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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보 Oct 02. 2024

아들 여자친구에 반하다!

고입 보고 두 달쯤 되었을 때, 둘만의 공간에서 큰 아들이 비밀을 털어놓듯,

"엄마에게는 말해야 할 것 같아서"라고 시작하며,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했다. 고입을 본지가 언젠데, 어느 시간에 여자 친구를 만들었다는 건가?


중학교 3년간 같은 반이었다고 했다. 3년간 서로 관심 없이 지내왔는데, 5월에 고입을 치른 후 그룹별로 발표 준비하는 과정에서 자꾸 연락이 오가다 보니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졸업 앨범 속의 사진과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엄마인 내가 봐도 너무 예쁘다. 그냥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지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한눈에 반했다. 엄마가 반해 어쩌라고.


학업에 지장을 주면 어쩌나 해서 둘이서 사귈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여고에, 아들은 남고(에 가까움)에 입학했고, 학원은 같은 곳에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생이라서 방과 후 학원을 가니까 둘이서 데이트 가능한 시간은 방과 후 시간이 맞으면 30분 정도 같이 저녁 먹는 시간과 주말에 비어 있는 시간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어려운 시기에 서로 격려하며 잘 지내보라"고 했다.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길 나이구나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들의 첫사랑의 시작을 듣고 1달이 지난 어느 날, 아들의 표정이 안 좋았다. 

"왜, 싸웠니?" 내가 물었다.

"아니, 우리 사이 엄청 좋아."

"근데, 왜 그렇게 울상이야?" 내가 또 물었다.

"우리 만날 수 없어?" 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같은 지역에 사는데 왜 못 만나? "

"그 애 아빠가 너무 엄격해서 저녁에도 학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직행해야 하고, 학원 없는 날엔 저녁 8시 전까지 귀가해야 하며, 귀가까지 어디에서 무얼 했는지 아빠에게 일일이 다 보고해야 해. "

순간 조선시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요즘 시대에 이런 아빠가 생존하는구나!


나는 (내 과거 경험을 토대로) 데이트 방안을 제시해 주었다.

"주말에 도서관이나 커피숍에서 같이 공부하면 되잖아."

"그 아빠가 누구랑 공부하냐고 물어."

"그러니까 여자 친구한테 친구 한 명 데려오라고 하고, 너도 친구 한 명 데리고 가서 4명이서 같이 공부하면 되잖아. 그러면 그 아빠에게 친구랑 공부할 거라고 말할 수 있고 말이야."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3개월쯤 되었을 때였다. 방에서 나온 아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 있니?"

"헤어졌어."

"왜, 무슨 일로?"

"내 불찰로. 시험 준비하다가 지쳐 잠들어, 전화하지 못해서. 그것도 며칠간 계속."

작별 선언은 그녀가 꺼낸 것이었다. 


아들이 주섬주섬하는 말을 꿰매어 보니 그림이 그려졌다. 여친은 남친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전화해서 "잘 자"라는 말을 기다렸건만, 이 놈의 남친은 숙제하거나 시험 준비한답시고 책 보다 꼬꾸라져 자버리기 일쑤였다. 하루도 아닌 몇 번 그런 일이 생기니 열받을 만도 하지. 큰 것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전화 한 통 해서 "잘 자"라고 하면 될 일을. 


"미안하다! 이 놈은 공부하다 불도 못 끄고 그냥 쓰러지거든. 너에게 무관심한 게 아니라 그놈의 습관이 널 아프게 했구나"라고 마음속에서 사죄를 하건만 이 엄마 마음이 그녀에게 전달될 리 만무하다. 만약 나의 사죄가 그녀에게 전해진다면 내게 "아들을 이따위로 키웠냐고" 욕할지 모르겠다.


"엄마, 나 평생 걔만큼 말이 잘 통하는 여자를 못 만날지도 몰라."라며 이별을 무척이나 슬퍼했다. 그리고 자신이 시간 관리를 잘 못해서 여자 친구를 챙기지 못한 점에 반성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헤어질 권리가 있어. 아프지만 보내줘"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학업과 여자 친구, 병행할 수 없을 것 같으면 먼저 학업에 집중하고 나중에 여자 친구 사귀면 어떠겠냐고 제안했다. 자신도 그러는 게 좋겠다고 했다.


헤어진 후 반년쯤 지나, 생일날에 그녀한테서 생일 축하 메시지가 왔다고 아들이 기뻐했다. 남자 친구로서는 별로였지만 친구로서 괜찮은 너였다는 말을 건냈다고 웃으며 전해 주었다.




대학 2학년이 될 무렵,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겼다. 전 여친과 전혀 다른 스타일인 같은 과 친구라고 했다. 그렇게 외모를 가꾸지 않고, 반 친구들을 잘 챙기며,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는 아이라고 했다. 그 여친에게서 배울 게 많다고 하며 이 만남이 오래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아들. 


아픔이 없는 성숙은 없다. 지난날의 아픔이 자신을 검토하게 했고 자신에게 맞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만남의 소중함을 일깨워 줬으리라 생각한다. 




세상에는 남자와 여자, 반반씩 존재한다. 우리는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전생이 존재한다고 한들 우리는 기억할 수 없기에 일단 이생에 한해서만 말하자.) 이성을 이해하고 배운다는 것은 이 세상을 원만하고 풍요롭게 살아가기 위한 필수 조건일지도 모른다. 아들은 지금 그 중요한 필수 과목을 이수하고 있는 것이다. 제대로 학점을 받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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