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정원

그의 마지막 친구들, 순수한 시선

by 진민

죽음이라는 단어는 항상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매우 가까이 있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쇼마이 신지의 영화는 주로 아이의 시선에서 흘러간다. 이 영화도 3명의 아이의 시선에서 흘러간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순수한 눈빛을 따라 영화가 진행된다.


야마시타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로 영화가 시작된다. 카와베는 그 소식을 듣고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되는지, 어떤 기분인지, 장례식은 어떤 것인지 그의 순수한 호기심은 죽음이라는 단어를 맞닥뜨렸다. 그는 야마시타에게 장례식이 어떤 곳인지 물었다.



장례식이라는 곳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참 묘한 감정이 든다. 장례식은 이별을 하는 곳이다. 대체로 이별은 슬프기 마련이다. 예상치 못한 이별은 더욱더 아프게 다가온다. 어릴 때 방문했던 장례식에서는 그렇게 큰 감정적 동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감정적인 성장이 덜 이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 이별의 상대와의 유대감이 그만큼 돈독하지 않기 때문도 있었다.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하면 유대감을 쌓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나 가까운 사람과 이별을 하느냐에 따라 나의 마음속에서 감정적 동요가 일어나는 것 같다.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궁금증이 많아진 카와베는 다리 위의 난간을 걸어보면서 죽음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그러다가 카와베는 동내에 혼자 사는 할아버지를 이야기하며 그 할아버지가 곧 죽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할아버지의 죽음을 관찰하면서 죽음에 대해 탐구하기로 한다. 친구들과 그 할아버지의 집 근처에 가서 할아버지의 삶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멀리서 지켜본 할아버지의 삶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계속 지켜본다.

할아버지와 유대감을 쌓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죽는 모습을 보며 죽음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계속 찾아오는 3명의 아이가 불편한지 계속 밀어내지만 끈질기게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결국 마음의 문을 열어준다. 무성한 잡초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폐쇄적으로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그러던 그에게 이제 3명의 친구가 생긴 것이다.


그들은 집을 꾸미고 마당에 코스모스를 심으며 점점 더 깊은 유대감을 쌓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이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은 왜 할아버지가 혼자 폐쇄적으로 살고 있는지 알게 되었고,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잊힌 세월을 메꿔주려고 노력한다. 그 뒤에 내용은 굳이 적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이 영화는 이야기의 흐름보다는, 죽음이라는 것을 아이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며, 그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의 시선으로 따라간 이 영화 속에서 나는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집은 어릴 때 집에서 티브이를 안 봤다. 그래서 나와 형은 할아버지 집에 가면 꼭 티브이부터 틀었다. 할아버지 집에 가면 티브이를 볼 수 있기에 할아버지 집에 가는 것이 좋았고 더 나아가 할아버지가 좋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항상 우리 편이었다. 할아버지는 운동을 많이 하셔서 내가 초등학교 때 함께 운동을 할 정도의 체력이 있으셨다. 그렇기에 할아버지집에 가면 학교운동장에 가서 축구나 야구, 배드민턴을 많이 했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나의 마음속에서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올해 초 할아버지가 입원하셨다는 병원에 들렀다. 그때 만난 할아버지의 모습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강한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노화에 따른 신체적인 약화는 당연하지만, 그의 강했던 마음까지 허물어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 2주 정도 후에 할아버지가 계신 병원에 혼자서 찾아갔다. 가서 2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그 시간은 할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의 순간이었다. 할아버지의 몸은 나이에 따라 노쇠하셨지만 그보다 마음 아픈 건 그의 마음이 무너져 내린 걸 보는 것이었다.


노화로 인한 신체기능의 약화는 그를 병원으로 이끌었고, 죽음 앞에선 그의 마음은 누구보다 흔들렸고 힘겨워 보였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땡큐"라는 말을 건넸다. 명확한 목적어는 없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 이 감사인사를 전했다. 이것이 내가 가장 최근에 격은 이별이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나의 마음속에 강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은 분명하다.





죽음이란 무엇일까? 이별이란?

나는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죽음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것은 궁극적인 행복에 다다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죽음이라는 행위를 낙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것이다. 죽음이라는 행위가 직접적으로 행복을 주는 행위는 아니지만, 고통과 불행이 가득한 세상에서 0의 상태, 즉 허무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상대적으로 행복함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것이다.

나의 이러한 생각 메커니즘의 발생지를 돌이켜보자면 두 가지가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아버지와의 이별을 낙관적으로 바라보는 마음과 남아버린 나의 마음속에 새겨진 덧없음이라는 감정인 것 같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태연한 듯 말하지만, 사실 허무함에 다다르는 두려움이 이끌어낸 자기 방어기제라고 생각한다.


죽음이 뭔지는 사실 죽어봐야지 알 수 있다. 물론 과학적으로 우리의 신체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는 명확하지만 인간의 본체는 내면이라고 생각한다. 그 내면에서 어떠한 변화가 생기는지는 상상의 영역이다. 상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행위는 무궁무진하다. 이 영화에서처럼 나비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많은 창작물에서 죽음이라는 소재를 다루며 이에 창의력을 더해 더욱더 멋지게 혹은 더 파멸적으로 다루는 것 같다.

사후세계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 정의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삶에 진행에 있어 당연한 것 같다. 축구경기 결과를 알면서 그 경기를 풀로 다시 챙겨보는 행위는 축구 분석가가 아니면 못할 일이다. 끝을 아는 순간 우리의 삶은 파도가 치는 바다가 아니라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해질 것 같다. 고요함이라는 표현은 휘몰아치는 폭풍우 안에 있을 때 느껴지는 것이다. 결국 고요함이라는 표현도 없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끝을 필연적으로 모르고 살아가며, 그렇기에 수많은 파도와 부딪힌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이어지는 것은 이별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이라는 개념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며 그 주변인물들은 그와 이별을 한다. 이별을 잘 다룬 영화는 <데몰리션>이라는 영화가 있다. 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편이, 그의 아내와 이별해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이 영화는 좋은 이별이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을 하게 만드는 것 같다. 시간이 약이라고, 지나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연애감정에서의 이별은 물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이별은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잊는다는 것은 무뎌진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별에서 생기는 마음속에 흉터들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동시에 완전히, 영원히 아물지 않는다. 그저 이 상처에 무뎌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언제나 이 상처는 마음속에 취약점이다. 작은 터치에도 반응을 하기 일쑤이다. 이 상처를 이겨내는 법은 아직 잘 모르겠다. 나도 무뎌지는 과정을 겪는 중일뿐이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본 죽음, 나의 시선에서 바라본 죽음, 사실 둘 다 명확하지는 않다. 죽음을 바라보기에는 나도 아직 아이인가 보다. 이 아이들이 결국 가장 근처에서 죽음, 이별을 경험했고 그들은 새로운 , 수많은 감정의 동요를 느꼈을 것이다.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 단단해지는 마음을 가지기 위한 과정을 겪는, 결국 또 성장하는 쇼마이 신지의 아이들이다.


결국 페허가 된 집과 시들어버린 코스모스들로 이영화가 끝이 난다. <태풍클럽>과 <이사>를 보면 쇼마이 신지는 아이들을 단단하고 능동적이게 표현을 하는 것 같다. 나는 <여름정원>의 3명의 아이들도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다음 여름이 오고 그 정원에 무성히 자란 잡초들을 정리한 뒤 새로운 코스모스를 심을 것이다. 그리고 기다릴 것이다. 코스모스를 보고 반가워하는 나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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