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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운경 Nov 20. 2022

고려왕릉을 찾아서

 

                강화도의 자연과 고려왕릉의 조성    


유서 깊은 강화도에는 섬 전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큼직한 산 네 곳이 있다. 최남단의 기운이 잔뜩 서린 마니산(472m)을 필두로 하여 북으로 진강산(441m), 혈구산(466m),  그리고 고려산(436m)으로 이어지는  멋진 3 연봉들이 북녘 땅을 그리워하는 양 북쪽으로 내달리고 있다. 대개 호산객들은 마니산이나 고려산을 주로 찾는다. 혈구산에서 퇴모산으로 그리고 국수봉으로 이어지는 코스도 긴 능선을  따라 호젓하고 수려한 강화도의 자연을 만끽 할 수 있다. 동막해변에서 마니산의 서쪽 줄기에 올라  긴 바위능선을 오르다 보면 서해를 배경으로 가파르고  수려한  바위를 지나 이윽고 단군이 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는 마니산 참성단에 오른다.

마니산 정상 참성대

이 능선을 타고 산을 오르다 보면 왜 단군이 이곳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 이유를 알 수 있는 만큼 산의 기개와 힘이 강하게 느껴진다.   강화도의 산과 들판의 농경지, 갯벌 그리고 수 많은 수로와 연못은 각종 텃새와 철새의  보금자리다. 마니산 맞은편의 진강산 정상에서마니산 및 혈구산과 고려산을 통쾌하게 조망할 수 있다.  그러나, 진강산의 가치와 매력은  무엇보다도 산기슭에 여러 고려왕릉을 고 있다는 것이다.  강화도에는 구한말 외세의 침탈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고 조선시대 청나라의 침략, 그리고 고려 항몽시대의 항전의 의지가 서린 땅이다. 고려 항몽시기는 지금의 고려왕릉 조성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답사의 매력과 길


고려왕릉은 대부분이 북한의 개성 부근에 산재하여 우리가 가볼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고려 왕조가 항몽 시대에 강화도로 천도한 이래로 왕릉이 강화도에 수 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강화도의 문화사적 가치 매우 높다.  고령왕릉이 강화도에 자리하게 된 이유는 당시 대 몽고항쟁시 무인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최우가 수군에 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바다로 둘러싸인 강화도에서 항쟁을 계속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강도시기 (1232~1270) 동안에 죽은 왕과 왕비  등의 능을 강화도에 조성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왕릉은  찬란한 조선왕릉의 빛에 가리어, 관심도 없고 찾는 이도 없는 적막한 진강산 및 고려산의 깊숙한 산기슭에 몇 기가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려왕릉에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져 있는 것은 아마도 우리 국민들의 편식성 문화재 관람에도 그 원인이 있겠거니와 조선왕릉 비하여 규모가 미미하고 고려왕릉에 이르는 도로 및 인프라의 취약함이 큰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들이 강화도를 방문하여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나타나는 녹음의 풍경과 어우러진 고려왕릉을 본다면 감탄의 외마디를 자아낼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첫째는,  남한 지역에도 고려왕릉이  기 있었나 하는 의아함과 호기심발동할 것이며 둘째로는, 조선왕조 500년을 뛰어넘는 깊은 역사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강화도 진강산 및 고려산의 호젓한 산길을 걸으며  두텁고도 신선한 자연환경의 매력을 흠뻑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답사의 순서는 강화읍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고 진강산 남쪽의 탑재 3거리에서 하차하여 가릉을 먼저 답사하고 내친김에 진강산 정상을 넘어 하산 길에 석릉과 곤릉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리고  고려산으로 이동하여 홍릉을 답사 할 것이다. 신선한 자연의 내음, 초록의 오솔길, 어린아이 같이 잔뜩 머금은 호기심, 설레는 마음은 발걸음을 재촉한다.


