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여행기 2)따알 화산을 찾아서

같은 땅, 다른 세계

by 바람처럼

아침 6시에 기상. 호텔 1층에 내려가 뷔페식 아침을 먹었다. 각자 식성대로 담은 접시엔 익숙한 음식과 낯선 메뉴가 나란히 놓였다. 설렘이 입맛을 당긴다.


식사를 마치고 따알(Taal) 화산으로 향했다. 현지 발음은 ‘따가이따이’에 가깝다고 한다.


가는 길, 다시 한번 마닐라 거리를 둘러본다. 미국 대사관 앞에는 끝도 없이 늘어진 줄이 보였다. 가이드가 말했다.

“저 줄에 서는 게 이 나라 사람들의 꿈이에요. 비자를 받아 미국에 가는 것, 그게 희망이죠.”


못 사는 것도 서러운데, 그 희망조차 제한적이다.

길어야 5년짜리 비자.

우리는 10년짜리도 받고, 더 잘 사는 나라는 비자조차 필요 없다니.


이 나라 역시 빈부 격차가 심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어려운 삶을 살지만, 부유한 사람들은 바다 위에 보트를 띄우고 해상 파티를 연다. 같은 땅, 다른 세계.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지프니(Jeepney).

이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교통수단이다. 시계조차 만들지 못한다는 이 나라에서, 외국에서 들여온 중고차 엔진을 개조해 만든다. 뒤쪽을 덧붙여 승객을 태우고, 알록달록하게 장식한 차체는 거리의 상징처럼 느껴졌다.


우리도 직접 타 보았다. 매연과 소음이 대단했지만, 그것조차 이 나라의 생생한 일상이었다. 약 15~16명이 타는 이 차는 요금을 앞에서 받아 뒤로 전달하는 구조인데, 그것마저 귀찮다며 되도록 뒤쪽부터 타려 한다는 말에 웃음이 났다. 이 나라, 참 정겹다.


지프니를 타고 호수 근처에 도착하니, 보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따알 화산으로 향하는 길목. 활화산으로 분류된 이 화산은 지금도 활동 중이라 언제 폭발할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 말도 맞는 것 같다. 등골이 찌릿 했다.

한국 사람들만 꾸역꾸역 몰려든다며 현지인이 고개를 젓는다는데… 하긴, 터지면 같이 사라질 테지만.

그전에 한 번쯤은 가봐야지.


용감한 자만이 보는 풍경이 있다지.

겁쟁이는 아마, 지금도 숨 쉬는 화산을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 번쯤 보고 싶었다.


아래 보이는 호수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올라오는 길에도 여기저기서 열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대지는 살아 있는 짐승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경치는 아름다웠다.

공기도 맑았다.

정상에 올라 코코아 열매를 잘라 즙을 마셨다.

달고 씁쓸한 맛이 목을 적셨다.


나와 함께 온 꼬마는 열네 살이라 했다.

내 눈에는 열 살도 안 되어 보였다.

말을 타고 오르는 내내 뒤에서 재잘재잘

영어, 한국말, 필리핀 말을 섞어가며 떠들었다.


아리랑에 무궁화 노래까지 불러 젖혀

우리는 끝내 웃고 말았다.

선크림과 모자로 무장한 우리와 달리

그 아이는 거의 맨몸이었다.

햇볕 아래에서 자란 아이.

마음도 환해 보였다.


학교가 없던 마을에

얼마 전 초등학교가 하나 생겼단다.

교육이 희망일 수 있다는 걸

그 아이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내려오는 길, 다시 말을 타고

호수를 건너

지프니를 타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사람은 어디서든 세끼를 챙긴다.

먹기 위해 사는 건가,

살기 위해 먹는 건가.

혼자 웃었다.


뒤편에서는 보컬팀이

기타와 타악기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Yesterday”와 “사랑해”.

연주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고

우리는 10달러를 건넸다.


저 호수 아래 작은 활화산은

지금도 땅속 깊은 곳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겠지.

잘 있어라.

영원히 솟아오르지는 말거라.


돌아오는 길,

가이드가 말했다.

지프니 운전은 한때 선망받는 직업이었다고.

이곳에서는 새가 아내를, 말은 애인을 뜻한다는데

차 앞에 말 장식을 여러 개 달고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말의 숫자가 애인의 숫자라나.

믿거나 말거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고

전문직도 여성이 많다고 했다.

형편이 나은 친척이 있으면

사돈의 팔촌까지 함께 산다 한다.

받아준다니

대단한 인심이다.


노변에서 잠시 맥주를 마셨다.

꽃을 사라며 달려드는 아이들.

정신없지만, 예뻤다.


뜨겁고, 가난하고, 시끄럽고,

그래도 이상하게 정이 가는 곳.


그곳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서

조용히 끓고 있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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