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별반 차이 없이, 평범하게 보낸 하루를 우리는 무탈한 하루라고 한다. 그 무탈한 하루가, 그 평범한 하루가 실은 기적임을 일깨워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지난주였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6:10에 기차역에 고2 아들 마중을 나갔다. 이 아들은 시험을 코 앞에 닥치지 않으면 집에서 집중이 잘 안 된다고 한다. 그래서 방과 후 공부할 곳을 물색하는 게 하나의 숙제이다. 평일에는 2,3군데를 정해서 돌아가면서 공부한다. 멀쩡한 자기 공부방을 두고 책 볼 곳을 물색한다는 게 꽤나 번거롭고 에너지 소모되기도 한다.
그날은 내 근무처인 우리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마침 중간고사 기간이라 아들이 자주 이용하던 자습실은 꽉 차 있어 처음으로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은 2층에서 6층까지이다.
(저희 학교 도서관 2층 입구에서의 모습)
밤 10시에 폐관하기에 그 시간에 맞춰 나는 데리러 갔다. 내가 도착한 시간은 9시 55분,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고 차에서 기다렸다. 여기까지는 늘 하던 일이다.
10시 5분에 전화가 울렸다.
"엄마, 나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뭐라고? 지금 어딘데?"
"2층. 도서관 안인데 문이 다 닫혀 있어 밖으로 나갈 수 없어."
"무슨 말이야?"
"책 보다가 깜박해서 10시가 넘었는데, 갑자기 불이 다 꺼졌고, 출구 문이 잠겨 버렸어."
"카운터에 직원 있잖아."
"아니, 아무도 없어. 도서관 안에 나 혼자야."
"뭔 일이래? 엄마 지금 2층으로 올라갈게."
차를 세워두고 2층으로 급히 올라갔더니, 커다란 도서관 안이 캄캄하고, 작은 핸드폰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아들 핸드폰의 불빛이었다.
밖에서 문을 흔들어 봐도 굳게 잠긴 유리문은 끄덕도 하지 않는다.
유리문 안에서 아들이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배터리가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나는 바로 전화 걸었다.
"경비실이죠? 여기 도서관인데 학생 한 명이 지금 도서관 안에 있어요. 문이 닫혀 나올 수 없는데 어떡하죠?"
"10시에 자동 센서로 모든 문이 잠겨요." 경비원이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뭐라고요? 자동이라고요? 빨리 오셔서 좀 해결해 주세요."
"저한테 열쇠 없어요."
도서관 입구 유리문이 그렇게 두꺼운 걸 처음 알았다. 문이 두꺼워 아들 목소리가 잘 안 들렸다. 배터리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아 전화는 아껴둬야 했다.
나는 우리 학교 도서관이 매우 넓어 쾌적하다면서 학생들에게 자주 이용하라고 말하곤 했었고, 교직원 자녀도 이용 가능하기에 아들에게도 몇 번인가 말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 널따란 공간에, 불빛 하나 없는 곳에 아들이 갇혀 있다. 오늘 처음 들어간 곳이라 아들은 도서관 구조도 모른다.
내가 안에 같이 갇혀 있었으면 차라리 좋을 텐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5분 정도 경과했을 즈음에 경비원이 플래시를 비추며 나타났다.
"자동 센서 작동이라 문을 열 수 없어요."경비원은 방금 전화 통화에서 한 말을 반복했다.
"아니, 그럼 학생들에게 이런 문제 발생한 적 없나요?"
"있죠. 공부하다 잠이 들어 폐관 시간에 일어나지 못해 아침까지 도서관에서 자는 학생들이 있어요."
"카운터 직원은 폐관 전에 확인도 하지 않나요?"
"늦은 시간에는 아르바이트생만 있고, 그 학생도 10시 전에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 서둘러 나갔겠죠." 이런 도서관이 어디 있냐고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나는 이 학교에 근무한 지 15년이 되었지만 이런 말을 학생들한테서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교수가 도서관에서 폐관 시간까지 공부하지도 않으니 이런 경험을 겪을 리도 만무하다.