                                무신란과 무인정권


무신란의 경위


강화도의 왕릉은 모두 몽고 항쟁 시의 무정권하에서 조성되었으므로 여기에서 간단히 고려 무정권의 성립 및 경과에 대하여  간단히 짚어보는 것이 본 답사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고려 의종(1127~1173) 때 무신들에 대한 차별 문제 등으로 인하여 정중부, 이의방, 이고에 의하여 무신난이 일어났고 이들에 의해서 의종이 폐위되고 의종의 동생인 명종이 세워졌다. 의종은 선대 인종(1109~1146)으로부터 비록 시문에는 밝으나 놀이와 잔치 등을 좋아하여 군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증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종은 맏아들인 현(의종)을 무시하고 둘째 아들 대령후 왕경(후에 명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는데 여기에 적극 반대하여 맏아들 현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 사람이 정습명이었다. 인종은 정습명에게 현(의종)이 올바른 왕의 길을 걷도록 보필하도록 부탁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의종은 즉위 후 왕권강화의 명목으로 문신들을 멀리하는 가운데 정습명의 조언조차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신들은 문신들에 비하여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는데 두고두고 쌓여왔던 불만이 의종의 방탕한 사냥 놀이 및 잔치에 들러리로서의 노릇만을 해야 했던 무신들이 이를 계기로 들고 일어섰던 것이다(1170). 그런데, 역사는 승자의 몫이라 했던가. 의종이 이렇게 방탕한 생활에 무신들을 업신여기면서 무신의 난을 자초했던 것일까? 실제로 의종 실록은 명종 때 최세보에 의하여 편찬이 되었는데 그는 이미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던 때라 무신들 입장에서는 무신정변을 매우 미화하거나 정변의 당위성을 설명 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실제로 의종은 서경에서 신령(新令)을 반포하여 왕권강화 및 사회통합을 모색하려고 하는 등의 노력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의종 때 그를 보좌하고 있었던 무신을 포함한 성향이 다른 관료집단들의 상호 이해 및 갈등으로 인하여 무신정변이 일어났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중부를 거세한 경대승


명종 3년 김보당이 의종을 다시 세우려다 실패한 후 이의방의 지시를 받은 이의민에 의해서 의종은 무참히 살해당한다. 이후 명종(1131~1202) 때는 정방을 설치한 정중부, 이의방, 이고에 의한 세력이 유지되다가 이의방이 이고를 죽이고, 이의방은 다시 정중부에 의하여 제거되어진다. 이후, 정중부 일인의 권력독점과 권력남용을 계기로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이고 권력을 쥐었는데 경대승은 무신정변 때 17세에 불과했었으나 이후 명종이 정중부 등의 무신들의 횡포에 실증을 느껴 견제하려고 등용시키자 이를 기회로 정권을 잡을 결심을 한 무인이었다. 경대승이 도방을 설치하고 5년여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은 후 병으로 죽자 왕권 회복의 기회를 잡은 명종은 재차 경주에서 절치부심 하고 있었던 이의민을 불러들인다. 이때만 해도  난을 일으킨 주역의 무신들이 서로 죽이고, 병사하여 왕권을 새롭게 확립하여 무신정권을 종식할 수 있었을 것이나 명종의 나약함은 이러한 절호의 기회스스로 포기해 버린다.


이의민의 등장


이의민은 경대승이 정권을 잡은 후 제거 대상이 되어 위협을 느껴 경주로 피신하던 중 때마침 명종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명종이 이의민을 불러들인 것은 그의 패착이었는데 결국 이의민이 권력을 잡게 되고 그는 갖은 폭정과 어지러운 정사로 인하여 결국 최충헌에게 살해당한다(1196 명종 20년). 여기에서 보통 이의민이 경주출신의 천민 부모 밑에서 자라났고,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묘사되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라는 기치 아래 왕과 관료들이 정권을 쥐는 정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왕조를 건설해 보고자 하는 뜻을 품은 무인이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가 천민 출신이라 이러한 혁신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지 모른다.


최씨 무인정권의 시대가 열리다


최충헌(1149~1219)은 당시의 무신정변을 비롯한 어지러운 세상을 이용하여 본인도  출세를 할 기회를 계속 엿보고 있었는데 이의민이 미타산에 머물고 있을 때 급습하여 이의민의 목을 베었다. 최충헌은 명종을 창락궁에 가두어 죽게 하고 명종의 아우를 왕으로 추대하는데 곧 고려 신종(1144~1204)이다. 신종은 재위 기간 내내 최충헌의 위세에 누리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신종 사후 그의 아들인 희종(1181~1237)이 즉위하였는데 최충헌을 은문상국(恩問相國)이라고 부르는 등  최충헌의 위세에 눌려 지내다가, 왕준명과 음모하여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귀양지에서 죽었다.  이어서 강종(1152~1213)이 즉위하였는데 그는 명종의 아들로서 이 역시 본인의 희망이 아닌 무정권에 의한 운명적인 즉위였다. 강종은 원래 명종의 맏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올라야 할 몸이었으나 최충헌이 명종을 강화로 유배시킬 때 같이 유배되어 13년간의 유배생활을 하여야 했다. 그랬던 그가 뒤늦게 희종이 폐위되자 최충헌의  필요에 의해 명종의 아들로 하여금 다시 그의 나이 60에 왕위를 계승케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순전히 최씨정권의  농락에 의  추대에 불과하였다. 강종은 결국 재위 2년을 못 채우고  지병으로 인하여 죽는다. 강종에 이어 그의 아들인 고종(1192~1259)이 즉위하였다. 고종은 조부인 명종이 유배될 때 황해도 안악현으로 유배되었는데 역시 최충헌의 농락에 의하여 부왕인 강종이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기 위하여 개경으로 귀환했을 때 같이 개경으로 돌아왔다. 고종 때의 국제정세는 거란, 금, 몽고 등이 지속적으로 고려에 시비를 걸어오고 침입을 하는 등 민생이 피폐하였다. 최씨정권은 쉽사리 외세의 침략에 굴하지 않고 외부의 적을 맞아 끝까지 싸우는 정신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몽고는 고려에 수많은 공물을 요구하는 등 고려를 지속적으로 압박하였는데 몽고사신 착고여가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는 도중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빌미로 몽고는 본격적으로 고려 침입을 노골화하였는데 바야흐로 대 몽고 항쟁의 시작이었다.


