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보 Sep 07. 2024

이루지 못한 꿈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어렸을 때에는 자신의 의사와는 아랑곳없이 집이라는 울타리와 둘러싼 환경 속에 자신을 맡겨두고 흐르는 세월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 같다. 나는 제주의 고산이란 지역에서 태어나, 고산초등학교, 고산중학교, 고산상업고등학교(현, 고산관광정보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태어난 지역의 학교를 다니는 것에 대해 거의 의문을 품지 않았다. 공부라도 특출했으면 고등학교쯤은 고산을 떠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도 못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까지 공부의 즐거움을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니까 외워야 했고, 숙제가 있으니까 책을 폈다. 진정으로 공부의 즐거움을 안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일본 유학 시절이었다.




중2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홀몸으로 농사를 지으며 자식 4명을 키워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집 가계는 바닥을 치는 상황이었다. 친척들에게도 빚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 어머니 나이  50도 되기 전에 홀몸으로 자식 4명과 빚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다. 그때의 나에게 어머니는 어머니일 뿐, 여자라는 생각도 못 했거니와, 어머니니까 자식을 키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결혼해서 외국에서 살며 힘들다고 느낄 때,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을 보며 생각하곤 했다. 어머니가 저승에서 나를 보고 비웃지 않으실까? 힘들어하는 나를 보고 “이까짓 게 뭐가 힘들다고?”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그런 집안 상황이어서 하나뿐인 아들인 오빠도 대학 마당에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야간 대학에 가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오빠 앞에서 어머니에게 말한 바람에 어머니는 내 빰을 때리셨다. 실은 어머니에게 빰을 맞은 기억이 내 뇌리에 없다.  15년이 지난 후, 일본에서 첫째를 낳고 아기를 봐주러 일본에 오신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어머니는 생전에 딱 한 번 아이를 때렸다고, 그게 내가 고3 때 나를 때린 거라고 슬픈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고3 때에 있었던 일인데, 내 뇌리 속에는 야간대에 들어가겠다고 말한 그날, 울면서 맨말로 친구 집에 달려간 것만 기억에 남아 있고, 어머니한테서 뺨을 맞은 기억은 완전히 지워져 있다. 어머니에게 뺨을 맞은 것이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고3 담임 선생님이 돈이 없어도 일하면서 야간 대학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해 주셔서 야간대에 진학하겠다고 한 것이다. 진학하지 못한 아쉬움은 내 마음에 떠나지 않는 갈망의 씨앗이 되었고, 그것이 훗날 내 인생을 바꾸게 될 거라는 것은 그때는 나 자신도, 가족도 예측하지 못했다. 
 
   모든 성취의 시작은 갈망이다. (나폴레옹 힐) 
 
 



고등학교 졸업 후에 바로 취업했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은 늘 내 잠재의식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퇴근 후에 나는 늘 뭔가를 배우려 학원을 기웃거리곤 했었다. 꽃꽂이, 기타, 피아노, 일본어, 중국어 등 여러 가지를 배웠지만, 그 갈증을 완전히 다 해소하지 못했다. 길거리에서 대학에 다니는 고등학교 동창생을 마주치면 한없이 부러웠다. 가끔 대학 다니는 동창생들이 대학 친구들을 내게 소개해준다고 주점에서 나를 부르곤 했는데, 그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운 마음과 함께 은근히 화가 나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갔으면 열심히 공부나 하지, 맨날 놀고 술만 마시냐”라고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다.




이러한 주어진 조건 속에서, 우리 네 형제는 각자 채워지지 않은 결핍을 품고 살았으리라 생각한다. 물론 그 결핍의 내용과 강도는 각기 달랐을 것이며, 삶 속에서 퇴색되거나 변모했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