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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떠나 본다

9. 눈물샘 아니 눈물댐이 터지다.

- 가족과 떠난 유럽 배낭여행 -

by 슈크림빵

숙소를 나서려는데 비가 내렸다.

"그렇게 얇게 입고 다니다 감기 걸리지. 이런 날씨에 멋부리다 된통 당한다. 차려입었다 한들, 중국 여자 같구먼."

이미 밀라노에서 비와 추위에 호되게 당하신 엄마는 우비까지 챙겨 입으셨다. 오월의 중순 즉, 봄의 정점에서 맞는 봄비였다. 더군다나 북쪽 아닌 남쪽으로 치우친 중부 지역인데 감기는 무슨.. 개시를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던 밀라노에서의 원피스를 걸쳐 입고 걱정 반 염려 반인 엄마의 시선을 보란 듯이 외면했다. 그러나 상상과 맞닥뜨린 현실 사이에는 큰 괴리감이 있었다. 채 1시간도 지나지 않아 혹시나 해서 챙긴 우비의 단추를 목까지 단단히 채우고 말았다. 꽃처럼 아름답다 불리는 곳이었지만, 빗줄기는 아량을 베풀지 않았다.


'꽃의 성모 마리아'란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쿠폴라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있었다. <냉정과 열정사이>로 증명한 미디어의 힘은 실로 위대했다. 나 역시 영화를 통해, 피렌체를 그리고 대성당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연인들에게 헌정된 장소 이전, 꽤 오랜 과거 한 남자의 예술의 혼이 담긴 장소로서가 먼저 아닐까.


대성당의 지척, 흰색 녹색 그리고 분홍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팔각형 건물인 산 조반니 세례당은 피렌체의 수호성인 산 조반니를 기리기 위해 12세기 초에 완공된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세례당으로 단테와 메디치 가문의 세례 장소로 알려져 유명세를 탔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각인된 것은 '천국의 문으로 손색없다'라 감탄한 미켈란젤로의 말 한마디에 의해서였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세례당 출입문에 새겨 넣을 청동 부조상을 현상 공모한 1400년대 초반,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구약 성서의 내용으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와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가 경쟁을 한 결과, 기베르티가 호명되었다. 아담과 이브부터 시바 여왕과 솔로몬이 만나는 구약 성서 중 열 개의 내용을 금으로 새긴 동쪽 출입문의 커다란 청동문은 그가 27년에 걸쳐 만든 것으로, 미켈란젤로가 극찬했던 그대로 '천국의 문'이라 불리고 있다. 비록 쓸쓸한 뒷모습이었으나 좌절하지 않은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건너가 건축을 공부하고 귀향하여 대성당의 쿠폴라를 만들었으니 결국,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예술을 향한 그들의 집념은 영겁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베끼오 다리 위, 밀집해 있는 보석상 앞은 손님과 주인 간의 흥정이 벌어지고 있었다. 14세기에 건설된 '오래된 다리'라는 뜻의 Ponte Vecchio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아, 그 자체만으로 피렌체를 상징하고 있다. 과거 세금 면제로 인해, 식품 중 특히 푸줏간이 들어섰던 그저 삶의 터전이었던 곳은 페르디난도 1세(Ferdinando I de' Medici)에 의해 바뀌었는데, 다리 위에 소, 돼지의 내장과 낭자한 혈흔 등을 직시한 그는 미관상의 이유를 들어 1593년 상인들을 쫓아낸 후 금 세공인과 귀금속 상인들을 불러들였다. 그 후로도 같은 종류의 상점들이 주를 이뤄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됨은 물론, 보행자 전용 다리가 되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피렌체는 사랑의 성지가 맞나 보다. 고백인 듯 맹세인 듯 연인들이 걸어놓은 자물쇠들이 거리 곳곳에 널려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베끼오 다리를 소개하는 한줄평 같은 피렌체 출신의 유명한 금 세공인인 벤베누토 첼리니의 흉상 주변 울타리 역시 자물쇠들로 빼곡했다. 그 자리에서 눈을 들어 대성당의 쿠폴라를 바라보았다. 400개가 훨씬 넘는 계단을 올라 도착한 쿠폴라 구석 한편에 여느 사람들과 마친가지로 나 역시 소원을 적었다. 다시 찾은 대성당의 쿠폴라, 내 소원이 무사한지의 확인이 먼저였지만, 해마다 수천 명의 발길이 오가는 곳이기에, 당연 지워졌겠지. 그리고 그 결말을 알고 있지 않은가. 바람처럼 떠도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 두기엔 소원의 벽도, 커다란 자물쇠로도 역부족인 것을.. 즉, 영원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으려고, 영원하려고 노력하는,, 그런 상징의 결과물은 아닐는지..


