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 이야기 (필리핀 여행기 1)

구름 위에서 시작된 여름

by 바람처럼

서랍 속 오래 접혀 있던 이야기 하나를 꺼냈다.

그날 우리는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집을 나섰다.

도시는 아직 잠들어 있었고, 가로등 불빛만 길 위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공항에 도착해 11번 게이트를 지나 탑승했다.


구름을 뚫고 날아가는 동안 문득,

“아, 구름을 탄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겨울이라 모두 가벼운 옷차림에 외투 하나쯤 걸치고,

약간은 떨며 출발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이곳은 완연한 한여름이었다.

도착과 동시에, 공기부터 달랐다.


“아, 정말로 필리핀에 왔구나.”


공항에서부터 이국의 체험은 시작되었다.

짐 검사를 받으려는데, 검사원이 슬쩍 “10달러”를 말했다.

일행이 모른 척하자 그 자리에서 짐을 몽땅 풀기 시작했다.

결국 10달러를 건네자, “오케이, 오케이~” 하며 웃는다.

이곳의 현실이자 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신호 같았다.


파빌리온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창밖으로 보이는 마닐라의 거리 풍경을 바라보며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곳의 연평균 기온은 27도에서 30도.

일 년 내내 더운 날씨 속에서도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는데, 우리는 마침 건기 한복판에 도착한 셈이었다.

가이드의 말처럼 지금이 여행 오기 딱 좋은 시기였다.

우기엔 하루에도 몇 번씩 소나기가 쏟아진다고 했다.


짐을 정리한 뒤 가까운 리잘공원을 찾았다.

이곳은 필리핀의 독립 영웅 호세 리잘이 스페인의 식민 통치 아래 처형당한 장소다.

우리나라의 안중근 의사처럼 깊이 존경받는 인물이라 한다.

그의 죽음은 필리핀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외국 공관원이 필리핀에 부임하면, 공식 업무 시작 전 꼭 이곳에 헌화를 한다고 했다.

우리의 국립묘지와 비슷한 상징인 셈이다.


공원 옆에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 요새로 쓰였던 산티아고 요새가 있었다.

호세 리잘이 사형 직전까지 머물렀던 감옥이 바로 이곳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걸었던 길—

요새에서부터 사형 장소인 리잘공원까지의 거리를 따라,

‘발자국 동판’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용히 그 길을 걸으며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 땅의 시간, 이 땅의 사람,

그리고 이 먼 곳까지 나를 데려온 인연들에 대해.


리잘공원을 나와, 시내 관광이 이어졌다.

마닐라의 풍경 속을 걸으며 필리핀 사람들과 그들의 삶을 조금씩 체험하게 되었다.


한때는 우리보다 잘 살았다는 나라.

그러나 70년대 이후 경제가 멈춰 섰고, 지금은 여러 지표에서 우리보다 뒤처졌다고 한다.


거리에는 어린 꼬마들이 “원 달러!”를 외치며 뒤따랐다.

리잘공원에서도, 마닐라 시내 곳곳에서도.

눈만 마주치면 우르르 몰려든다기에, 나는 일부러 하늘만 보며 걸었다.


파란 하늘은 아무 말도 없고,

구름만 조용히 따라왔다.

그런데도 신기한 건,

이곳 사람들의 얼굴엔 맑은 기운이 감돌았다는 것.


미소는 순수하고, 눈빛은 상냥했다.

행복은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이 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한국보다 더 높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시 멈춰 생각에 잠겼다.


행복은 소유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에서 오는 것 아닐까.


마지막 코스는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식당.

익숙한 맛, 삼겹살로 저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

이제야, 조금 잠이 올 것 같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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