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은 없고 명예만이 있는, 프랑스 마지막 결투 재판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2021), 리들리 스콧 감독
참혹한 백년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4세기의 프랑스는 전쟁의 광기와 전염병으로 인한 혼란으로 가득한 권력과 야만의 시대였다. 이 시대의 여성은 귀족이라 할지라도 법적 지위를 보장받지 못하고 남편의 소유물 내지는 후사를 위한 도구로 취급되었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는 당시 중세 관습의 본고장인 노르망디 지역에서 한 강간 의혹 사건을 두고 열린, 프랑스의 마지막 결투 재판을 다룬 영화이다.
▲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마르그리트 드 카르주가 말하는 진실
이 영화는 총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장의 이름은 '장 드 카르주가 말하는 진실'이며, 이후 이어지는 그의 친구 '자크 르 그리'와 장의 아내 '마르그리트 드 카르주'가 말하는 진실이 각각 2장, 3장이다. 즉 같은 시간 동안 벌어진 일들이 각자의 시선에서 되풀이되며, 그에 따라 사건의 조각이 맞춰지며 진실이 드러나는 전개 방식을 취하고 있다.
2장까지 영화를 본 관객은 명백한 강간 장면에 결투 재판에서 장이 자크를 처단하고 정의를 실현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리고 3장, '마르그리트 드 카르주가 말하는 진실'이 이어진다. 3장의 시작에는 가문 간의 거래 대상으로서의 마르그리트가 있다. 부유하지만 국왕을 배신한 과거가 있는 그녀의 아버지는 명예를 위해 딸을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의 장과 결혼시킨다. 그녀는 그렇게 지참금과 함께 팔려 마르그리트 드 카르주가 된다.
다음으로는 우리 안의 암말로서의 마르그리트가 등장한다. 어느 날 장은 그녀에게 교배를 위해 사 온 혈통 좋은 암말을 소개한다. 아름다운 암말은 좋은 품종의 새끼를 가득 낳아야 할 운명이다. 이때, 발정 난 수말 한 마리가 암말에게 달려들자 장은 삽을 들고 말들을 내려친다. 가차 없이 휘두른 삽에 피투성이가 된 채 서 있는 암말은 강간당한 직후 분개한 남편에게 잠자리를 요구받은 마르그리트의 뒷모습과 닮아 있다.
▲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오프닝 영상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나도 같은 일을 당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 대가로 무엇을 얻으셨나요?"
"살아남았지."
"너무 큰 것을 희생하고 살아남으셨군요."
마지막은 고발자로서의 마르그리트이다. 모두가 집을 비운 사이 자크에게 강간당한 그녀는 그에게 침묵을 강요받지만,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자크를 단죄하기 위해 침묵하는 대신 재판장에 선다. 잘못된 사상과 지식으로 인한 의심과 모욕, 그리고 중세 귀족 여성의 표본인 시어머니의 비난 속에서 수치심을 억누르고 고개를 든다.
▲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승리자만이 추앙받는 싸움의 시작
당시 여성에 대한 강간죄는 남성의 재산 침해죄에 해당했기에, 장이 자크와의 결투 재판에서 패배하면 그의 아내 마르그리트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지게 된다. 자크를 무너뜨리고 명예를 회복하기를 원하는 장은 의도적으로 이를 그녀에게 함구한 채 자크에게 결투 재판을 신청한다. 자크 역시 강간이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결투를 받아들이며 명예라는 허상과 목숨이라는 실재를 건 프랑스의 마지막 결투 재판이 성사된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팔려 온 그녀는 또다시 명예를 위한 두 남자의 싸움의 명분이자 희생양이 되었다. 창과 창이 부딪치고 피가 땅을 적시는 토너먼트.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결투 재판을 표방하지만, 진실은 승리자에게 따라오는 전리품에 불과했던 야만적인 중세 기사도의 민낯. 쇠고랑을 찬 채 두 남자를 지켜보는 마르그리트의 복잡한 눈동자 때문일까? 숨 막히는 결투가 어쩐지 짜릿하기보다 씁쓸하게 느껴진다.
▲ 영화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 포스터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영화가 끝난 뒤 포스터를 보면 꽤나 의미심장한 배치를 발견할 수 있다. 장과 자크의 어깨에서 뻗어진 두 개의 검은 겉으로 보기에는 두 남자의 결투를 표현한 오브제에 불과해 보이지만, 마르그리트를 중앙에 배치함으로써 두 사내가 뻗은 두 검이 그녀의 몸을 관통하도록 만들었다. 마치 영화의 모든 것을 하나의 이미지로 암시하는 듯하다.
여러 저술에서 이 사건이 마르그리트의 착각으로 인한 잘못된 고발이라고 서술된 탓에, 많은 역사가들이 위 사건을 자크의 무고 사건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중세 문학 연구자 에릭 재거는 사료 연구가 결여된 학계에 반론을 제시하며 역사 소설 <라스트 듀얼: 최후의 결투>를 출간했다. 자, 이제 다시 한 번 포스터를 보자. 그들의 사업에 이용되고, 욕망에 짓밟히고, 끝내 승리자의 전리품으로 전시된 그녀가 괴로운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