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친절한 엄마는 되지 않기로.
주방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저녁 준비에 한창인 내게 아들이 다가왔다.
"엄마, 엄마, 하늘 좀 보세요. 너무 이뻐요. 내가 사진으로 찍게 핸드폰 줘봐요."
전업맘의 작업대인 전기레인지에서는 돼지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메추리알 장조림은 마지막 단계라 약한 불에 졸이고 있었다. 애호박전을 약한 불로 줄인 후 뒤집개를 든 채로 부엌의 작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붉은빛과 핑크빛이 산머리 위에 살짝 내려앉은 듯, 하늘 넓게 깔려있었다. 실로 자연은 아름답다. 여름의 하늘은 참 빛이 곱다. 맑은 물에 잉크를 뿌려놓은 듯 하늘 전체로 뻗어져 가는 모습에 잠시의 황홀함을 느낀다. 자연은 자신의 색을 자신이 선택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아들은 날 닮아서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다. 바람이 스치는 것도 느끼고, 구름이 변하는 모습도 좋아한다.
"이쁜 딸~ 와서 하늘 좀 봐봐."
나는 딸아이와 이 감성을 나누고 싶은 욕심에 딸을 불렀다. 숙제를 확인하는 것인지, 친구들과 대화를 하는 것인지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는 딸은 쪼르륵 달려와 하늘을 보더니 짧은 한 마디를 한다.
"어. 예쁘네."
한 마디의 정확한 말, 이 말을 남기고는 딸아이는 다시 거실로 걸어간다. 옆에서 이 하늘이 금방이라도 변할까 서둘러 사진을 찍어대는 아들과는 너무도 대조되는 딸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이런 딸의 모습에 미안함을 느낀다.
내 첫 아이에게 나는 신입 엄마이다. 둘째에게는 나는 그래도 경력 엄마이다. 물론 키워보니 아이들 성향이 달라서 둘째 아이 성향에 맞추어 키우는 것은 초보 엄마이지만 전반적인 엄마 역할에서는 그래도 경력 엄마인 셈이다. 신입들이 그렇듯 신입 엄마도 열성적이고 생기가 있다. 주도적으로 뭔가를 해보려고 한다. 하지만 늘 서툴다. 실수 투성이다. 아이가 나보다는 훨씬 어려서 그렇지 비슷한 나이였으면 굉장히 나무라고도 남았을 것이다.
첫 아이에게 신입 엄마는 참 친절했다. 아이를 상대로 이것저것을 시도해 보기 때문에 일단 친절하게 대해야 뭐라도 하기 때문이다. 신입 엄마는 나보다 더 인생 신입인 아이에게 뭐든지 다 해주려고 했다. 왜냐하면 내 시간과 관심, 내 노력, 돈이 온통 아이에게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디 나뿐이랴! 남편도 할머니, 할아버지도 친척들도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첫 아이에게 참으로 친절한 가족이었다.
"딸~ 5시에 학원 가야 하는 거 알지? 그러니까 3시까지는 학교 숙제해놓고, 3시에서 3시 30분까지는 영어 단어 외우면 되겠다, 그지? 그리고 10분 정도 쉬었다가 3시 40분부터 4시 10분까지는 책 좀 읽으면 좋겠는는데. 그리고 그 이후에..."
나의 친절함의 수준이다. 얼마나 친절한지... 아이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아이는 그냥 움직여 주면 된다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후 3시, 나른함이 활개를 펼칠 시간이다. 책을 읽던 나는 꾸벅꾸벅 졸았다. 마치 대학생 때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들어와 꾸벅꾸벅 졸던 때와 같았다. 잠은 20대 때나 40대 때나 똑같은 것 같다. 늘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챙겨주는 것이 많은 것 같은 나는 당연하겠지만 피곤하다. 그래서 오후 3~4시는 고비이다. 믹스 커피를 마시지 않고서는 안 되는 수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럴 때는 간식이 필요하다. 달달한 커피와 입을 움직일만한 간식이 있다면 잠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딸~ 간식으로 뭘 먹을래? 엄마가 뭐해줄까?"
"난 아무거나 괜찮아."
딸은 늘 이렇다. 아무거나 괜찮아. 난 상관없어. 이 말들을 주로 쓰는 아이이다. 처음에는 정말 괜찮아서 그런 줄 알았다. 그리고 배려해서 그런 줄 알았다. 엄마 마음대로 하라는 말이 나를 신뢰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어쩌면 나의 착각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달걀을 삶아줄까? 아니면 고구마를 쪄줄까? 아니면 프레즐?"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선택의 폭을 두 개로 줄여도 딸아이의 대답은 한결같다.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첫 집을 사면서 들뜬 마음에 제작했던 녹색 원목 아일랜드 식탁에 두 팔을 올려 짚고는 나도 멍하니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아이가 처음부터 이랬던가?
나의 과도한 친절이 아이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아이로 만든 것은 아닐까?
