겐마이차와 유자차_겨울밤, 우리만의 추억

by 산토샤

외갓집 안방에는 외할머니의 세월만큼이나 바랜 몇 장의 사진이 제각각의 액자에 끼워져 걸려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주인공이다. 아니, 사실은 외할아버지의 환갑잔치 사진이니 외할아버지가 주인공인데 내가 센터를 차지한 데다가 차려입은 한복에 족두리까지 영락없는 내 돌잔치 사진이다.


외할머니,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면 압도적으로 그 계절은 겨울, 그리고 밤이 많다. 분명 겨울밤인데 그때를 떠올리면 알 수 없는 훈훈함이 함께 느껴지는 이유는 두 분과 함께 자글자글한 시골집 온돌방 아랫목에 엉덩이를 지지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기나긴 겨울밤 외할머니가 들고 오신 구운 가래떡이나 고구마를 내복 소매에 감아 들고 후후 불던 기억 때문일까? 혹은 손녀딸이 추울라 밤새 양쪽에서 덮어주던 솜이불을 땀을 쪽 흘리며 걷어차던 기억 때문일까?


하나씩 되돌아보니 글을 쓰면서도 점점 입꼬리가 올라가는 그 행복한 장면들 속 떠오르는 소리와 향의 기억. 바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나 이렇게 셋이 하는 겨울밤 티타임. 삑삑~ 주전자가 물이 다 끓었다는 신호를 보내면, 외할아버지는 당시 일본에서 유학하던 이모들이 가져온 벽돌 빛 큐스(일본식 옆손잡이 다관)에 겐마이차(녹차에 볶은 현미를 섞은 일본식 현미녹차)를 우리셨고, 외할머니는 '아서라 아가, 뜨거우니까 손대지 말어!' 하며 샛노란 유자청이 반쯤은 들어있던 화려한 무늬의 머그잔에 물을 부으셨다. 그리고 꽃무늬 손잡이가 달린 스텐 티스푼을 하나 꽂아 휘휘 저어 호호호 불어 내 앞에 놓아주시면, 흠~ 유자차 냄새!


시간이 흘러 더 이상 외할아버지도, 따끈한 아랫목을 누리던 한옥집도 남아 있지 않지만 오랜만에 함께 나란히 누워있던 외할머니는 오늘도 흥얼 흥얼 트로트 프로를 보시다가 휘뤽 나가셔서는 유자차를 두 컵 내어 오신다. 뒹굴뒹굴 누워있다 손만 뻗어 유자차를 받아 들어 한 모금 후룹! 마시고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외할머니도 나처럼 유자차를 마실 때 겐마이 차의 향이 함께 느껴지실까?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괜스레 늘 외할아버지가 기대어 손 흔드시던 창틀을 한번 바라봤다. 그리고 또 괜히 외할머니 품에 코를 깊숙하게 박고 파고들어 본다. 흠~ 유자차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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