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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는 김에 뉴질랜드 Nov 16. 2024

아오테아로아, 시간, 그리고 구름

시간은 흐르고 삶은 완성된다.

나는 친구를 버겁게만 생각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했지만, 나는 그 사회적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렇다. 학교에서, 사회에서 나라는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누군가와 상호작용을 해야만 했다. 나는 친구를 그러한 의미로 생각했다. 친구란 무엇일까?  무수히 많은 밤을 고민했다.

어린 시절 나는 친구와 함께 있어도 외롭다 느낀 날이 많았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감 때문이었다. 친구에게 나의 속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친구와 웃고 떠들지만 문득문득 가슴 한편은 말하지 못한 것들로 채워졌다. 가끔은 용기를 내어 속마음을 편하게 툭 터놓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저 편하게 이야기하고 편하게 감정을 나누면 되었던 것을. 지난날을 돌이켜 보니 나는 어리석었다. 왜 나는 그랬을까?

학창 시절 나는 모범생이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학원에서도 모범생이었다. 친구와 잘 지내고, 공부 열심히 하고,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을 잘 듣는 아이. 모범생 병은 학창 시절 내내 나를 옭아매었고, 이내 나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가 되었다.


나는 타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어린이 었다. 완벽한 어린이고 싶었다.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은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나를 인정하는 법을 배운 단 거다. 나는 불완전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얼마든지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친구와 나눌 수 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 깨달았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고, 언제든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단 사실을 말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배워 나가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친구를 비롯한 인간관계는 완벽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불완전하다.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인정에서부터 인간관계는 비로소 시작된다.


나의 모든 것은 불완전했고, 나는 어리석었다. 지금은 알고 있다. 모든 것은 불완전한 것에서 비롯한 온전한 것임을 말이다.


뉴질랜드에서의 삶 역시 그러하다. 나는 영어가 완벽하지 않고, 완벽히 뉴질랜드의 사회에 속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시간을 나눌 키위 친구가 있다. 나의 딸, 리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리나는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행스럽게도 뉴질랜드에서는 함께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르친다. 또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사고가 유연한 아이로 성장하게 만든다. 그것은 교실 안의 풍경만 보아도 느낄 수 있다. 한국의 교실은 흡사 복사해서 붙여 넣기이다. 책상과 의자를 복사해서 줄 맞춰 붙여 넣기를 하면 한국 학교의 교실 풍경이다. 한국은 줄 맞춰 서고 줄 맞춰 앉는다. 운동회도 같은 맥락이다. 축제 같아야 하는 운동회는 칼 군무와 같은 절도가 있어야 한다. 절도 있는 칼군무와 박자를 맞추기 위하여 뙤약볕에서 아이들은 수십 번 연습한다. 수업도 마찬가지다. 수업시간에는 절도 있게 맞춰진 의자에 앉아야 한다. 일자로 뻗은 줄에서 벗어나는 책상은 줄을 맞춰 앉아야 한다. 어쩌면 그러한 풍경 탓에 아이들이 빛을 잃는 게 아닐까.

뉴질랜드는 수업시간이 자유롭다. 같은 교재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룹에 따라 다른 교재로 수업을 하기도 한다. 또한 교실의 책상과 의자는 어떤가. 한국과 같은 책상과 의자는 교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룹으로 앉을 수 있게 커다란 테이블이 몇 개 놓여 있고, 사이드 벽 쪽에 높고 긴 테이블이 있다. 수업 종이 울리면 아이들은 원하는 곳에 원하는 친구와 자유롭게 앉아 수업을 듣는다. 몇몇은 바닥에 앉아 있고, 몇몇은 엎드려 있고, 몇몇은 돌아다니기도 한다. 선생님의 시선에서 아이들은 충분히 자유롭다.

학교에서 배우는 유연한 사고는 인간관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의 마음은 여유롭고 맑으며 아름답다. 두려움보다 앞선 호기심은 아이들을 반짝이게 만든다.


나의 딸 리나도 반짝이며 빛을 낸다.


