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0일에 달하는 마치 휴가와도 같은 긴 추석 연휴를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고3 아들과 마음을 같이 한다는 뜻으로 올해는 여행을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기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구병모 작가 책 3권 읽기, 미술관 가기,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 정주행 하기가 계획이라면 그랬다. ‘은중과 상연’은 본 사람들 사이에서 잔잔하면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데다 남편이 강력 추천한 드라마였다. 우리 남편은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눈이 평론가 못지않게 날카로우면서도 정확하기 때문에 믿고 보는 편이다. 그래도 대강의 줄거리는 알고 있어서 약간 어린 시절이나 학창 시절의 향수를 자극하는 드라마가 아닐지 생각했다.
우선 어린 시절 추억을 불러온 건 맞았다. 90년대 거리, 학교, 그때 간혹 있었던 부모님의 직업이나 학력으로 아이를 차별하는 선생님의 모습, 그 당시 수학여행의 추억 등이 나는 이 드라마 속 배경보다 더 이전 세대이지만 공감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었다.
초반에는 은중의 마음에 몰입해 드라마를 지켜봤다. 초등학교 시절 소위 잘 사는 집 아이들에 대한 동경, 나는 최선을 다하지만, 모든 것을 잘하는 너는 죽어도 못 이길 것 같다는 열등감, 언제든 내 자리를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 등에 감정 이입되었다. 은중과 마음을 함께 하며 같이 속상해하고, 울기도 하고, 같이 화내며 드라마를 따라가다 보니 상연의 마음이 점점 더 이해가 가지 않고 언제나 본인의 자존심만 중요한 상연이 많이 미웠다.
하지만 상연의 입장에서 보면 부모에게서든, 친구에게서든 사랑받은 적이 없으니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조차 좋은 일이 되지 못하고 집착이 되어 버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자연스럽지 못하게 된 것 같다. 자신의 고통을 남에게 보여주기 싫어 자존심을 앞세우지만 결국 다치는 건 본인일 뿐. 그래서 언제나 혼자인 상연이 미우면서도 안타깝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 드라마는 10대에는 가정환경으로 인한 부러움이나 부끄러움의 감정을, 20대에는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성과의 관계들, 그 속에 자리한 질투, 집착, 배신 등의 감정들, 그리고 30대에는 본인의 일과 관계된 성취욕, 좌절, 모순, 불합리한 사회구조 같은 모두가 느끼는 그런 감정들의 포인트를 잘 집어냈고, 여자들이 가지는 관계에 대한 미묘하고도 섬세한 감정의 선을 너무 잘 표현한 것 같다.
어느새 “은중과 상연”을 따라 40대가 되고 죽음을 앞둔 상연 앞에서 은중은 결국 무너지고 상연을 다시 받아줄 수밖에 없다. 은중과 상연은 서로가 가지지 못한 부분에 대해 서로가 열등감을 가지지만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사랑받는 은중은 그 마음을 잘 다독였고, 늘 혼자인 상연은 그 감정을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본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무엇을 풀어야 하는지조차 몰랐던 것 같다. 그래서 본인의 자존감은 없고 자존심만 내세운 게 아닐까 생각되었다.
서로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다 보면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로는 잘 표현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마음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하기도 하는데.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대화를 하지만 어쩌면 서로의 대화 속에서 오해가 더 깊어지는 것은 아닐지. 그만큼 관계가 어렵기도 하지만 간혹 사소한 행동, 가령 상대방의 물건이 땅에 떨어졌을 때 얼른 주어서 자기 옷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쓱쓱 닦아서 물건을 건네줄 때 우리의 마음은 몇 시간의 대화보다 더 깊은 이해가 생기기도 하는 것 같다.
이틀간의 정주행을 끝내고 또 이틀 동안 ‘은중과 상연’에 빠져있었다. 내가 살아온 길을 반추해 보기도 하고 내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인생에 정답은 없다.
구병모 작가는 “절창”에서 말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인간들과 혹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나 자신과 필연적으로 상종하거나 공존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자 태초부터 운명 지어진 비극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한없이 어려운 게 우리의 삶이지만 저 먼 우주 은하계에서 보면 티끌조차 못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딱히 어려울 게 없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