민소매와 짧은 팬츠 차림으로 뜀박질하는 남녀 무리를 만난 건 베끼오 다리 근처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성당 앞에서도 이 같은 무리를 만났었는데,, 비 오는데 날궂이라는 비뚜름한 시선을 한 나를 비웃듯 그들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현지인들은 익숙한지 몰라도 이방인인 나는 기세등등하게 쏟아붓는 비와 그로 인한 추위로 불편함을 느껴, 일단 숙소로 피신하기로 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어주는 민박접 언니에게 표정으로 대강 설명을 한 후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아침에 남은 밥과 반찬이 있는데 점심 전이면 주겠다 했다. 슬쩍 붙이는 윙크는 사장님한테 말하지 말라는 일종의 암호겠지. 여행객에게 있어 공짜 밥은 땡큐지요!! 얼추 밥을 먹은 시점, 반짝 해가 나타났다. 이에 다시 채비를 하여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아까데미아 미술관에서 진품을 보아서일까. 도착한 미켈란젤로 언덕 위에 우뚝 선 다비드상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지만, 그닥 감흥이 없었다. 5.17m의 대리석 덩어리를 5.5m의 조각상으로 완성하는데 걸린 시간은 단 삼 년, 그의 나이 26세에 행한 실로 놀라운 업적이었다. 아까데미아 미술관 내부로 들어가 잠볼로냐의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 조각상을 지나 복도 끝을 따라가다 보면, 측면을 응시한 채 서 있는 다비드가 보인다. 조금 뒤쪽에서 보면 균형이 잘 잡힌 청년의 모습이나 가까이서 보면 오른팔과 돌을 쥐고 있는 손은 유난히 크고, 하체 역시 상체에 비해 커다랗고 두껍다. 머리 역시 몸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데, 이는 조각상의 각 부위를 의도적으로 크게 만들어 실제 눈에 보이는 것과 같이, 멀고 가까운 거리감이 드러나게 표현한 것으로,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첨예하게 달라 그 크기와 위용에 어리둥절했고 실로 압도당했지만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걸까? 미켈란젤로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걸까? 주일학교에서 보고 들었던 다윗과는 꽤나 이질감이 느껴졌다.

분명, 해가 방긋 얼굴을 내밀었음에도 여전히 비는 오락가락했다. 가랑비에 머리가 젖고, 목덜미는 땀에 젖어 쉴 곳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마침 내가 좋아하는 난간이 보였다. 아빠가 딴 곳에 집중하신 틈을 노려 얼른 난간을 타고 올라앉았다. 꽃처럼 아름다운 피렌체가 발아래로 무릎을 꿇었다. 이런 별칭이 붙었는지 반박할 여지가 없을 뿐 아니라 희열을 느끼는 동시에 진정한 자유마저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빗줄기가 거세져 언덕 위에 설치된 간이 천막으로 일단 몸을 피하고 보는데, 발을 동동 구르는 나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시원스럽게도 쏟아진다. 비가 오다 별안간 해가 뜨더니 언제 그랬나는 듯 다시 비가 내린다. 피렌체는 지금 호랑이들의 함동결혼식이 한창인 모양, 졸지에 하객으로 초대된 이상 본분에 충실해야지. 골목의 닳고 닳은 돌들은 물기를 머금어 한층 반들반들했고, 그래서인지 신비롭고 고풍스럽기까지 했다. 이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중세 시대로 도착할 것만 같은 엉뚱한 상상마저 불러왔다. 계속되는 비로 인해 질퍽거렸지만, 나름 이런 운치를 느낄 수 있었으니 나쁘다고만 할 수 없지.