신입 엄마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볼이 깊은 냄비에 달걀 5개를 넣고 약간의 소금과 약간의 식초를 넣고 전기레인지를 파워로 설정해놓은 후, 타이머를 13분으로 맞춰뒀다. 원래 나는 꼼꼼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늘 하던 일은 조금은 더 편하게 하기 위해 내 나름의 패턴이 생겼다. 달걀 삶는 것이 그렇고, 그리고 세탁기 돌리는 것이 그렇고, 욕실 청소하는 것이 그렇다. 어디 청소뿐이겠는가? 아침에 기상해서 시작되는 나의 일련의 행동들이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난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 일들을 하고 있고, 또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달그락 달그락 달걀을 넣은 물이 끓으면서 달걀들을 서로 부딪히게 만든다. 서로의 엉덩이인지 얼굴인지를 이리저리 쿵쿵 찧는 달걀들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남은 시간은 3분. 딸아이는 12살이다. 자기주장이 한참 생기는 나이이다. 그런데 내 아이는 다 괜찮다고 한다. 이 아이는 진짜 다 괜찮은 걸까? 달걀을 먹어도 되고, 빵을 먹어도 되고, 고구마를 먹어도 다 괜찮은 것일까? 간식을 고르는 것은 예시일 뿐이다. 주말에도 할머니 댁에 갈까? 아니면 도서관을 갈까?라고 물어도 엄마 마음대로 해,라고 얘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난 늘 아이에게 물었던 것 같은데, 아이는 왜 늘 엄마 마음대로 해, 혹은 난 상관없어, 괜찮아,라고 얘기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나니 벌써 달걀을 삶기 위한 13분의 시간이 지나갔다. 차가운 물에 달걀을 옮겨 담고, 달걀 껍데기를 까서 아이에게 소금과 함께 달걀을 줬다.
"맛있게 먹자. 소금은 이만큼 정도로 적당히 찍어먹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래야 안 짜지."
딸과 아들은 서로서로 '이만큼이면 되나?'라고 물으며 소금 찍은 정도를 내게 체크받는다. 또 나는 자연스럽게 '응. 그 정도가 딱 좋다.'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그런데 순간......
"적당히"라고 말했던 나의 말이 귀에 윙윙거렸다.
이제 막 결혼을 해서의 일이다. 새댁의 주방 놀이에 흠뻑 빠져있던 나는 이 요리, 저 요리를 해보고 싶었다. 그때마다 친정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오징어 초무침을 하려고 장을 봐 왔거든. 근데 어떻게 하는 거지?"
"오징어를 적당히 삶아서, 고추장에 식초랑 매실 액기스, 설탕, 마늘 다진걸 적당히 넣어. 그리고 참깨도 적당히 넣고..."
"응? 적당히? 몇 숟가락이면 될까?"
"뭔 몇 숟가락이여. 그냥 적당히 넣으면 되제."
난감했다.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으니. 나는 버럭 화를 냈다.
"아~ 적당히를 엄마 같은 요리 고수들이나 알지, 나는 몰라.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친절하고 자세하게 얘기해줘야지. 오징어는 몇 분 삶아야 하는지, 고추장은 몇 스푼을 해야 하는지..."
"아이고~ 그런 게 어딨냐? 그냥 적당히 하는 것이제."
난 그 뒤로 친정 엄마에게 요리법을 묻지 않았다. 그리고 요리책을 샀고, 요리 블로그를 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는지 신세계였다. 그렇게만 따라 하면 요리가 실패할 가능성은 낮아졌다. 이제 갓 주방놀이에 입문한 새댁에게는 이보다 좋은 과외 선생님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주부 12년 차. 1년 전까지만 해도 레시피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나는 친정 엄마의 '적당히'를 모른다. 타인의 레시피를 의지해서 '고추장 2스푼, 식초 2스푼, 매실 액기스 2스푼, 설탕 1스푼, 다진 마늘 1스푼, 양파 반 개'를 따라 한다. 그래서인지 요리에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은 매일 남의 레시피를 보고 있는 내가 싫어서 내 식의 요리를 하게 되었다. 대충 이런 맛을 내려면 뭐뭐를 넣어야 하나,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고추장의 맛과 쓰임, 고춧가루의 맛과 쓰임이 서로 다름을 알게 되었다. 간장은 모든 요리에 쓰이지 않는다고는 것과 액젓은 무슨 역할을 하는지도 알게 된 것이다. 요리에 생각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러다 모르는 게 나오면 레시피를 찾아보는 것이다.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아!!!! 이건 어마어마한 차이이다. 생각이란 걸 하지 않고 그대로 베끼는 레시피와 내가 생각한 레시피의 부족함을 찾기 위해 보는 레시피는 내 요리에 도움을 주는 정도가 달랐다. 그것을 깨달은 이후, 난 가능하면 내 의지대로, 내 생각대로 요리를 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랬더니 지난 11년 요리를 해 온 것보다, 작년 한 해 요리를 하면서 깨우치고, 내 기억에 남는 레시피가 훨씬 많음을 알게 되었다. 친정 엄마의 "적당히 레시피"가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친절은 대체적으로 좋은 의미이다. 하지만 내 육아에서는 조금 자제하려고 한다. 매일 했지만 내 요리가 지난 11년 동안 자라지 않고, 늘 새댁 수준이었던 이유는 3인분 기준이라고 적어두며 너무 친절하게 모든 것을 내게 알려줬던 레시피 때문이었다. 내가 요리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런데 이건 그분의 잘못이 아니다. 그분은 너무도 친절했다, 감사하게도. 하지만 내 선택에 의해 나는 요리를 생각할 기회를, 내 요리를 만들 기회를 결핍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내 친절한 육아로 인해 내 아이가 내 지난 요리 실력처럼 자신의 인생 실력을 늘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실수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박탈하고 있다. 처음부터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낼 욕심이 내 육아에도 슬그머니 넘어온 것이다. 내 아이가 실수 없이 잘 해냈으면 하는 욕심이 내 아이가 자기 인생의 실력을 늘리지 못하도록 막았다.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자신이 뭘 싫어하는지, 자신의 생각이 무엇인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지, 자신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하는지 생각할 기회를 결핍시키고 말았다.
이걸 깨우치는 순간, 난 소름이 돋았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너무 나의 만족만 생각했구나. 정말 미안해. 널 더 생각하는 어린이로 자라도록 했어야 했는데... 이제 엄마가 노력할게. 네게 덜 친절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