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의 기억

밭주인은 누구

by 바람처럼

메밀꽃 피었는데 메밀은 없다

허공에 새들이 수다 떨면

하얀 꽃이 푸른 들로 흩어진다


들판 끝, 우리 집 작은 매화밭

참새, 오리, 황새까지

날마다 줄 서는 하늘의 손님들


보리를 심어도 보리는 없다

보리 냄새만 바람에 날리고


고추가 붉어지기도 전에

한 입씩 맛보며

가족과 친구를 불러들이는

저놈들의 유쾌한 의리


울할매는 오늘도 밭을 지킨다

햇살에 작아지고

바람에 더 작아진다


그늘 한 점 없는 벌판에서

새들의 재잘거림만 커진다


할매는 하루에 몇 번씩

숨을 꾹 눌러 삼키고

새들은 입 가득

밭 한 채를 털어 넣는다


2부. 새의 시선


우리는 밭을 기억한다


우리는 기억한다

매일 떠오르는 아침 냄새

보리의 숨결과 고추의 붉음이

바람에 퍼지기 전

먼저 맛보던 것들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땅을 가꾸는

작은 노인의 이름을

그녀가 허리 굽히며

심고 따는 이유를,

우리는 배부르면

떠나갈 뿐


우리는 모여들었다

참새, 오리, 황새까지

입안 가득, 날개 가득

뜨거운 햇살 아래

늘 있는 것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점점 작아졌다


한 번쯤,

멈췄어야 했을까

언제부턴가

밭은 우리가 먼저 떠오른다

그녀는 그림자처럼

느려졌다


오늘도 우리는 기억한다

다 익기도 전 먹은 고추 맛

그늘 없는 들판

말라가는 발소리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날게 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잊는다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우리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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