잠깐 둘러보고 오시겠다 하여 헤어진 지 30분이나 지났건만, 감감무소식인 부모님을 찾아 약속 장소인 두오모 대성당 근처를 헤집고 다녔지만 헛수고였다. 기다림에 지친 오빠를 먼저 숙소로 보내고 다음 목적지인 로마행 기차 시간 확인차 역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만난 학생 말에 의하면 로마의 한 민박집에서 5유로 할인한 20유로의 가격을 제시하자, 이에 질세라 대부분의 민박집 역시 숙박비를 동결했다고 했다. 주인들 속이야 쓰리겠지만, 이래저래 여행자들만 신이 난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엄마와 나는 당연 솔깃했다. 피렌체와는 달리 로마는 여행객들이 응집하는 곳, 그로 인해 다수의 민박집이 영업 중이다. 몰아치는 수요에도 풍요로운 공급으로 인해 선택의 폭이 넓다는 것. 한시적이긴 하나 당분간은 지속될 프로모션이라 전한 학생의 말과, 피렌체 로마 따질 것 없이 민박집의 호황기는 다 옛말이라는 사장님의 한탄 섞인 하소연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물론 안타까움이 일었지만 반대의 마음이 더 컸다. 해서 남의 일인 거지.


중앙 시장을 끼고 막 도는 찰나, 악기 소리가 한창이었다. 소리에 이끌려 가보니 연미복 차림의 오케스트라로 추정되는 무리들이 중앙에 선 지휘자의 손짓에 맞춰 연주 중이었다. 시장 한복판에서의 공연이라지만 분위기며 소리는 제법 근사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지휘자의 멘트 후에 이어지는 악기들의 합주, 그러기를 얼마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오는 걸 보니 아마 한 악장이 끝난 듯했다. 그들을 따라 힘차게 박수를 치다 그제야 본 손목의 시계는 오후 6시 30분을 막 넘어서고 있었다. 큰길 대신 지름길로 보이는 좁다란 골목길로 접어들었는데, 아랍계로 추정되는 두 명의 남자가 바짝 뒤를 쫓는 것이 아닌가!! 불길한 느낌에 두 다리에 박차를 가해 보지만 골목길은 길기만 했다.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는 여자가 보여 다소 마음이 놓였지만 두 다리엔 여전히 힘이 실려 있었다. 길고 길었던 골목길을 벗어나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너무 앞서나갔나 보다.


도착한 숙소 안, 머리카락이 촉촉한 걸 보니 엄마는 샤워를 하신 듯했고, 오빠는 대자로 뻗은 채로 잠들어 있었다. 내 마음은 물론 발마저 동동 구르게 만든 부모님을 만나면 따지리라 마음먹었건만, 안전한 모습을 확인하니 그저 감사한 생각뿐이었다.

"두오모와 그 주변을 샅샅이 살핀 것도 모자라 삼십 분 넘게 기다려 봐도 안 오시길래 혹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했잖아."

"니들 편하게 구경하라고 그랬지. 비도 오락가락 내리지 그러니까 괜스레 귀찮기도 해서 숙소로 들어왔어."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엄마의 표정에는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가 엿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부터 말씀이 없으시던 아빠가 방을 나가자마자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네 아빠가 영 재미가 없는 모양이야. 잠자리도, 먹는 것도, 구경거리마저.. 좀 지친 듯해서 우리 먼저 온 거였어. 하긴, 네 아빠 입장도 영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환갑이라는 방울을 아빠 목에 걸고 어찌 보면 반 강제로 떠난 여행이기에 아빠 입장에서 보면, 그리 좋을 것이 없지 싶었으나 집 떠난 지 이제 열흘 남짓 아닌가? 좀 이르다 싶어 그게 걱정이 되었지만, 이 역시 내 입장이 아닌가!! 짐이 되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하실까!! 아빠가 느끼는 정신적, 육체적 고충은 얼마나 될까? 감히 가늠이 되지 않았고 난데없이 눈물이 솟구쳤다. 마침 방으로 들어오시던 아빠는 우는 모습에, 내 두 손을 꼭 감싸며 미안하다 하신다.

'아빠가 뭘요. 이런 여유 없는 여행길에 모시고 온 제 탓이에요.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안락하고 편안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저녁으로 나온 닭볶음탕은 칼칼함이 조금 아쉬웠다. 여행지에서 고향의 맛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과한 욕심이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어렸을 적에 닭 잡는 것을 본 이후로 닭을 멀리하는 오빠는 감자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 오빠 앞에서 배부른 투정은 금물, 차린 이의 성의를 생각해 맛있게 해치운 후 일기 예보상 내일도 비 소식이 있어 긴급 가족회의가 소집되었다.

