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저절로 눈이 떠졌다. 아침잠을 유난히 사랑하는 내게는 참 드문 일이다. 맥주를 무지막지 마신 날이야 소변 때문에 깬다고 하지만 화장실 다녀오면 다시 자면 되기도 하고, 비몽사몽으로 화장실을 찾으니 사실 깬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요즘 갱년기냐고? 의심을 해볼 만도 하지만 그것 또한 아니다. 더운 탓도, 선풍기 탓도 아니었다. 난 새벽 4시에 정신이 말짱해졌고 내 머릿속에서는 온통 친정 아빠 생각뿐이었다. 친정 아빠가 나를 깨운 것이다.
감사하게도 아직 내 부모님 두 분은 다 살아계시다. 이제 80세가 되신 친정 아빠와, 74세인 친정 엄마. 연세가 연세이기도 하시고, 시골에서 몸을 아끼지 않으며 일한 탓에 관절이며 허리가 아픈 상태이기는 하지만 늘 "괜찮다, 괜찮어. 쉬면 나아지지뭐."라며 늘 우리 사 남매를 안심시키셨다. 그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꾸린 가정만 고민하고 걱정하며, 때론 즐겁게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를 개발시킬 계획을 가질 수 있었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 "괜찮다."라는 말이 사실은 내 친정 엄마의 최면과도 같은 말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친정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져 중증 환자가 된 이후로 친정 아빠의 상태가 "괜찮은 상태"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괜찮지 않았지만 엄마는 자식과 자신의 내면의 평화와 평안을 위해 "괜찮다."를 외치고 계셨던 것이었다.
친정 아빠는 10년 전 아주 큰 사고를 당하셨다. 시골에서 주 교통수단인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시다가 달리던 오토바이 속도 조절이 되지 않아 오토바이와 함께 3m 정도 아래로 추락하셨다. 부모님이 사는 곳이 농어촌이기에 바닷가 바로 옆에 도로를 내놓았다. 그러기에 밀물을 대비해 도로는 해면보다 지대가 꽤 높다. 그때가 교회 김장을 하던 때였는데, 배추를 절이기 위한 바닷물을 공수하러 가시다 사고가 난 것이다. 다행히 밀물이 아니었고, 밀물이 만들어준 갯벌이 적당히 있어 쿠션 역할을 해준 탓에 사지는 크게 다치지 않았으나 의식은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옆동네 어르신의 신고로 앰뷸런스 이동을 하게 되었고, 바로 대형 병원으로 이송을 하게 되었다.
그 사고로 며칠간 의식이 없으셨다. 감사하게도 헬멧을 착용하여 뇌에는 큰 이상은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평소 철두철미 하시던 분이 자신의 실수로 사고가 났다고 생각해 자존심이 상한 탓인지, 아니면 사고 당시의 충격이 너무도 큰 탓이었는지 아빠는 1년 가까이 실어증을 앓게 되었다. 또한 친정 아빠는 치매를 앓기 시작하셨다.
치매 환자를 겪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치매의 초기는 굉장히 경미하다는 것을...
친정 아빠도 그랬다. 자주 깜박하시고, 옛날 얘기를 많이 하셨다. 방금 전에 했던 일과 말에 대해서는 잊어먹기 일쑤였다. 그리고 앵무새처럼 다른 사람이 한 이야기를 똑같이 따라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연세가 있으니 그러신가 보다 했다. 가까이 살지 않고, 1년에 4~6번 만나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더욱 치매를 의심하지 않았었다. 종종 친정 엄마와 통화를 한다고 해도 앞서 말했듯, 친정 엄마는 늘 "괜찮다."라는 말로 아빠의 상태를 덮으셨다.
그러다 사고 당시 치료를 받았던 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보다 친정 언니의 말 한마디로 치매 검사를 하게 되었다. 결과는... 치매였다. 그 당시에는 경미한 정도라고 했다. 그 결과를 받던 날 친정 엄마는 눈앞이 다시 한번 깜깜해졌을 것이다. 치매였던 시어머니를 꽤 오랫동안 집에서 모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할머니가 몇 년 동안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는다.) 성질 사납고 급한 친정 아빠를 누구보다 더 잘 아시기에 이제 제 스스로 컨트롤할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살아야 하는 시간이 꽤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특히나 없는 살림이지만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 하는 엄마였으니 혼자서 다 감당할 생각을 하신 것이다.
정말 10년간 친정 엄마는 7~8살과 같은 고집쟁이 아이가 된 친정 아빠의 완벽한 보호자가 되셨다.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오토바이를 놓지 못해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사고들이 났을 때에도, 날카롭고 미끄러운 바닷 바위를 조심스럽지 못하게 가다 미끄러져 크게 얼굴이 다칠 때에도, 낫질을 하다 손가락을 베일 뻔했을 때에도, 물인 줄 알고 제초제를 탄 물을 마시려다 뱉었을 때에도 엄마는 늘 아빠 곁에서 아빠를 안심시키고, 타이르시고, 그리고 간호를 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숱하게 응급실을 가야 했고, 수술을 해야 했다. 보험이 하나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그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60~70대 노인인 친정 엄마는 젊었을 때만큼이나 열심히 일을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너무도 가난해서 자식들에게 해준 것도 없어 미안한데
늙어서 짐이 되면 그건 너무도 염치없는 짓이다...
이게 친정 엄마의 뼛속 깊이 새겨진 다짐과도 같은 마음이었다.
