다 못해 얼굴이 비칠 것만 같을 때까지 뽀득뽀득 닦고 난 아내가 귤까지 꺼내 닦으려 들 때는 말리지 않을 수 없었고, 우리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좀처럼 본 적이 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시청했다. 물론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홉시가 되기 무섭게 아내는 슬아에게 전화를 걸었고, 딸아이는 전화를 받고서야 눈을 떴다고 했다. 아내는 연신 아이구, 아이구를 내뱉으며 주말 아침 단잠을 깨운 것을 미안해하면서도 삼십 분 안에 도착할 것이라 딸애에게 일렀다. 이 과정에서 사위의 동의는 없었으나 나는 굳이 이 점을 언급하지 않았다. 오늘은 딸과 엄마의 날이므로.
손에 든 것이 솜털이라도 되는 듯 아내의 행동은 날랬다. 그리 만류했는데도 나만큼이나 많은 짐을 그득그득 손에 든 아내는, 삼십오 년 전 버진 로드를 걸을 때만큼 상기된 얼굴이었다.
-
딸아이가 딸을 낳았다. 쭈글하고 새빨간 갓난쟁이를 마주했을 때, 나는 딸 슬아의 탄생을 떠올렸다. 막연하고도 막막하던 그 때, 기쁨보다는 긴장이 크던 그 순간이 발가락부터 스멀스멀 내 전신을 덮는다. 나는 그만 행복에 잠식된다. 슬아가 태어났을 때도 이렇게 작고 못난 원숭이 같았지. 흐뭇함에 미소지었다. 그런데 아내가 냉큼 그런 나를 지나치고 사위를 지나치고 아기를 지나쳐 딸 슬아의 손을 덥썩 붙잡았다.
세상에, 우리 딸, 우리 아가....... 내 딸, 얼마나 아팠어. 얼마나 힘들었어.
엄마아.......
딸아이의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아내를 말리려고 보니 아내는 이미 온 얼굴을 눈물로 뒤덮고 있다. 아내가 딸애의 손을 힘주어 잡지도 못한 채 조심조심 쓰다듬었다. 딸애가 아이처럼 힝, 하는 소리를 내며 기어코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아내는 그런 딸애의 눈물을 얼른 손으로 훔치고 거즈에 물을 묻혀 입가를 톡톡 두드렸다. 다 큰 딸을 돌보는 손길이 여태 갓난아기를 돌보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손길을 받아들이는 딸애의 얼굴도 삽십오년 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결심한다. 딸아이가 나보다 아내와 더 친밀한 것처럼 보일 때도 서운해하지 않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