"이동 방법은 총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유레일패스로 피렌체-오르비에토-로마로 가는 것이고, 두 번째는 유레일패스로 피렌체-로마로 가는 것, 세 번째는 구간 티켓으로 Regional 열차를 타고 피렌체-로마로 이동하는 거예요. 1,3,2 순으로 우위를 정할 수 있어요. 부연 설명을 하자면 첫째, 오르비에토에서의 당일 관광으로 인한 불편함과 빠듯한 시간이 문제가 되지만, 패스의 활용도 면에서는 최적의 선택이고 둘째, 미리 알아본 Regional 열차의 구간 티켓은 인당 15유로라는 비용적인 부담이 있지만 그로 인해 패스를 절약할 수 있어요. 셋째, 유레일패스를 이용해 IC 또는 IC plus 열차로 로마로 이동하면 시간적인 면에서는 최선이나 세 시간 남짓하는 단거리 구간에서 패스를 쓰는 건 우리 같은 셀렉트패스 소지자에겐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나 잠깐의 침묵은 얼마 가지 않아 엄마에 의해 깨졌다.

"네 말대로 첫 번째는 조금 부담스러울 것 같고, 굳이 추가 비용까지 들여 이동해야 하는 두 번째도 그렇다고 본다. 패스를 아끼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겠는데, 패스 사용이 불가능할 때, 그때 구간 티켓을 사면 어떨까. 일단 패스부터 사용하고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아직 여행 초반이잖아."

듣고 보니 조목조목 다 옳으신 말씀, 혹여 패스가 남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물론, 이런 경우는 희박하다지만..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사서 고민하고 있는가?? 어려운 결정의 순간, 의논하고 의지할 대상이 있음에 그저 감사했다.


계속되는 비 소식에, 귀동냥한 로마의 소식까지 더해져 일정을 하루 앞당겨 로마로 떠나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후자의 입김이 더 크게 작용했다. 시내 관광과 우피치 미술관 그리고 아까데미아 미술관을 포함해 총 3박 4일이 애초의 계획이었으나 미술관에 가지 않겠다는 두 남자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이기도 했다. 로마 소식을 전한 학생은 방 부족 사태는 염려 말라했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본다는 심정으로 숙소 근처 전화방으로 향해 장거리 전화를 걸었다. 뚜- 하는 신호음 뒤로 들려오는 기억 속의 낯설지 않은 목소리는 정작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이어진 나의 어필에도 불구하고, 오고 또 가는 사람들이 워낙 많은 곳이라 모르겠지만, 얼굴을 보면 알지 않겠냐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전해왔다. 통화 내용을 전해 들으신 엄마의 얼굴에 실망감이 역력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삼 년이나 지난 시점이라 한들, 밤늦게까지 이어진 학생들의 수다에 잠을 이루지 못해 방 밖을 서성이는 내게 비어 있던 가족룸을 선뜻 내어준 것 하며, 감기에 걸린 나를 위해 당신 약을 친히 건넨 것도 모자라 콩나물 넣은 김칫국을 끓여준 것 하며, 울렁증 때문에 삼겹살을 건너뛴 내게 삼겹살과 시저 상추를 맛보지 않고선 로마를 보았다고 감히 말할 자격 없다며 부러 삼겹살을 구워준 사장님이 아니던가. 물론 일하는 중국인 언니가 차린 솜씨라지만,, 이를 지시하고 감독한 이는 분명 사장님이었다. 목소리만으로는 모른다 해도 구구절절 설명하면 단박에 알아챌 거라 생각했기에, 괜스레 서운했다. 스치는 인연이란 말인가? 다시 로마를 방문하게 되면 반드시 찾아오겠다 약속했고, 이제 실천할 일만 남았다.


일기 예보는 정확했고, 반나절 후엔 로마행 기차를 타야 했기에 무작정 베끼오 다리로 향했다. 주룩주룩 내리는 비로 인해 어둑해진 도시에 상점의 불빛들이 더해져 차가운 기를 몰아냈고 그로 인해 제법 운치 있었다. 피티 궁전으로 향하는 골목의 한 앤티크 상점에서 마주한 커다란 샹들리에, 빛바랜 고가구들, 작자 미상의 유화들,, 이 모든 것들은 혹 왕실의 물건은 아니었을까? 한참을 둘러봐도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Firenze Santa Maria Novella역 안도, 우리가 있는 플랫폼에도 사람들은 북적였다. 저들의 목적지는 어디일까? 때마침 시원스레 소나기가 퍼부었고, 그 빗줄기를 뚫고 플랫폼 안으로 기차는 들어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으니,, 아저씨!! 기차 떠나요. 어서 타시라요..

