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운동장이었다. 금천구에서 지내던 나는 자취방 근처로 친구를 불렀다. 평소에 광명시와 맞닿은 안양천 혹은 가까운 트랙운동장인 서울대 운동장에서 달리다가, 멀리 있는 학교에서 뛰어보자고 부른 것이다. 친구도 흔쾌히 차를 타고 와주었다. 자취방에 주차하고, 짐을 놓고 방을 나왔다. 같이 달리기 위해 옷을 챙겨 차를 타고 만나는 약속이라니, 건전한 청년 둘이었다.
11월 초, 저녁 6시 즈음이었다. 선선한 가을 공기 속에 연세대학교 남문 근처에 위치한 트랙 운동장에 도착했다. 이제 몸을 풀고 달릴 이야기를 했다.
목표는 완주였다. 친구는 장거리 달리기에 익숙한 터라 12km가 그려졌을 것이다. 나는 12km 달리기가 처음이었다. 최고 기록은 8km였다. 평소에 달리는 거리는 6km 정도였다. 평소 달리는 속도는 1km에 5분 30초 정도였다. 이번엔 평소 달리는 거리의 두 배이므로, 넉넉하게 1km에 6분으로 더 느리게 달리기로 정했다.
그럼 걸리는 시간은 72분 정도. 이런 생각을 하니 12km는 먼 거리였다. 1시간 12분 동안 쉬지 않고 달리는 동작을 지속해야 한다. 몸 전체로 통통 튀며 앞으로 나가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1시간 12분 동안.
목을 축이고 시작했다. 같이 달릴 때 장점은 시작하는 힘이 덜 든다는 점이다. 혼자였다면 생각이 깊어졌을 타이밍에, 친구와 시작을 맞춰야 하니, 일단 시작했다. 평소보다 더 힘을 빼고, 더 차분한 마음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정면에는 파란 트랙과 트랙 위 사람들이 보였고, 왼편에는 축구 경기장에서 축구가 한창이었다. 오른편에는 친구가 있었다.
일단 최고기록인 8km가 분기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8km까지는 내 리듬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다. '호흡과 속도를 조절하면서 내 몸상태가 어떤지 생각할 여유는 챙기면서 뛰어야 한다. 8km 까지는 달릴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면에 파란 트랙을 보며 달렸다.
'축구공이 날아오면 어떡하지, 오른편에 있는 농구장에서 농구공이 날아오면 어떡하지, 내 앞 저 사람은 잘 달리는 것 같다'라고 주변에 시선을 뺏기면서도, '이렇게 정신적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오늘 완주하기 전에 지칠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다시 정면에 펼쳐진 파란 트랙과 씁씁후 하는 규칙적인 호흡에 정신을 집중한다.
친구가 켜놓은 워치에 나이키 사의 러닝 애플리케이션이 음성으로 거리, 시간, 속도를 1km마다 알려준다. 1km, 2km, 3km... 늘어나는 거리가 들렸다.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1분에 5분 18초, 1분에 5분 05초, 1분에 5분 22초... 처음 계획은 1km에 6분 속도였지만, 생각보다 잘 달리고 있었다. 집중력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아직 몸도 무리하지 않았다.
친구와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옆에서 달리던 친구가 점점 앞서 달리기 시작했고, 나는 더 늦춰지지 않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달리기, 몸 상태, 호흡에 집중할 수 없었다. 친구를 부르며 "조금.." 하면서 손을 아래로 내리는 시늉을 했다. 조금 천천히 가자는 신호였다. 친구는 속도를 늦춰 내 속도에 맞췄다. 나는 속도를 조절하며 호흡을 잡고 집중력이 돌아올 때까지 여유를 되찾았다.
빠르게 달리는 것도 아닌, 오래 달려야 한다는 의무감. 집중력을 잃지 않고, 마음이 꺾이지 않고, 오랜 시간 동안 내 몸과 호흡을 통제하고, 통제하지 못할 상황을 위해 여유를 남겨두어야 했다.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달려보고 싶은 그 거리를 위해, 오래 달릴 생각을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나이키 애플리케이션 음성이 '달린 거리 8km'를 말했다. 나에게는 미지의 거리였다. 달린 시간은 45분 정도, 시간은 1시간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1시간은 상징적인 숫자였다. 누군가 드라마 한 편 보는 동안, 누군가 인강 하나를 듣는 동안, 누군가 예능 한 편을 보는 동안, 나는 쉬지 않고 달리고 있을 것이었다. 1시간 동안 달리고만 있었다는 사실, 나는 가져본 적 없는 경험이었다. 곧 나는 그런 경험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이제부터 목표 거리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우선 2km만 더, 10km까지 잘 달려보자.'