리나의 세계는 학교와 집과 동네로 채워져 있다. 리나가 속한 동네는 리나의 친구들이 있다.


비슷한 또래, 같은 학교,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인생은 어디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나의 선택이 옳은지 틀린 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뉴질랜드에서 살기로 결정했고, 이곳에서 아이를 키우기로 작정했다. 그렇기에 선택한 것에 대해 최선을 다하려 애쓴다. 아이들의 웃음은 결이 비슷하다. 언어가 다르고, 인종이 달라도 서로를 향한 웃음의 의미는 같다.


너를 위해 나의 시간을 함께 보내고, 너와 함께 나의 세계를 완성해 가는 것.


친구를 만들고, 그 우정을 위하여 켜켜이 시간을 쌓아가 마침내 아이들의 세계는 서로로 꽉 차게 될 것이다. 우정의 이름으로 말이다. 우정이 별 건가? 서로를 위해 웃고, 서로를 향하여 바라보고, 함께 시간을 보내어 추억을 쌓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서로를 위해 특별히 애쓰지 않는다. 공기처럼, 물 흐르듯. 서로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은 것, 그것이 어른과는 다른 아이들의 우정이다.


결코 특별하지도, 특별히 배려하지도, 이해관계를 따지지도 않는 관계. 그저 물 같은 평범한 관계. 그것을 나는 어린이의 우정이라 생각한다. 아이들의 우정은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하다. 사랑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사랑은 투명하고 맑다. 작은 균열에 와장창 깨어지지 않는다. 아이들의 맑은 눈으로 채워진 사랑의 우정은 밀도 높은 사랑으로 충만하다. 그리하여 깨어지지도 무너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밀도 높은 사랑은 언제나 옳은 법이다.


같은 공간에서 따로 놀아도 서로의 시간은 함께 완성되어 간다. 같은 공간에서의 시간은 함께 흐른다. 가끔 서로 다투어도 걱정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사과하는 법을 배우고 알아간다. 어른이 개입하지 않아도 서로 사과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풀어 나간다. 아이들의 우정은 위대하다.

나의 집 맞은편에는 노아, 루나가 살고 있다. 노아와 루나는 독일사람이다. 아이들은 서로의 언어가 달라도 통하는 법. 함께 놀며 서로를 배워간다. 나의 집 대각선에는 올리비아와 리암이 살고 있다. 그들은 키위다. 나의 영어가 부족해도 올리비아와 리암은 찰떡 같이 알아듣는다.

노아와 루나는 다른 학교, 올리비아와 리암은 리나와 같은 학교를 다닌다. 아이들은 2:30분이면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은 어김없이 서로의 집 문을 두드린다.


'Lina is in? Can I Play with her?'


때로는 리나가 이웃의 집으로 가서 묻기도 한다. 함께 노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나이다. 한국에서 이토록 원 없이 놀고, 친구집 문을 두드리며 놀아도 되냐고 물었던 때가 언제였었는지 까마득하다. 한국에서 리나가 친구와 이렇게 놀았던 적이 있었나? 한국에서 아파트 단지 안에서 가끔 저녁에 이웃집 아이들과 놀았던 적이 몇 번 있다. 하지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저녁 6~7시까지 놀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럴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모두 학원을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가 대부분 맞벌이를 하기에 방과 후 함께 놀기는 어렵다.


때로는 리암과 올리비아와 함께 집으로 갈 때가 있다. 리암과 올리비아는 자전거를 타고 리나와 나는 걸어서 집으로 향한다.


같은 학교, 같은 방향, 같은 언어. 같다는 것은 때로는 소속감을 준다.


뉴질랜드 교육에서 강조하는 함께는 낯선 이방인에게는 필요하다. 리나는 학교와 동네 이웃으로부터 소속감을 얻고, 그것으로부터 안정감을 느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은 집 앞에서 무수히 많은 시간을 많은 날을 함께한다. 함께 하는 시간 동안 완성될 아이들의 세계는 서로에게 스며들게 되겠지.

아오테아로아에서의 시간, 물, 바람은 구름을 따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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