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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Jul 12. 2024

엄마, 이제 우리가 힘이 되어줄게.

  "13번 베드로 안내해 드려."


응급 중환자실 수간호사 선생님의 지시로 간호 학생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갔다.

  '울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을 거야. 그래야 내 키가 더 커 보여 엄마가 날 알아보게 거야.'




  2024년 7월 6일 친정 엄마가 쓰러지셨다. 힘든 시집살이를 버티기 해주고, 우리 사 남매 모두를 다 대학 보내며 키워준 바닷가에서, 뇌출혈로! 갑자기 어지럽고 두통이 왔었나 보다. 평생을 힘들어도 힘들다고 말씀 안 하시던 분이 친정 아빠에게 힘들어서 잠시 쉬시겠다고 말하셨단다. 그리고 몇 발짝 더 가면 넓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이상 증상으로 바로 옆에 있는 뾰족한 바위들이 엉커 져 있는 곳에 앉았다. 그리고 이내 옆으로 픽 쓰러지셨다. 뾰족한 바위에 머리를 쿵 내리쬐신 것이다.

   쓰러진 엄마 옆에는 치매를 앓고 계시는 아버지가 계셨으나 "왜 그란가? 정신 차려보소." 라는 말만 할 뿐 어떤 대처도 하지 못하셨다. 그런데 그때, 마침 지나가던 청년이 붉은 피를 보고 깜짝 놀라 달라왔다고 한다. 그리고 신속하게 앰뷸런스를 불러줬고, 재빠르게 조선대학교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 수술을 하게 되었다.  넓고 평평한 바위에 앉아 쓰러졌더라면 흘리지 않았을 피가 엄마를 한 번 살린 것이다.

    

   그렇게 뇌내에서 10cc의 출혈량을 뽑아내고 응급 중환자실로 이동해서 간호를 받게 되었다. 그동안 매일 전화 상담으로만 엄마의 상태에 대해 들었다. 의식이 없었다가 점차 돌아온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하지만 내 눈으로 보고 싶었다. 엄마의 모습을....  시골 아줌마의 뽀글거리는 파마머리를 고수하셨던 엄마였고, 늘 밝게 웃는 모습이 참 예뻤던 엄마! 농담도 잘하시고, 어렵고 어둡게 느껴지는 사건에 대해서도 밝은 태도로 말씀해 주셨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7월 10일 첫 면회를 하게 되었다. 휴가를 낸 오빠와 내가 대표로 면회를 다녀오기로 했다. 면회 시간보다 1시간 먼저 도착한 우리는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며 엄마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약간 들떠있었던 것 같다. 그때, 일하고 있어야 할 언니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동네 작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는 언니의 사정을 듣고는 원장님께서 시간을 내주셨다는 것이다. 감사했다. 그리고 언니의 마음도 먼 길을 달려온 나와 같았고, 오빠의 마음과 같음을 느낄 수 있었다.



   2명으로 제한되어 있는 면회로 인해 오빠가 양보를 했다. 그리고 나는 두 번째 면회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1회용 비닐 가운을 입고, 1회용 장갑을 끼고, 그리고 마스크를 했다. 사실 내가 간호대학생이었던 시절, 중환자실 실습을 할 때에도 나는 중환자실이 싫었다. 사무적인 분위기,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숨 막히게 했었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 들어서니 그때의 기억이 났다. 그때는 환자 케이스를 얻기 위해, 좀 더 배우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었는데... 보호자의 입장에서 내 엄마를 보러 올 줄이야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이 생각 저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모두 사라졌다. 엄마를 찾아야 하고, 내 엄마를 알아보아야 하니까!

     

      "저기가 13번 베드예요."

  간호대학생의 안내하는 손을 따라 환자를 보았다.  그녀의 손 끝 너머로 삭박머리의 하얀 거즈와 붕대를 두른 작고 푸석한 얼굴의 누군가가 보였다.  간호대학생의 뒤에서 당당하게 걷기 위해 쭉 폈던 내 허리가 갑자기 앞으로 숙여졌다. 그리고 '울지 말아야지.' 했던 결심은 온데간데없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엄마?"

엄마도 나를 알아보시고는 몸을 움직여 일으키려고 했다. 나는 축지법을 이용하듯 엄마에게 내달렸고, 엄마의 뺨을 만졌다.

      "어...뜨....케.... 와...왔....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뭉개지는 엄마의 말이었지만 엄마의 눈빛과 입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새벽에 기차 타고 왔어. 우리 엄마 너무 보고 싶어서. 힘들었지?"

          "아....니..."

평상시처럼 엄마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말했다. 평생을 힘들다고 표현해 본 적이 없으신 분이셔서 습관처럼 나온 반응이리라.

          "애...드....들....은?"

           "애들? 전서방이 깨워서 밥 먹이고 학교 보냈대.  걱정하지 마."


   안심이 되었다. 이전의 엄마가 맞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늘 엄마의 상황보다는 자식의 형편과 상황을 생각해 주셨던 분이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말이 어눌하고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엄마,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몰라. 매일 전화 오고, 다들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걱정해주고 있어. 이제 보니 엄마가 우리 자식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한테 힘이 되고 있었더라고. 앞으로 재활받고 그러면 힘들지도 모르겠어. 이제는 우리가 엄마 힘이 되어 줄 테니... 엄마, 우리 힘내자! 알았지?"

           

고개를 끄덕이던 엄마는 조그맣게 말씀하셨다.

            "눈물...이.... 안...나...와..."

            "울고 싶어?"

             "응."

             "엄마 눈물 너무 많이 흘려서 그래. 안 울어도 엄마 마음...나 다 알아."


서투르지만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엄마를 이해하는 내 마음을 말이다.



     오른쪽 팔다리의 마비는 생각보다 심했고, 의사소통의 문제가 있음을 확인했지만 마음은 좋았다.  눈을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앞으로의 재활이 쉬운 길이 아님을 예감했고, 각오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엄마의 힘이 되어드릴 수 있는 기회라서 감사했다. 빨리 지치지 않기를 바라며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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