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사람 키우기.
전업맘들이 가장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무기력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가 누구인 줄 아는가? 바로 아이를 굉장히 똑똑하게 잘 키운 워킹맘이다. 내게도 이런 지인들이 있다. 영재 혹은 천재라고 분류하는 아이들을 둔 워킹맘들 말이다. 유독 내 주변에는 아이들을 똘똘하게 잘 키우는 워킹맘들이 많다. 영재원은 물론이고, 영재고나 특목고에, 흔히 말하는 명문대까지. 유전자가 좋은 덕인지, 아니면 엄마가 잘 키워낸 덕인지 그 이유는 모르겠다. 공부도 재능이라고 얘기하는 파가 있고, 공부는 습관이나 엄마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상위권까지는 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파가 있으니 유전자이냐, 좋은 습관이냐, 학원의 영향이냐를 따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 결과만을 놓고 보면 부럽기는 하다. 전업맘이 된 대부분의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다. 내 아이를 더 잘 키우기 위함이 크다. 그러니 아이의 교육에 더 신경을 쓰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물론 가끔 나처럼 불량 전업맘도 있기는 하지만). 전업맘은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일을 하면서도 아이들의 습관이 잘 잡히도록 신경 쓰며, 아이들의 학업 능력까지 뛰어나게 도와주는 워킹맘들이 있다. 이들은 사실 전업맘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얄미운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이럴 때면 나를 포함한 보통의 전업맘들은 그렇게 얘기한다.
"공부는 타고난 머리로 하나 봐. 공부는 재능이야, 재능. 아무리 시키려고 해도 애가 안 따라와 주는 걸 어떻게 해. 그리고 본인 스스로 욕심 있어서 하겠다고 하는 애를 어떻게 막아."
그런데 나는 내 아이들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나도 내 아이들이 영재원도 들어갔으면 좋겠고, 영재고나 특목고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이건 솔직한 마음이다. 이 바람이 세계에서 어디 나 혼자뿐이겠는가!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자신이 없다. 바람은 바람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왜냐면 그 아이들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오해의 여지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고백하건대 나는 서울대 출신이 아니다. 그리고 머리가 굉장히 좋거나 대단히 잘난 것도 아니다. 나는 인 서울권 대학 출신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요지는 나도 나를 키우는 것이 이렇게 쉽지 않았는데, 이것을 내 아이들에게 강요해서 키울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한 간에는 천재는 하늘이 내려 보내주고, 영재는 부모가 만들어준다, 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영재는 부모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게 맞는 말일까,를 의심해 보기는 한다. 그게 맞는 말이라면 해보고도 싶다. 다만 대상은 아이들이 아니다. 바로 나이다. 대상이 다르니 상황이 달라질 수밖에. 내 부모는 나를 키우기에는 너무 연로하시다. 80을 문전에 두고 계신 분들에게 나를 키워달라고 하는 것은 참 염치없는 짓 아닌가. 이제 '나'라는 사람은 내가 키워야 한다.
다른 사람을 키워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눈치도 봐야 하고, 혹여 실패라도 한다면 꼭 내 책임 같아서 죄책감이 든다. 내가 계획을 잘못 세워서 그런가, 내가 혹 정보를 잘못 알려줘서 그런가, 혹은 내가 더 돈을 들여서 해줬어야 했는데 그랬나, 등등의 여러 생각으로 마음이 참 복잡해진다. 그러면서 내가 뭘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내가 그걸 키운다고 했나, 싶기도 하다. 또한 실패감, 좌절감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이를 옆에서 지켜봐야 하니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리고 내가 의지가 있다고 해서, 상대가 나와 같은 의지가 있지는 않다. 의지, 즉 내면의 것은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내면의 것은 오로지 본인의 것이다.
