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

by 재인

드디어 정시 발표일이다. 수능이 끝나고 벌써 석 달째다. 이제 마침표를 찍는구나. 원래 발표 예정 시간은 2시인데 아침에 남편이 욕실에서 나오며 발표가 난 거 같다고 했다.


나는 잠시 어젯밤 좋은 꿈 꿨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잠은 잘 잤는데 꿈에 아이의 검은색 속옷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왠지 좋은 꿈이 아닐 것 같은 느낌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좋은 꿈은 맞지 않는 거 같은데 이런 나쁜 꿈은 꼭 맞는다.

우리는 아이가 수능을 망치고 재수한다고 해서 일단 원서 쓰고 결과를 보고 결정하라고 했다. 원서를 쓰는 것조차 싫어해서 간신히 설득해서 원서를 썼다. 나랑 남편이 의논해서 그나마 최선의 선택을 하긴 했는데, 아이 성적보다는 운을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했다. 아이 성적에 맞는 학교는 아이가 강하게 거부해서 쓸 수가 없었다.


막상 이런 결과가 나오자 나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재수시키기로 했다. 그래 좀 천천히 가도 되지 뭐. 그렇게 나 자신을 다독이면서.


그동안 입시를 준비하면서 있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갑자기 정신의학과에 가고 싶다고 해서 놀랐던 일,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집에서 혼자 공부하겠다고 해서 아빠랑 다투었던 일, 친구들과 자전거 타다가 다쳐서 밤늦게 응급실에 갔던 일, 말 한마디로 시작된 싸움으로 이틀 동안 냉전을 겪었던 일까지.

나는 집에서 작년부터 거실에서 TV를 보지도 못했고, 오전에 루틴처럼 듣는 라디오도 들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부엌에서 요리할 때도 웬만하면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스터디카페에 가서 공부하면 좋을 텐데. 굳이 집에서 공부하는 아이를 원망하기도 했다.


아이의 합격 소식이 이 모든 일의 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히 합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그렇게 생각한 거 같다. 불합격 소식을 알게 된 후 우리 집은 누가 하나 소리 내면 바로 터져 버릴 듯이 일촉즉발 상태였다.

아이는 재수하고 싶다고 내내 외쳤으면서도 내심 기대를 했었나 보다. 많이 실망했는지 소식을 듣고는 잠깐 외출한다고 나가서 늦게 귀가했다. 밤늦은 시간, 아이는 대뜸 재수하기 싫다고, 군대 간다는 말을 한다.

오, 마이 갓! 정신이 나갈 것만 같다. 재수시키기로 하고 마음을 잡고 견디고 있는데 군대라고? 하하

수능이 끝나고 거의 두 달 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내다 보니 이제 현실 파악이 되었나 보다.

나까지 나서면 정말 싸움이 될 거 같아 일단 아이를 재웠다. 밤새 편두통이 나를 괴롭혔다. 아이의 성적은 내 성적표가 아닌데 왜 이렇게 내가 실패한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혹시 그동안의 기도가 부족했을까? 간절함이 없었나? 좀 더 살뜰하게 챙겨주었어야 했나? 너무 많은 생각들이 오가고 왠지 나에게 너무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도 밀려오고 속이 상하니 눈물도 났다.

한참을 그러다 얼마 전 읽은 “오십에 읽는 주역”이란 책에서 본 한 구절이 기억났다.


“끊임없이 비우고자 하면 끊임없이 채워질 것이다. 간절히 바라는 염원은 집착인 것이다.”

간절히 바라는 염원도 집착이란 말에 뭔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구나,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하는데.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구나.


그래, 내려놓자. 다시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


저녁에 퇴근하고 오니 아이가 치킨을 시켜 놓았다. 같이 앉아 맥주 한잔에 자연스럽게 얘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말하기 전에 아이가 먼저 어떻게 재수 공부를 할 건지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아이는 다시 공부한다고 말하는 것이 미안한 눈치다.

나는 내가 생각한 계획에 대해 몇 마디 했다. 이번에는 어떤 과목을 공략하고 수시도 잘 알아보고 전략을 짜서 원서를 쓰자고.


TV에서 보는 다정한 아들과의 그런 대화는 아니었지만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았으니 이만하면 괜찮다 싶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혹시나 하는 기대로 몇 달을 가슴 졸이고 기다렸다.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래도 잘 온 거 맞겠지?


내일은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이다. 긴 겨우 내내 긴장하고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펴고 아직은 많이 이르지만 봄을 맞이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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