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생활이 시작되었다. 2006년 3월, 박사논문을 제출하고 생후 14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남편 따라 대만에 왔다. 11년간의 일본 도쿄 유학 생활을 마무리하고, 이제 나의 제3의 인생 무대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한국이 아닌 대만으로 향한 이유는 연애 시절의 약속 때문이었다. 남편은 결혼 후 자신의 고향인 가오슝에서 살고 싶다고 했고, 당시 나는 일본이든 대만이든 특별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살아야 한다는 고정관념 없이, 준비도 없이 무작정 남편을 따라 대만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대만에 오자마자 나는 고장 난 몸부터 치료해야 했다. 오른팔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첫아이가 태어난 지 3개월쯤 될 무렵부터 아기를 매일 안고 업는 일들이 내 체력과 완력으로는 점점 버거워지더니, 결국 손목에 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아기의 무게가 팔에 부담이 된 데다가, 논문 집필로 인한 수면 부족까지 겹치면서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전기 치료와 침 등 여러 가지 치료를 받아봤지만 효과가 거의 없었다. 병원에서는 휴식을 권했지만, 제대로 쉬지 못한 것도 효과를 보지 못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통증은 처음엔 손목에서 시작해서 일본을 떠날 때쯤에는 팔 전체, 상반신 오른쪽까지 퍼져서 조금만 움직여도 심한 통증이 뒤따랐다.
도쿄의 전차는 출퇴근 시간마다 늘 만원이어서, 전차를 타는 것이 고역이었다. 사람들이 내 어깨를 스치기만 해도 비명이 나올 정도로 아팠다. 어깨부터 손까지 전부 붕대를 감고 다니며, 가능한 한 팔을 쓰지 않으려 애썼다. 볼펜으로 글을 쓸 수 없었고, 붕대를 감은 채 컴퓨터 키보드를 치며 박사 논문을 작성했다. 젓가락질조차 어려워져서, 일본을 떠나기 전 지도교수님과 마지막 식사를 할 때 반찬을 손으로 집어 먹었던 기억이 난다.
논문을 쓰는 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남편은 종종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생명을 갉아먹는 짓"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어깨에서 손까지 붕대로 감싼 내 팔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모습을 보고 화가 났을 법도 하다는 생각이 지금에 와서는 든다.
대만에 왔을 때, 나는 젓가락질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나빴다. 화장실에 가서 바지는 겨우 벗을 수 있었지만, 볼일을 본 후 다시 입고 단추를 잠그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아기 옷을 갈아입히는 것은 당시 나에게 매우 힘든 일이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점심으로 국수를 사 오셨다. 그릇에 담긴 국수를 보며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고 있는데, 시어머니는 그제야 상황을 아셨는지, 아기에게 먹이듯 가위로 국수를 잘라 주셨다. 나는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어 그 국수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몸 상태가 너무 나빠서 어떤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권했지만, 수술이 잘못될 경우 평생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수술은 최후의 선택으로 남겨두고, 접골원 같은 곳에서 치료를 받기로 했다. 그 치료는 한 마디로 '고통' 그 자체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아픈 곳을 누르고, 밀고, 잡아당기니 그 통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1시간 동안 치료받는 내내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고, 끝나고 나면 옷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치료 후의 통증 때문에 앉아 있기도, 누워 있기도 힘들 만큼 상반신 전체가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두 번의 치료 후 나는 몸에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팔을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에서 아침 5시쯤 아기가 배고파 울면, 남편은 아기를 안고 달래고, 나는 우유를 타러 가곤 했다. 하지만 빈 플라스틱 우유병조차 들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자는 동안 팔의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아, 아침에 눈을 뜨면 내 팔이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고통의 치료'라 해도 이 방법을 참고 견뎌보자고 마음먹었다. 반년 정도 치료를 받은 후, 나는 팔을 들어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