하지만 나를 키우는 것은 나의 모든 상황을 내가 아니, 통제가 가능하다. 내 마음도 내가 알고, 내 의지력의 한계도 내가 알고, 내 능력도 내가 알기에 통제 가능한 부분들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나를 설득하는 것이 가장 편하고 성공 확률이 높다. 그러니 내가 나를 키우는 것이 가장 재미난 일이다. 나에 대한 새로운 꿈과 목표를 세워서 키워보는 것이다.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고, 또 더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고 키운 지인이 있다. 늦게 얻은 아이이니 오죽 정성 들여서 키웠겠는가. 전업맘으로 온 시간과 정성과 마음을 들여 아이를 키웠다. 그런데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니 학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는 것 외에는,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게 되었다. 취미 생활이든 뭐든 내 시간을 보낼 장소가 필요했다. 온전히 나를 집중시켜줄 장소 말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림 그리는 취미 생활을 시작했다. 공방에 다니면서 그림을 배우게 되었다. 거의 매일을 공방으로 출근 도장을 찍듯 하였다. 그녀는 그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이 직장을 다니며 자기의 커리어를 키우듯 자신도 공방을 다니며 커리어를 쌓는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5년이 넘도록 그렇게 매일을 보냈다. 그랬더니 전혀 손재주나 재능이라고는 없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실력이 점점 좋아졌다. 실은 단순히 좋아진 정도가 아니었다. 점점 자신의 작품을 좋아해 주는 사람들이 생기고, 선물을 하면 백화점의 어느 작품보다 훨씬 좋다며 칭찬을 해주는 이들이 많아진 것이다. 자기 자신을 영재로 만든 것이다. 이를 계기로 자신도 공방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의 시간과 성장과는 별개로 자신의 시간과 성장을 키우면서 지내고 있다.
많은 전업맘들은 40대 중반이 넘어서면 스스로를 포기한다고 한다. '내 나이에 뭘 새롭게 배워? 그리고 이제 뭘 배운다고 크게 내 인생이 달라지겠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 지인은 마흔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 이전에는 전혀 생각해 보지도, 해보지 않았던 것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키운 것이다. 그리고 미술 영역에서는 둔재였던 자신을 영재로 만들어냈다.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아 지치고, 나한테 들이는 돈이 아까울 때도 있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을 다독이며, 위로하고, 의지를 다잡으며 자신을 성장시켜 온 것이다. 그 매일이 쌓여 어느 순간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전문가 못지않음을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 인정해주기 시작했다.
나를 키운다는 것에는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가장 먼저는 내가 나를 키우는 것이니 야단을 칠 필요도 없다. 야단을 맞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자존감이 한 계단 내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고백하건대 부끄럽지만 나는 내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의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야단을 치기도 한다. "집중을 안 했니? 게으르게 했니? 좀 더 열심히 좀 하지 그랬어!"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내게는 이런 직접적인 질책보다는 "왜 이렇게 안되지? 뭐가 문제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내게 너무 관대해서 그런가? 아니면 나만 그런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이 이런 자세들을 보인다. 그러니 크게 기분 상할 일도 없다. 야단을 치는 것도 기분이 상하고, 야단을 맞는 것은 더욱 기분이 상하는데, 내가 나에게 야단은 치지 않으니 말이다.
두 번째 장점으로는 내가 내 부족함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단점이라고 얘기하지 않았다. 부족함이라고 했다. 단점이라고 하면 그것은 고치기 굉장히 힘든 영역의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부족함은 채워 넣으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시간으로 채우든, 배움으로 채우든, 사람으로 채우든, 칭찬으로 채우든 어떤 형식으로든 채우면 될 것 같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몸이 다르니 생각도 다르고, 가지고 태어난 재능이 다르니 열심히 지켜본다고 한들 다 알지는 못한다. 실은 나도 내가 다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은 나 아닌가! 그래서 다른 이들의 부족함보다, 내 자식의 부족함보다, 내 남편의 부족함보다는 내 부족함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채우기도 상대적으로 더 쉽다. 이 얼마나 큰 장점이란 말인가? 그러니 이 세상에서 나 키우는 것이 가장 쉬운 일 아닐까?