"패스 아껴서 다른 데 가고 싶으면 그렇게 하자. 인당 15유로면 가능하다면서."

베끼오 다리를 건너며 엄마는 넌지시 말씀하셨다. 아마도 어제 일이 내내 거리신 모양이었다. 배려라는 포장으로, 정당성이라는 합리화로,, 어쩌면 내 욕심만 채우고 있지 않은가? 묻고 또 생각을 하는 사이 피렌체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기차 내에서는 오르비에토(Orvieto)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에트루리아 문명의 중심지였던 고대 도시는 기원전 3세기경에 로마에 합병되었다. 이후 로마 제국이 붕괴되자 가파르고 평평한 꼭대기에 위치한 고립된 언덕의 방어적 위치는 재평가되었는데, 이탈리아 반도를 꿀꺽 삼키려는 코트족, 롬바르드족의 침입을 대비하기에 수직의 응회암 절벽 위로 솟은 도시는 난공불락 그 자체였다. 이후 1860년 통일 이탈리아에 합병될 때까지 교황의 소유로,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였다. 로마를 제외한 이탈리아 중부에서 오직 오르비에토와 비테르보에만 교황궁이 있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 9세는 1227년 신학 학교이자 유럽 최초의 학교 중 하나인 도미니코회(studium generale)를 승인했고, 교황 우르바노 4세(1261-1264)는 임기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으며, 교황 니콜라스 4세(1288-1292)는 자신의 고향인 로마 대신 오르비에토를 교황청 소재지로 선택함은 물론, 교황청 회의의 전통마저 확립했다.

이와는 반대로 교황청의 오점으로 기억되는 사건도 있었다. 1527년으로 거슬러 가보면,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수와 1세와 카를 5세가 가장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는 왕권 강화와 더불어 국정이 안정됨은 물론 인구 증가로 인해 유럽의 강대국이자 중심국가로 자리 잡게 되었는데, 여기에 보태어 프랑수아 1세는 즉위와 동시에 밀라노로 진격해, 진을 치고 있던 스위스군과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둬 밀라노를 차지한다. 게다가 그는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지역에 대한 영향력뿐 아니라, 교황 레오 10세와 볼로냐 협약(1516)을 맺어 프랑스 성직자들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까지 강화해 나갔다. 아버지 필립 1세의 사망 후 어머니와 함께 에스파냐 공동 왕위에 즉위한 카를 5세는 뇌물로 포섭한 선제후들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다. 1519년의 일이다. 양쪽의 조부모로부터 증여받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부르고뉴공국의 영토,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 남아메리카 식민지까지가 그의 영토였기에, 프랑스 입장에서 보면 북쪽의 잉글랜드를 제외하고는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 전역이 카를 5세의 것이나 다름없으니 프랑스와 1세의 입장에서는 사실상 전쟁은 불가피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로마 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함은 물론,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나, 정작 그들은 십여 개의 작은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외세의 침략에 대응하기는커녕 스스로 혼란만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탈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프랑스와 1세와 카를 5세의 패권 다툼이 한창일 때, 이들 사이에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한창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가 제국군에게 대패한 것도 모자라 국왕 프랑수와 1세마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클레멘스 7세는 충격을 받게 된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까지 세력을 뻗친 카를 5세를 몰아내기 위한 군사 동맹을 결성하기 시작한다.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에 반기를 들었던 교황 클레멘스 7세와 1521년 밀라노 탈환과 그로 인한 군에 의한 통치권 제한에 불만을 품은 프란체스코 2세,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한 프랑스가 합심하여 반기를 들고 나서게 된 것이다.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프랑스, 교황청이 참여한 일명 코냑동맹이 탄생하게 된 배경은 이와 같다. 동맹군의 몰아치는 힘은 실로 대단했고 롬바르디아의 로디 등 부부 이탈리아를 점차 점령해 나가자 이에 가만있을 카를 5세가 아니었다. 믿었던 프란체스코 2세의 배신에 분노한 카를 5세가 본보기로 밀라노를 치고 스포르자 가문의 통치권마저 회수해 버리자 파죽지세의 코냑동맹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파비아 전투의 패배를 떠올린 프랑스는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고, 베네치아는 자국의 사정을 핑계 삼아 군대를 파견하지 않는가 하면, 나머지 도시 국가들은 돌아가는 사정을 주시하여 제국군과의 정면출동 대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이에 바빠진 이는 클레멘스 7세였다. 아무리 적이라 한들, 가톨릭교도인 황제의 군대가, 감히 로마 그리고 교황청을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 여긴 클레멘스 7세의 안일함을 비웃듯 제국군은 잔니콜로와 바티칸 언덕 쪽에 있는 성벽들을 공격했다. 그제서야 교황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지만, 당시 로마를 지키는 병력은 5000명의 군인과 스위스 근위대뿐이었고, 제국군에 비해 그 수는 턱 없이 적었다. 아무리 도시를 감싼 성벽이 견고하다 한들, 제국군의 포병부대는 용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제국군의 수장이 총에 맞아 전사하자 이에 질서는 사라졌고 무너진 성벽 안으로 제국군은 들이닥쳤다. 전진하는 그리고 후퇴하는 이들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스위스 근위대는 달랐다. 베드로 성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500명 중 189명이, 교황이 베드로 대성당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는 겨우 42명이 살아남았다. 충성 서약을 맹세한 스위스군의 희생으로 클레멘스 7세는 베드로 대성당으로 피신한 후 passetto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안전하게 대피하였다. 분노와 욕심에 눈이 먼 카를 5세의 병사들은 베드로 성당뿐 아니라 로마 전역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그리고 추기경과 사제들, 귀족과 여자들을 가리지 않고 칼로 베고 죽였다. 그로 인해 5만 명에 육박하던 인구는 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끔찍한 로마 약탈의 기록은 이전 이후에도 없었다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산탄젤로 성 안의 클레멘스 7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낭자한 시체가 썩어 도시에 전염병이 돌자 무려 구 개월 동안 무력을 일삼었던 제국군은 로마를 떠나게 되고, 그 소식을 들은 클레멘스 7세는 오르비에토로 달아난다.