친정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지니 친정 아빠의 치매 상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태어나서 평생을 지금 사신 곳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신(물론 간혹 자식들 덕분에 해외여행을 가기도 했고, 친척들과 국내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친정 아빠는 집으로 가길 원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직진 본능의 고집불통인 데다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이야기하고 그것이 상대에게 들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불과 같이 화를 낸다. 치매 아빠에게 세상에 어려운 사람도 조심해야 할 사람도 없다. 오직 자신의 생각과 감정대로 행동을 하신다.(아마 대통령이 눈앞에 있어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또한 신기하게도 치매 환자인 아빠는 자신의 루틴이 조금만 벗어나도 치매 상태가 눈에 띄게 나빠진다. 예를 들어보겠다. 재작년에 미국에 살고 있는 동생네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LA 주택가에 살고 있는 동생 집에 도착한 첫날, 아빠는 갑자기 사라지셨다. 영어를 쓰지도 알아듣지도 못한 아빠가 사라진 것이다. 동생네 가족은 철렁한 가슴을 느낄 세도 없이 아빠를 찾으러 나갔다. 껌껌해지도록 오지 않자 경찰에 신고를 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현관벨이 울렸다고 한다. 아빠가 백인 경찰 두 명과 함께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수갑을 찬 채 말이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친정 아빠는 백인 경찰 두 명에게 말했다고 한다.
"고맙소이~. 내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풀을 뽑아서 이라고 저녁이 된 줄도 몰랐는디 데려다줘서. 들어가서 뭐 좀 자시고 가시요."
동생네는 너무도 당황스러운 이 상황에 대해 백인 경찰들에게 상황을 듣게 되었다. 친정 아빠가 동생네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공원에서 해가 질 때까지 풀을 뽑고 있다가 이를 이상하게 여긴 경찰들이 다가가서 뭐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일하고 있다는 시늉과 한국말을 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집을 알면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나 강하게 저항을 해서 어쩔 수 없이 수갑을 채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여긴 한국이다, 내 오토바이 가지러 가야 한다' 등의 이상한 말들과 행동을 하며 처음인 길도 겁 없이 가려는 모습이 너무도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하나에 꽂혀 친정 엄마와 함께 여행을 동행했던 사돈부부에게도 화를 내는 모습도 많았다고 한다. 돈 계산이 약해진 탓에 조카들에게도 한동안 용돈을 주려고 했다는 것이다. 늘 처음 보고, 처음 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전적들이 있기에 우리는 아빠를 시골에 두기로 했다. 대신 매일 몇 번이고 전화를 걸고, 80 평생 함께 지내오는 가족 같은 이웃들이 아빠를 챙겨주기로 했다.(너무도 감사드린다. 이런 분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 자체에 깊이 감사드린다.) 이웃들은 혼자 있는 아빠에게 국도 챙겨주고, 반찬도 챙겨준다. 그리고 친정 아빠는 매일 오토바이를 타고 고추밭에 가신다. 깨밭도 가신다고 한다. 그리고 노인정에 가서 저녁까지 드시다 집으로 돌아오신다. 이게 아마 그동안 삶의 패턴이었던 것 같다. 걱정하는 우리와는 다르게 아빠의 목소리는 너무도 씩씩하시다.
그럼에도 어찌 우리의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차린 엄마가 안심이 되면서도 앞으로 있을 재활 치료는 어디에서 받을지, 그리고 누가 어떻게 모실지, 병원비는 어떻게 할 것인지, 중증 환자가 되어버린 엄마가 받을 수 있는 의료 혜택은 무엇인지.. 등등을 알아보고 의논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게 느껴졌지만, 정상적인 생활과 판단을 할 수 없는 치매 아빠를 혼자 두고 있다는 것 자체는 더욱 큰 고민이었다.
그래서 시골에 사는 친정 언니네가 아빠를 모셔가기로 했다. 가장 환경이 비슷하니 좀 낫지 않을까, 설득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꼬이고 설득시키는데 일주일이 걸렸다. 그렇게 친정 아빠를 모셔갔다. 이제 되었다고 안심을 했다. 이제 엄마만 신경 쓰면 되겠구나,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치매 환자를 전혀 모르고 있는 우리 남매들의 착각이었다.
아빠는 다시 고추밭을 이야기하며 막무가내로 내려가신다고 하셨다. 누가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고, 화를 내셨다. 오빠랑 새언니가 통장을 가져가서 자신의 돈을 다 뺏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매달 500이 넘게 돈이 들어오는 통장을 말이다. 10년 전부터 친정 아빠는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는 정신 상태가 되어 가지고 있던 배도 팔며 실질적으로 일했던 것에서는 모두 손을 뗀 상태였다. 돈 관리도 되지 않아 40년 동안 관리해 왔던 통장 관리를 엄마에게 넘긴 상태였다. 실질적 가장은 엄마가 되어버린 것이다. 노인 일자리 장려 정책 덕분에 어린이집 식사 도우미를 하고 있던 엄마의 수입과 국민 연금이 전부였으니 월 500은 가능치도 않은 말임에도 허상 속 이야기를 계속해서 했다고 한다.
이런 실랑이 속에서 결국 아빠는 다시 시골로 내려가셨다.
친정 엄마 상태도 걱정이지만, 사실 더 걱정이 되는 것은 치매 환자인 친정 아빠이다. 지금의 일자리와 가정, 아이들을 다 놓고 아빠만을 생각하며 시골로 내려가 살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니 더욱 답답하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 고민은 나를 깊이 잠들지 못하게 했다. 노인장기요양등급을 받아 가정 방문 간호를 요청해 식사와 약 챙겨드시는 것, 청소등의 도움을 받고 싶으나, 아빠의 상태가 어느 때는 너무도 정상일 때가 있으니...
늙은 부모님, 아프신 부모님을 돌볼 수 있게 되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굉장히 무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려운 두 문제를 동시에 풀려고 하니... 오래간만에 어려운 수학 문제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