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에 눈을 뜨게 된 건 40대가 지나서이다. 나를 그 세계로 인도한 것은 아줌마들의 성 판타지라 불리는 E.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라는 책이었다. 처음부터 이 책에 대해 알고 책을 읽게 된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이 책의 1권(파트 1로 총 2권)을 빌리게 되었고 아무 생각 없이 읽었다. 그리고 홀린 듯이 2권(파트 2로 총 2권)을 빌리러 갔다. 밥 먹는 시간도, 자는 시간도 아까워 단숨에 2권까지 읽었다. 책을 읽으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다시 3권을 빌리러 갔다. 하지만 아직 국내에는 3권이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아마 10~15년 전이었을 거다.) 나에게는 그 말이 무슨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책에 대해 모든 정보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책방 사장님 말대로 3권은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고 지금 번역 중이라고 했다. 아. 그러면 원서로는 있다는 얘기구나. 나는 하나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당장 원서를 주문하기로 했다. 다행히 해외 주문이 아닌 국내에서도 원서 주문이 가능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드디어 며칠 뒤 책이 나에게 도착했다. 서둘러 책을 펴고 읽기 시작했다.
참고로 나는 학원 영어 강사이다. 하지만 아이들 동화책이나 교과서 이외에는 원서 따위를 읽어 본 적이 없다. 당연히 책이 잘 읽힐 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한 페이지를 읽는 대에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래도 좋았다. 너무나 답답한 속도로 책을 읽어나가고 있었지만, 그의 문장이 내 해석으로 나에게 오는 과정이 뿌듯하고 뭐라 말할 수 없이 벅찼다. 그의 말을 내가 알아들었을 때는 짜릿하기도 했다. 번역본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나를 계속 책을 읽게 했다. 그렇게 57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다 읽었을 때는 계절이 가을에서 겨울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나도 바뀌어 있었다. 드디어 성에 눈뜬 40대 아줌마로. 책을 읽으며 느꼈던 전에 알지 못했던 많은 감정이 내 안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30대에 출산하고도 오르가슴에 대해 몰랐던 나의 무지에 개탄하며 점점 밤의 재미를 알게 되었다. 남편은 이런 나의 변화를 반기는 눈치였다. 덕분에 우리 관계도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책이 끝난 것이 아쉬워 나는 앞서 읽었던 1. 2권의 책도 다시 원서로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1권을 읽을 때는 3권을 열심히 읽어서인지, 이미 내용을 알고 있어서인지 3권을 읽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겨울에서 봄으로 또다시 계절이 바뀌고, 해도 바뀌는 시간 동안 나는 원서에 푹 파묻혀 지냈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자, 나는 성에만 눈을 뜬 건 아니었다. 원서라는 재미에도 눈을 뜨게 되었다. 이후에 내가 읽은 원서는 대략 20~30권 정도 된다.
그해 겨울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또 다른 이유로 잊지 못할 따뜻한 겨울이기도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유치하다고 10대에도 보지 않았던 판타지 로맨스 소설에 왜 그렇게까지 빠져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의 어떤 결핍이 나를 그 소설로 이끌었는지도. 하지만 정말이지 우연히 읽었던 책을 시작으로 내 인생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내가 학원강사로 영어를 계속 가르칠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조금 야한 소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레이가 하는 행동의 근원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를 이해하게 되고, 사람을 이해하게 되고, 관계를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책은 내 최애의 책이다. 가끔 책의 어느 부분을 펼쳐도 그 내용이 생각나고 그 부분을 읽었을 때의 감정 또한 소환된다.
내가 40대에 성에 대해 알게 되었고, 원서를 읽으며 영어 실력을 쌓게 된 것이 우연한 책 한 권 때문이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나만의 비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