경비원한테 내 아들이라고 울먹였다. 경비원은 6층에 작은 문이 있는데 혹시 그 문이 안 잠겨 있으면 그 문을 통해 나오면 밖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했다. 아들은 도서관 출구가 있는 층인 2층에서 공부했던 터라, 6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핸드폰 플래시에 기대, 어둠 속을 헤매며 겨우 계단을 찾아 올라갔는지 시간이 좀 지나자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엘리베이터는 밖으로 연결된 엘리베이터가 아니었다. 2층까지 내려왔지만 여전히 도서관 안이었다.
경비원은 6층 문으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라고 말하고, 아들은 6층에 문이 없다고 했다. 찾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시 5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다. 핸드폰에다 전화했지만 받지 않는다.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나와 경비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의 그 문 앞까지 갔다. 밖에서는 열어 들어갈 수 없다고 하니, 할 수 없이 그 문 앞에서 아들이 나타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왜 안 나타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가슴이 두근거렸다.
1분 1초가 참 길게 느껴졌다. 나와 경비원은 침묵 속에 그 문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 기다림 속에 수많은 시나리오가 뇌리를 스친다.
(늘 들고 다니던 외투는 왜 오늘따라 깜박했어? 외투라도 있으면 도서관에서 잘 때 덮을 수 있을 텐데. 핸드폰 배터리만 남아 있어도 무슨 일 있으면 나랑 연락할 수 있을 텐데. 내일 등교는 어떻게 하지? 도서관은 8시 반에야 열고, 등교 시간은 8시, 여기에서 학교까지 걸리는 시간은 1시간. 한 번쯤 지각, 어쩔 수 없지? 근데 얘는 내일 아침 컨디션은... 여기까지 상상하니까 머리를 휘저었다. 순간 머릿속이 에러가 발생했다.)
너무나 길게 느껴지는 시간. 몇 분이 흘렀을까, 문이 드디어 열렸다.
20여 분간의 실랑이 끝에 아들과 상봉했다. 긴장이 서려 있는 아들을 보는 순간 안도감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그때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아들 책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 말없이 가방 자크를 닫아주었다.
차에 올라탄 우리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기력이 다 소모된 듯, 아들은 핸드폰을 무표정으로 들여다보고, 나는 핸들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차가 우리를 태우고 달린 건지, 내가 운전한 건지, 15분 후에 차가 집 앞에 도착했다.
"아들, 도착했어. 오늘 수고했다!"
"엄마도 수고했어!" 아들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네. 우리 둘 다 수고했네! 이게 인생인 거야. 내일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는 인생. 그러니까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지낸 하루하루가 기적인 거야."
"정말 그러네, 엄마!" 까칠한 아들도 오늘만은 토를 달지 않고 순순히 내 말에 수긍했다.
차를 주차하고 집에 들어가자, 아들이 샤워하고 나와서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 난 알고 있었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밖으로 나올 수 있으리라고. 근데 엄마는 곧 울 것 같더라. 내가 못 나올 줄 알았어?"
"그럼, 울고 싶더라. 못 나오면 어쩌냐? 너 혼자 그 안에서 자야 되는데. 네가 우리 학교 학생이면 자주 이용하는 곳이니까 걱정 안 하지. 근데 너 처음으로 간 곳이잖아. 그 넓은 곳에 혼자서. 핸드폰 배터리도 얼마 남아 있지 않고. 게다가 모기도 있는데."
아들은 지쳤는지 샤워하고 바로 불을 껐다. 아들 자는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무탈한 하루는 결코 평범한 하루가 아니라 기적이다.
어떤 파동도 일지 않고 보내는 하루를 우리는 무료하다고 하고, 순탄함의 고마움을 잊고 살기 일쑤이다. 그래서 매일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살라고 오늘 우리에게 찾아든 메시지였다.
불행이 있어야 행복이 뭔지를 알고, 슬픔이 있어야 기쁨을 느끼고, 건강을 잃어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 듯, 우리 인생에는 핑크빛도 회색빛도 다 필요한 것이다.
(ps. 이 일은 학생들에게 주의시켰고, 학교 측에 문제 제기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