달리기 중반부터 왼발과 왼팔이 저릿했다. 그럴 때마다 왼다리와 왼쪽 골반을 조정하면서 왼발이 저릿하지 않은 자세를 찾으며 달렸다. 그리고 왼팔을 쭉 펴서 잠깐 아래로 떨어뜨려놓거나 뒷짐지며 저림이 없어지도록 기다렸다가 다시 굽혀 달렸다.
친구에게 속도를 낮추자는 말은 점점 자주 한다. 주변에 시선을 뺏기지 않도록 애쓴다. 앞에 놓인 트랙만 보려고 집중했다. 트랙이 눈에 익어갈 무렵, 400m 우레탄 트랙에 어느 부분에서 8km 음성이 나왔었는지, 이쯤 왔으면 운동장에 어디쯤 가면 9km가 들리겠다 생각이 들었다. 몸은 무거워졌다. 오한이 느껴졌다. 몸 안 쪽에서 올라오는 추위였다.
컨디션을 조절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속도를 조절했다. 목표는 완주다. 빨리 도달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끝까지 가느냐가 중요하다. 이미 23~24바퀴는 같은 풍경으로 돌았던 파란색 트랙만 보며 뛰었다. 옆에서 공이 날아와서 흐름이 깨지면 어떡하지 걱정했지만, 실제로 공이 날아와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한 시간째 들리는 내 발소리가 낯설었다.
'현재 거리 10km'라는 음성이 들리고, 이제 2km 만 더 가면 12km 완주였다. 정말로 1시간째 뛰고 있었다. 추위가 때때로 느껴졌다. 400m 트랙 5바퀴만 더 달리면, 지금까지 스물다섯 바퀴 달린 거리에 다섯 바퀴만 더 달리면 12km 완주였다.
1km마다 애플리케이션 음성이 나왔지만, 인내심이 떨어져 갔다. 나는 스스로 남은 바퀴수를 세었다. 목표거리가 2km 남았으니, 운동장 다섯 바퀴면 도착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바퀴수를 세면서도 금방 잊었다. 충분히 온 것 같은데 왜 11km 음성이 안 나오지 싶었다. 11km 음성이 나왔을 때도 똑같았다. 이제 몇 바퀴 안 남았다는 생각으로 달렸다. 1km면 두 바퀴 반, 트랙이 짧아 보였다. 금방 12km를 찍게 될 것이었다.
시작할 때에 비해 다리는 무겁고, 상체는 굽어졌다. 시선을 정면에 두기 어려웠고 고개를 떨궜다. 그럴 때마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멈추지만 말자'라는 생각으로, 호흡을 의식하고 내가 달리는 트랙 한 줄에 집중했다. '멈추지만 말자.' 12km라는 음성이 들릴 때까지 몸과 호흡을 통제하고, 느리더라도 달리기만 하자.
처음 시작했던 운동장 관중석 위치에서 축구 골대 뒤를 지나, 농구장을 지나, 구령대를 지나, 철봉을 지나, 조명 아래 어두운 풋살장을 지날 때쯤, 곡선 주로를 지나 직선으로 뻗은 트랙이 정면에 보일 때쯤, 처음 시작했던 지점이 정면에 보일 때쯤, 친구의 워치에서 '현재 거리 12km'라는 음성이 들렸다. 나는 속도를 늦추고, 트랙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옷과 물이 놓여있는, 처음 시작했던 지점을 향해 걸어갔다.
달리는 중간에는 그렇게 달려왔기 때문에 달렸다. 처음에는 친구가 함께 하자고 해서였다. 내 최고기록을 넘어서 달리기 시작할 때는, '조금만 더 가보자'라는 마음으로 이어갔다. 언제 도착할지 모를 때 러닝앱의 음성으로 마지막을 알게 되었다. 12km, 1시간 12분이라는 시간에도 내 마음은 여러 번 바뀌었다. 근육도, 호흡도, 주변 상황도 계속 바뀌었다.
나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친구와 함께 달려왔던 이유, 친구가 나에게 12km를 달리자고 제안한 이유, 큰 고민 없이 달리기 시작한 이유, 이걸 왜 하고 있냐고 의심하지 않고 꾸준히 달린 이유, 끝까지 가기 위해 힘들면 느리게라도 가자고 다짐한 이유, 끝까지 가보기만 하자고 달린 이유, 12km가 끝나고 나서도 달리기가 끝난 것 같이 느껴지지 않은 이유. 생각해 보면 내 달리기는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