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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은 Oct 11. 2021

약은 약사에게 병은 의사에게?

정물 2019/07 니은


 아랫집 성화 언니네는 5남매였다. 그 집의 아저씨 직업은 특별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머니의 부업 같은 직업은 잊을 수 없다. 체한 사람을 고치는 일을 했는데 그 집의 마당에서 모든 게 이루어졌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기다랗고 오래된 나무의자가 놓여 있었다. 체한 사람들이 누런 시금치처럼 숨이 죽어 앉아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아줌마의 손길이 닿으면 다시 생기가 돌았다.

 나는 이 광경을 숨어서 보곤 했는데 순전히 낮은 돌담 때문이라 생각한다. 낮은 담장 옆에서 아픈 사람들을 대놓고 쳐다볼 수는 없어서 때로는 숨바꼭질을 하다가 담장의 구멍으로도 보고, 옆의 놀이터 담벼락 위에서도 슬쩍슬쩍 보았다.

 그때는 체한 게 뭐길래 병원에서도 고치지 못해 이렇게 간판 하나 없는 이웃집까지 오나 싶었다.

 체했다는 것을 정확히 알지도 못했다. 나는 그게 아픈 정신을 고치는 일이라 어렴풋이 생각하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한쪽 손을 환자의 입에 집어넣고 한쪽 손바닥으로 환자의 등을 아주 세게 쳤는데 그러면 '컥'소리와 함께 아픈 사람 입에서 덩어리 같은 게 툭 튀어나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의 몸에서 독을 빼내는 것 같았다. 그 손길과 처치가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독을 뱉은 사람은 물로 입을 헹구고 독을 몇 번 더 토했다.

 아주머니는 앉은 사람의 등을 계속 두드리기도 하고 등과 배를 동시에 쓰다듬기도 했는데, 독을 뺀 사람의 몸을 다독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 손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의 손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리스 신화의 마다스 왕은 탐욕의 상징이었지만 아줌마의 손은 아픈 사람을 고치는 신성한 손이었다. 그렇게 독을 뺀 사람의 영혼이 맑아지는 듯 보였고 눈빛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마법과도 같았고 약간은 기묘하기까지 했다. 병원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풍경이었다. 나는 봄이면 심한 피부 알레르기를 앓았는데 병원에 가도, 약을 발라도, 저렇게 순식간에 낫는 드라마틱한 일은 겪어보지 못했다.

 성화 언니네 집 마당엔 체한 사람들로 북적였고 얼마 후 그 집은 동네에서 첫 번째로 옥상이 있는 신식 주택으로 탈바꿈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 양반 손이 큰일 했어."

 그 집 옥상에 올라가 우리 집 낡은 슬레이트 지붕을 내려다보면 꼭 곰팡이가 핀 것처럼 얼룩덜룩하고 금방이라도 푹 꺼질 것처럼 허술해 보였다. 가끔씩 어디서 날아온 속옷이나 양말 따위가 새하얀 점처럼 튀었다.

 아주머니는 직접 키운 토마토와 고추 등을 따서 자주 가져다주었는데 나는 그것들을 먹지 않았다.

 언니네 신식 주택의 창은 밖에서 보면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처럼 보였고 그 눈은 그 집 담장보다도 높았다.  그때부터 나는 아줌마가 마법을 부리는 장면을 숨어서 보는 걸 그만두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토요일은 지금의 불금처럼 나에게는 불토였다.

 토요일 오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토요일 오후는 일요일보다 설레고 즐거웠다. 하지만 그 불토에 꼼짝없이 집 안의 비밀스러운 일에 동원될 때가 있었는데 나의 즐거운 토요일은 그야말로 재가 되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아버지는 한약을 직접 포장해서 파는 일을 했다. 내가 이 일에 동참해 일손을 도운 것은(전혀 자의적 동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는데 그 전에는 어려서 도울 수 없었던 건지 기억에는 없다. 그러니까 나는 아버지가 이 일을 아주 잠깐 한 부업 정도로 생각했는데 사실은 꽤 오랫동안 이 일을 하셨다고 한다.

 아주 잠깐 일손을 도운 게 다였지만 내 기억 속에는 그 냄새와 어둠과 지루함은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다.


 마루가 딸린 안방에는 대낮인데도 촛불을 켜 두고 이 빛조차 새어나가지 않게 문에는 커다란 이불로 가렸다.

내 남동생과 아버지, 어머니, 나까지는 확실히 있었던 것 같고 막내 동생은 너무 어려서 이 일에 낄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방 중앙엔 몇십 가지의 약재들이 분리되어 쌓어 있다. 약재를 앞에 두고 우리는 동그랗게 둘러앉아 단순 도동에 박차를 가했다.

각자 맡은 약재를 비닐 속에 정해진 양만큼 넣었다. 집중해서 모두 그 일을 했는데 숙이고 있는 얼굴들이 촛불 때문에 이리저리 일렁거렸다. 그 풍경이 꼭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같았다. 그들이 감자 먹는 데 집중하는 것처럼 우리는 약재를 담는 데 집중했다. 이따금씩 졸리면 감초나 칡을 질겅질겅 씹기도 하고 단맛이 지겨우면 시큼한 오미자를 한 움큼 씹기도 했다.