중세시대에는 전쟁 시 방어막으로, 혹은 누군가의 피난처로, 흑사병 전염의 차단처였던 도시는 오늘날에는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슬로 시티 중 하나로, 절벽 위의 마을이라는 입지 조건을 무기로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당일치기도 가능하다 하니 로마에 있는 동안 다녀와."

아차!! 속마움을 또 들켜버렸다. 평일 낮 시간이라 그런지 기차 내 빈 좌석이 눈에 들어오길래, 창가 좌석으로 옮겨 잠시나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려 하는데 역무원이 돌아 나닌다. 늦게나마 티켓 검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의 펀칭기가 나의 유레일패스를 꾹- 누르는 순간, 못내 아쉽기만 하다. 잠깐!! 이 어색한 분위기는 뭘까? 아까부터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꾹 다물고 계신 부모님..

"네 아빠가 영 못 참겠는지 잘만 있는 집타령을 한다."

"아니 왜 애한테 그런 얘기를 해. 신경 쓰지 마라. 아니다. 아무 뜻도 없이 한 말에 괜히 저런다. 나 괜찮아. 정말이야."

"아니긴요. 어제도 그렇고. 처음 하신 말씀도 아니면서."

두 분 얘기만 들었을 뿐인데도 주르륵-,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느닷없는 내 울음보에 아빠는 꽤나 당황하신 모양이었다.

"이가 아파서 그런지 신경이 좀 날카로워져서 괜한 짜증도 일고, 로마는 민빅집도 좋고 볼 것도 많다면서. 거기에 한식까지 보태진다면 나아지겠지. 일시적인 거야. 아빠가 미안하다."

설명 같은 아빠의 하소연에 감정이 더욱 고조된 나는 결국 엉엉 울고야 말았다. 여행 중 눈일이 튀어나올 정도로 울었던 사건이 딱 두 번 있었는데 그 시작은 피렌체-로마행 기차 안에서였다.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호스텔과 민박집을 전전하는 배고프고 고단한 여행,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지하게 되묻고 있었다. 초호화 크루즈 여행은 고사하더라도 식과 주의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편히 제공하지 못하는 것에 내심 죄송스러웠지만 지금에 와서 계획을 수정할 수도 없었다. 이에 눈물은 끊이지 않고 계속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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