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짧았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 시원한 물을 괜히 또 들이킨다. 그분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이야기 중이다. 말이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잠시 적막이 흐른다. 뭔가 나에게 질문을 하신 것 같은데, 나는 딴 생각 하느라 듣지 못했다. 대답을 기다리셨던듯...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호주 이민 교회에 목사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왜 그래?' 내가 알지도 못하는 속 사정들,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머리가 멍해진다. 뭐라 드릴 말씀이 없다. 그런데 계속 나에게 묻는다. 물론, 모든 질문이 대답을 꼭 기다리는 질문은 아니다. '아 그렇군요.. 참나... 아... 에고... 휴....(또 다른건 없나?).' 공감해드리면 된다? 도저히 공감이 안된다. 일단 무슨 이야기가 판타지 소설같은 이야기다. 도저히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을 자신의 경험이다 말씀하시는데, 그 모든 결론은, 두가지다. 험담과 불평. 어김이 없다.
그는 내가 들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내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고, 힘든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걸 말할 시간도 없었고, 말할 관계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평소에도 그런 류의 말들을 많이 해 왔으니,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에게는 자연스러움이 나에게는 너무 부자연스러웠고, 거북한 주제였다. 사장이니 하지 말라 말도 못하고, 둘 밖에 없으니 다른 이에게 패스할 수도 없었다. 그 뻥 뚤린 수영장이 그렇게 갑갑하게 다가올줄이야.
나도 나름 성실하게 일하고, 꾀부리지 않고, 사장님이 가르쳐주시는 기술도 배우고, 또 그 외 삶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때는 좀 괜찮았는데 잘 가다가 꼭 삼천포로 빠진다. 그런데 그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나만 그걸 몰랐을 뿐, 그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루틴 같았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해 보았다. 얼마나 한 맺혔으면, 그 충격이 컸으면, 상처가 컸으면 그랬을까? 그래, 그럴 수 있다. 내가 모르는 더 큰 덩어리의 한맺힌 슬픔이 그의 가슴 한 구석에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 한들, 그 아픔을 다른 이에게 쏟아 내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이후 그 때를 떠올리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이민생활을 꾀 오래 했고, 자리도 잡고, 비록 이혼은 했지만, 자녀들도 있고, 집도 있고, 어머님 모시고 사는 성실한 가장이었다. 경제적으로도 부해 보였다. 하지만,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내가 만난 초창기 이민자의 모습은 내가 상상한 것과 너무나 달랐다.
아... 이게 호주 이민의 현실 이구나. (물론, 절대 전부는 아니다. 현실의 작은 한 조각이다)
몇 일을 그렇게 일한 후, 여름의 뙤양볕도, 타일옮기는 힘든 일도, 그 일에 비해서 힘들지 않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자 마자. 집 가까이 온 차 안에서 내리기 직전, 쉼 호흡을 세번 한 후 '사장님 더 이상 못하겠습니다' 하고 차 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 이후로 타일일은 꿈도 꾸지 않았다. 지금에서야 보면 참 죄송한 일이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2주 정도는 미리 말씀 드리고, 다음 일 할 사람을 구한 다음에 '사직서'를 드렸어야 했는데, 그냥 내 머리속에서 구상하고,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겨 버렸다. 물론, 계속 연락이 오셨다. 갑자기 일을 그만두면 하던 일을 마무리 못할것 같은 걱정 때문인지, 내가 일을 잘 하는 직원이었는지, 일은 좀 그래도, 잘 들어 주는 사람이어서 그런건지, 아직도 이유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사장님의 연락을 받지 않았고, 그동안 일 했던 정산도 필요치 않았다. 사실 이 바닥을 잘 몰랐기에 정확한 일하는 시간, 임금도 이야기 하지 않고 시작했기에, 갑자기 그만두는 것으로 퉁치려 했다. 참 생각이 짧디 짧았었다.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더 이상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이별을 고한 뒤, 나는 우울한 마음을 움켜쥔 체 호주나라를 뒤적뒤적 거린다. 살기는 살아야 하기에. 인생이 참 묘하다. 그분도 나도 다른 목적으로 '호주나라'를 들락달락 거리겠지.
바깥 날씨는 유난히 좋다. 왜 그리 좋을까? 호주는 여름 날씨가 너무 좋다. 손만 뻗으면 누릴 수 있는데, 그 손을 다른곳에 뻗어야 하는 그 마음... 누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