세 번째 장점으로 나는 내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거 아는가?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시간을 산다는 것을 말이다. 난 내 남편과 내 아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주말이라는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그 주말이 다 같은 시간이 아니다. 내 아이들은 일주일 동안의 쉼을 위해 마리오 게임을 하는 시간이고, 남편은 밀렸던 영화를 보는 시간이고, 나는 책을 보거나 밀린 집안일을 하는 시간이다. 혹 같은 물놀이를 갔다고 해도 우리는 같은 워터파크에서 다른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이들은 물놀이의 재미에 푹 빠져 신나는 시간을 보내게 되고, 남편은 그런 아이들을 더 재미있게 해 주기 위한 시간을 보내고, 나는 아이들의 안전을 신경 쓰며 조금이라도 물 밖에 있으려는 시간을 보낸다(난 물에 내 몸을 담그는 것을 싫어한다). 같은 공간인데도 각자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나를 성장시키기로 마음을 먹으면 나를 키우기 위한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오전에 집 청소와 장보기, 혹은 드라마 보기, 아는 엄마와 만나 수다 떨기의 시간을 보냈던 전업맘이 오전에 자신의 건강을 위해 PT를 받기로 결심을 하였다면 그녀는 그녀의 선택에 따라 운동을 하며 몸이 더 건강해지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 나의 경우에는 글을 더 잘 쓰고 싶은 나의 결심과 선택에 의해 오전 시간은 정리를 간단하게 하고, 청소는 로봇 청소기에 맡기고 나머지의 시간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데 보낸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통제할 수 있고, 이것은 내 남편이 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직 내가 결정하고 내가 해내는 것이다.
네 번째 장점으로는 나를 키우는 기쁨은 내가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고, 가장 온몸으로 느끼고, 가장 크게 기뻐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식이 잘 되는 게, 내가 잘 되는 것보다 기쁘다'라는 말이 있다. 아직 내 자식이 다 크지 않아서, 같이 한 세월이 10여 년 남짓밖에 되지 않아서, 혹은 내 자식이 자신의 열매를 거둘 때가 되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아직은 내가 잘 되는 것이 더 기쁠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로또에 1등 당첨된 사람의 기쁨과 매일 고된 훈련을 이겨내 결국 금메달을 받게 된 운동선수의 기쁨 중 어느 기쁨이 더 클까? 난 후자의 기쁨이 더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바로 "노력"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노력의 정도와 강도에 따라 그 결과에 대한 기쁨의 정도는 다를 것이다. 당연히 죽을 만큼, 쓰러지칠 만큼 노력한 사람의 기쁨이 조금 노력한 사람의 기쁨보다 크지 않겠는가? 그 결과가 같다고 하더라도 노력 없이 얻게 된 결과는 그 사람에게 큰 값어치 있는 것, 가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나를 정성 들여 시간을 들이고, 돈을 들이고, 위로를 하고, 격려도 하면서 매일 같이 키우다가 원하는 모습으로, 그 결과를 얻게 되면 그 기쁨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난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기뻐할 사람도 '나'이다. 나만큼 매일 염원한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나만큼 나를 위해 노력한 사람도 없었을 테니까. 그 기쁨의 100%는 오로지 나 자신의 것이다. 그중의 50%를 남편과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자식과 30%는 나눌 수 있다. 하지만 100% 그 모든 것을 기뻐하고, 그 과정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나는 나를 영재로 만들고 싶다. 태어난 재능이 충분하지 않다고 해도, 방향이 올바르고 매일의 습관이 좋고, 의지가 있고, 나를 칭찬하다 보면 나도 영재가 될 수 있을 않을까, 하는 즐거운 생각을 해본다. 난 태어나서 한 번도 영재였던 것이 없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어느 분야에서는 한 번쯤 '영재'이고 싶다. 겸손한 영재이고 싶다. 영재라는 게 꼭 공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 수학을 공부하고,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 전업맘들은 내가 평상시 하고 싶었던 것, 관심 있었던 것을 시작하며 나를 키워봤으면 좋겠다. 아이들의 성장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 노릇 하느라 아직 덜 자란 나의 성장에도 관심을 갖고 나를 키워나갔으면 좋겠다. 영재가 아니라도 좋다. 어제보다 한 뼘 더 자란 내가 오늘에 있고, 내일에는 조금 더 자라 있는 내가 있다고 상상해보라. 난 그 모습을 바란다. 그러다 보면 10년 후, 혹은 20년 후, 혹은 30년 후에는 영재 소리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어른도 어른 영재는 필요하다. 전업맘도 전업맘 영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