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때 '슈렉'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녹색 괴물. 혐오스럽고 무섭고, 성질도 나쁘지만 인간 냄새가 나는 괴물 슈렉도 신선했지만, 그 영화 속 공주가 참 기억에 남았다. 기존의 공주의 틀을 깨부수어버린 공주, 피오나! 날씬하고 예쁨을 포기하고 슈렉과 함께 녹색 괴물이 되기로 한 피오나가 멋있어 보였다. 피오나는 뚱뚱하고 못생긴 괴물 공주이지만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기로 했다.
이 슈렉 이야기와 함께한 나의 20대가 있었는데, 우리 아이들이 슈렉을 보고 즐거워한다. 쉼 없이 얘기하는 덩키의 수다스러움에 웃고, 장화 신은 고양이의 그 눈빛을 사랑스러워하고, 슈렉의 진흙 목욕에 '으윽'하고 혀를 쭉 내밀기도 한다. 특히 딸아이는 뚱뚱하고 못생김을 선택한 피오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이야기를 늘여놓는다. 20대 때 내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문득 궁금했다. 피오나에게는 계획이 있었을까? 기존의 공주들처럼 예쁘고 날씬한 공주로 사는 것과 뚱뚱하고 못생긴 공주로 사는 것의 장점과 단점을 따져 봤을까? 어떤 계획을 했기에 뚱뚱하고 못생긴 괴물 공주가 되려고 했을까? 아니면 단지 그때, 그 순간의 어떤 느낌, 감정 때문에 결정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보통 후자에 속한 사람이었다.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내 심장의 소리를 듣고 길을 선택하는 편이었다. 사람에게 따르는 운도 믿었다. 그리고 난 대체적으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나였으니 나의 미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며 살아본 적은 없다. 난 총 3번의 대학을 입학하였는데, 첫 번째 대학에서 국문학을 선택했다. 학창 시절 국어 문법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국문과에 가서 공부하고 졸업 후 무슨 직업을 가져야지, 하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의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의학을 공부하면 나중에 의료 봉사 같은걸 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수를 했다. 의대는 가지 못했지만 간호학을 공부하고 간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나도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사이버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있다. '이걸 공부해서 몇 년 후에는 뭔가를 해내야지.'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
간호대를 졸업할 당시,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병원들에 줄줄이 합격을 했다. 어느 곳을 선택한다고 할지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난 지금의 남편이 된 남자 친구를 더 자주 만날 요량으로 S 병원을 택했다. 심장의 소리를 듣는 것에 익숙한 터라 그 당시의 나의 결정이 후회가 되지는 않았다.
결혼도 그랬다. 이것저것 따지며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냥 이 남자 아니면 내가 누구랑 결혼을 할까, 라는 생각이 드니 결혼을 결심했고, 아이를 갖는 것도 그랬고, 회사를 퇴사할 때도 그랬다. 뭔가 계획을 짜서 움직이는 것에는 제로에 가깝다. 가볍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대충의 순간들을 보냈다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난 매 순간 어느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하며 살았으니까. 학생일 때의 나도, 간호사였을 때 나도, 그리고 엄마로서의 나도, 아내로서의 나도...
나는 늘 최선을 다했다. 지쳐 쓰러질 만큼
하지만 가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왜 이렇게 살까? 왜 가시거리 1m 상태로 살고 있을까? 늘 최선을 다하기는 하지만 왜 미래의 내 모습은 그려보지 못하고 닥치는 삶에만 충실하며 살고 있을까?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다. 안개가 짙게 내리깔린 밤 운전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그 두려움을 알 것이다. 분명 앞에 차가 있는 것 같은데, 노랗게 깜박이는 불빛만 보일 뿐 내 차와의 간격도 모르겠고, 그 앞의 상황은 더욱 모르겠으니 답답하고 무서운 그 느낌 말이다. 가끔은 운이 좋게도 깜박거리며 보이지 않은 길을 안내해 주는 경우도 있지만, 앞에 차가 없을 때에는 더욱더 불안해진다.
40이 넘은 나이에도 이렇게 살고 있는 내가 가끔은 바보스럽게 느껴지고, 헛똑똑이처럼 느껴져서 부끄러울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나를 걱정하기도 한다. '너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 아냐? 좀 계획적이어야 하지 않겠어?'라고. 영화 속, 능력 있는 커리어를 가진 여주인공처럼 야무지게 '이건 이래서 앞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 예정이니 이건 배우면 좋고, 이건 그냥 지나쳐도 좋을 것 같아.'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나 자신까지 완벽하게 설득하면 좋으련만 난 왜 그게 이렇게 안 되는 것일까?
나는 내 삶에 애착이 많다. 늘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왔다. 한 뼘이라도 더 자라고 싶어서 하루하루를 고군분투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선택을 할 때에는 머리가 아닌 마음의 소리를 더 따르는 것을 보면, 왠지 역설적이다. 삶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내 선택의 순간들이! 이성적이지 못한 나의 모습이 참 못마땅하다. 피오나처럼 후회라도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난 후회를 한다.
이전에 유재석의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뭔가를 계획하면서 살지는 않았어요. '꼭 뭐가 되어야겠다, 어느 자리까지는 올라가야지, 몇 년후에는 뭘 해야지'라는 것 말이에요. 난 그냥 눈앞에 주어진 것들을 열심히 해내면서 사는 것 같아요."
진지하게 얘기하는 그의 말이 꼭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 나같이 사는 사람들도 있어. 내가 이상한 것은 아니야!!
삶의 여러 모습 중 어느 한 가지의 모습만을 옳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때때로 나와 다른 방법으로 선택을 하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부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루고 싶은 목표를 정해놓고 그 방법을 여러 각도로 생각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에게는 어떤 방법이 어울리는 것까지 생각하며 자신의 길을 닦아가는 사람들이 멋있어 보이기도 하다.
"와~ 꼼꼼하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미래인데 이걸 계획하면서 가다니...
참 멋지다, 그리고 대단하다"
그들은 그들의 인생의 가시거리가 몇 km쯤 되려나? 물론 인생이라는 게 가늠할 수 없어 계획한 대로 다 이뤄지며, 그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나의 인생의 시나리오라는 것을 짜 보고 싶어졌다. 나만의 시나리오!! 내 인생의 가시거리를 조금씩 더 넓혀 볼 생각이다. 일단 1년이라는 시간을 미리 계획해보려고 한다. 너무 먼 미래까지 계획하기에는 초보인지라 나의 가시거리는 일단 12m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