 아무도 말을 않고 슥슥 삭삭 비닐 뜯고 붙이는 소리만 들리면 그것마저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적막하고 고요해졌다. 오로지 촛불의 붉고 노란 혀만 살아서 넘실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나를 삼키고 네모난 집까지 홀랑 삼켜버릴지도 모른다.

 "뭐 하는 기라."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지면 나는 꿈벅 눈을 떴다. 촛불은 아무 일 없다는 듯 얌전을 떨며 살랑댄다. 촛불은 우리가 집중하며 고개를 숙일수록 날름거리며 집어삼킬 듯 커졌고 고개를 들면 다시 시치미를 뗐다. 그 사실을 눈치챈 건 나뿐이었다. 나는 그 음침한 촛불이 집을 태워 버릴까 봐 겁을 먹었는데, 그 집은 아버지가 산 우리의 첫 집이었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주인집과 마주 보며 세 들어 사는 집이 더 이상 아니었다.

촛불이 나를 불쏘시개로 노릴까 봐 꾸벅 졸다가도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아버지는 트럭에 상자를 가득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고 또다시 포장되지 않은 약재들을 싣고 오셨다.

나는 이 일에 대해 어머니에게 샅샅이 물어본 적이 없었다. 저질 품질의 중국산이 내 손으로 포장되어 국산으로 탈바꿈한 일에 대해. 어려서는 뭘 몰랐고 커서는 떳떳하지 못해 입 다물었다.

 아버지는 검은손에게 약상자를 넘기고 약간의 품삯 정도를 버셨겠지.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에 살았으니 거액을 버셨을 리는 없다.

 이제와 이런 것들을 기억해 내면서 어머니에게 그 약재들이 중국산이었냐고 물었다.(뭐야, 이렇게 쉽게 물어볼 수 있는 거였어. 어쩌면 시간이 지날 만큼 지났다 생각이 들어서였을까.)

"80년대는 중국산이 들어오지도 못했어. 죄다 국산이었지. 그게 다 한약방에 들어가는 약재들이었어."

"그런데 왜 숨어서 포장했어?", "다 불법이었잖아. 한약은 한의원에서만 취급해야 했으니께."

"그럼 아버지는 그걸 어디다 팔았어?", "시골에다 팔았지. 한의원은 비싸니께. 아빠는 싸게 팔었지. 그래도 약재가 좋다고 단골도 많았다 아이가."

 아, 그러니까 일단은 국산이었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선생님의 소싯적 이야기가 떠오른다.

선생님의 어머니가 냇가에 빨래를 하러 갈 때마다 막내인 선생님을 데려가셨다고 한다. 어렸던 선생님은 그 지겨운 빨래가 끝날 때까지 냇가 옆의 산 귀퉁이에서 놀곤 했다고. 시간이 흘러 그 겨울들을 떠올리면 어머니가 매일 맨손으로 얼음장 같은 물에서 그 많은 가족들의 빨래를 다 해 냈을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고 하셨다. 아낙들의 시끄러운 수다도 왁자지껄한 웃음소리도 모두 추위를 잊어보려 그런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선생님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그 일이 마음에 남아 바늘처럼 콕콕 쑤셨다고 한다. 어느 날 그 무거운 마음을 큰 형님에게 말하게 되었는데 큰 형님이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 몰랐냐? 그 물은 온천물이었단다! 껄껄"

 선생님은 이제까지 무거웠던 마음을 풀고 한참 웃었노라 이야기하셨다. 그제야 선생님은 어머니가 아낙들과 떠들며 웃어 젖히던 모습을 죄책감 없이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온천물'이 선생님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었다.

 더불어 가자면 중국산이라 생각했던 그 약재들이 다 국산이었단다. '국산'이 나의 죄책감을 사실은 꽤 덜어주었다. 하지만 한의사들에게는 역시 미안한 일이 되었다. 아버지의 트럭을 기다렸던 분들에게 조금이라도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면 바랄 게 없겠다. 아버지는 내가 그 일에 몇 번 동참하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그만두었다.

 

성화 언니네 큰 언니가 결혼을 했을 때도 어머니는 아주머니를 두고 말했다.

"그 양반 손이 큰 일 했어야."

신기한 것은 아빠의 '약장사'도 아주머니의 '체한 것 고치는 일'도 모두 불법이었다. 그런데도 아주머니의 일은 아직까지도 살아남았다. 그것은 자부심과 신념의 차이 아니었을까. 모두에게 이로운 신념은 불법이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 후 지금까지 축사를 혼자서 건사하신다. 곧 여든인데도 마른 체격에 어깨와 팔뚝에 근육이 울끈불끈 하다. 아버지의 근육들은 어떤 신념의 단련일까? 나는 이웃집 아주머니, 이제는 아흔이 다 된 분이 여전히 같은 일을 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 양반 손이 지금도 큰 일 한다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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