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된 드라이기

by 의미

2016년부터 테팔 컴팩트 프로 헤어 드라이기를 사용했다. 2018년 기준으로 3만 원이면 살 수 있었다. 중량은 700g, 크기는 동그랗게 말아놓은 수건과 같은 크기다. 드라이기 바람 배출구는 홈을 맞춰 드라이기 본체에 고정시키는 조립식이다. 3단계 바람온도 조절버튼, 2단계 바람세기 조절버튼이 옆을 향하게 붙어있고, 냉풍 버튼이 앞을 향하게 붙어있다.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드라이기는 하나 있어야 했고, 어머니는 좋은 브랜드의 드라이기를 사서 기숙사에 보냈다.


언제나 온도와 세기 모두 3단계에 고정이었다. 강력한 바람과 머리 한쪽에 뜨거울 정도의 온도 덕분에 머리 말리는 건 5분도 걸리지 않았다. 기숙사 첫날 룸메이트들과 이야기하던 날도, 룸메이트와 싸워 완강히 말을 하지 않던 날도, 내신 성적을 올리려고 샤워하면서 머릿속으로 국어 시 해설을 외우던 나날도, 전교 10등권 성적을 받아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던 날도, 할 일에 치여 옆 사람의 눈물에 반응하지 못했던 날도, 수능이 끝나고 텅 빈 교실에서 친구 두 명과 영화를 보던 날도, 모든 날 아침에는 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렸다. 요란한 드라이기 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눈을 감고, 손으로 터는 머리카락에만 집중하며 몇 분 동안은 성적, 과제, 다른 사람을 잊을 수 있었다. 나에게 머리 말리는 시간은 숨을 고르는 순간이었다. 8년째 매일 아침 전선을 풀어쓰던 테팔 컴팩트 프로 헤어 드라이기, 어느 날 머리를 말리던 중 플러그 쪽 전선이 끊어져 기능을 상실했다.


전선이 끊어진 지 3개월 째인데도 드라이기는 아직 방 안에 있다. 끊어진 날은 사진을 찍어놓았다. 한 달 뒤에 자취방 계약이 끝나고 방을 비울 때는 버려야 했다. 언젠가는 버려야 한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8년 동안 손에 익어온 물건을 바로 버린다는 건 힘들었다.


새로운 드라이기를 가져와서 쓰기 시작했으면서도, 테팔 헤어 드라이기는 여전히 신발장에 놓여있었다. 주변에서는 그냥 버리라고 했다. 물건에 정이 들어서 버리기 힘들다고 말하니 다시 그냥 버리라고 들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사람이 물건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한다고 한다. 같은 물건이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생각하는 값보다 더 비싸게 그 물건의 값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행동경제학에서는 물건을 잃는 걸 피하려는 인간 본성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새롭게 가지려는 사람의 마음보다, 이미 가져서 잃기 싫어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다.


그렇다면 3개월 전에 기능을 상실하여 값어치가 없는 이 드라이기를 버리지 못하는 건 왜일까? 아무도 사지 않을 고장 난 드라이기. 전선이 끊어진 8년 된 드라이기. 교환가치를 상실한 미용제품을 나는 왜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걸까?


3개월 된 어느 날, 나는 테팔 드라이기를 버렸다. 홈을 맞춰 끼우는 주둥이는 플라스틱에 재활용하고, 드라이기 몸통은 다른 드라이기가 버려져 있던 구석에 두었다. 이번주 건물 관리인이 건물 앞에 내놓고 재활용품수거원이 가져가면 앞으로 없어지는 것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테세우스의 배'라는 철학적 논쟁거리가 등장한다. 테세우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아테네 영웅이다. 그는 크레타섬의 괴물 미노타우르스를 물리치고 아테네로 돌아온다. 아테네 인들은 테세우스를 기리기 위해 테세우스의 배를 보존하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배의 나무판자가 썩었다. 그래서 아테네인은 새로 구한 판자로 썩은 판자를 갈아 끼웠다. 계속 판자를 바꿔 끼우다 보면 언젠가는 그 배의 판자는 모두 교체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배를 만들 때 쓰인 판자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배는 과연 같은 배인가?


고등학교 3년, 송도 기숙사에서 1년, 연희동 자취방에서 1년 반, 신촌역 근처 자취방에서 2년 동안, 매일 아침 머리를 말리면서 숨을 고르던 일상이 생각나는 것이다. 8년 동안 쓴 드라이기를 보면 나의 아침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젠 그 드라이기를 만질 수 없고 볼 수도 없다. 그 드라이기를 봐야만 떠올릴 수 있는 매일 아침의 분위기도 기억 속에서 잃어갈 것이다.


나는 드라이기를 버리기 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매일 아침 7시 분위기와, 송도, 연희동, 신촌에서 아침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던 나는 점점 없어져 갈 것이다. 이제는 나의 8년 치 아침을 떠올릴 물건, 드라이기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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