강화도 도읍시대 (고려왕릉 조성시기)


최충헌이 71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그의 아들 최우(1166~1249)가 권력을 이어받았다. 최우가 집권한 이래 몽고와의 관계가 일로 악화되어 방어를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다 (1232년 6월). 몽고는 고려가 다시 개경으로 환도할 것을 요구하면 공물을 계속 요구하였다. 이에 최우는 굴하지 않고 재차 침입한 몽고군의 살리타를 전사시켰다.   이후 몽고의 재 침략에 의하여 고려의 국토는 처참하게 몽고군에 의하여 유린당하였다.  1249년에 최우가 병사하자 그의 아들 최항(1209~1257)이 권력을 승계하였다. 최항도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을 미루고 계속 항전하다가 1257년에 죽고 다시 그의 아들 최의(1238~1258)가 권력을 승계한다. 그러나 최의는 권력유지에 실패하고 그다음 해 유경, 김준 등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최씨정권 이후의 무인정권


최의의 죽음으로서 최씨 무인정권의 막은 내리고 있었으나 이후 고종의 죽음 뒤로 김준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고종의 맏아들 원종이 즉위하게 된다. 원종은 부왕인 고종이 원나라와의 전쟁을 끝냈을 때 태자의 신분으로 인질로 원나라에 보내어졌다. 고종이 죽자 원종이 즉위하였는데 당시는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김준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원종은 원나라의 힘을 빌어 개경환도를 통한 왕권회복을 꾀하였으나 김준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김준은 원종의 사사를 받은 임연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임연 또한 개경환도를 원치 않았고 지속적인 대몽항쟁 노선을 유지하였다. 임연 또한 자신이 무신으로서 오랜 무신정권의 달콤한 권력의 맛을 놓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임연과 원종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임연은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왕으로 추대하기도 하였으나 원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고 다시 원종을 복위시켰다. 다시 임유가 죽고 그의 아들 임유무가 교정별감이 되어 권력을 잡았는데 개경환도를 원하는 원종과 계속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나라의 세력을 뒤에 업은 원종은 임유무를 제거하였고 개경환도를 반대하고 고려의 자주권을 주장하는 삼별초의 난을 평정하고(1273) 본격적인 원나라에의 속국으로의 길을 밟는다. 이상으로 고려 무정권의 역사를 간략하게 줄여 보았는데 강화도의 고려왕릉은 모두 무정권이 기승을 부리고 있던 강화도 천도기의 상황이었고 왕권이 무신에 의하여 유린을 당하였던 시기이었음을 볼 때 왕릉의 규모나 석재의 쓰임을 매우 간략히 하였으리라 는 짐작이 간다.


                                      가릉(嘉陵)

석실로 통하는 입구는 조선왕릉과 다른 입체감을 보여준다

가릉은 사적 제370호로서  고려 24대 원종의 왕비인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무인정권 시기 집권자였던 최우(崔瑀)의 외손녀이다.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로 책봉되자 태자비가 되었으며 그다음 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그리고, 고종 31년(1244년)무렵에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었다. 그 후 충렬왕이 즉위(1274)하자 순경태후로 추존되었다. 무덤 주변의 석조물은 파괴되어 없어졌고 ,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보수하였다.                                                                                                                   가릉은 원종의 선대인 고종 때 조성된 왕릉으로서 이때까지만 해도 최우가 여전히 정권을 잡고 있었던 때였고 계속적인 항몽의 시대였던 것이다. 가릉은 탑재 삼거리에서 진강산을 바라보며 북쪽 방향인 능내리에서 약 15분여 마을 길을 거슬러 오르면 나타난다. 몽고 항쟁으로 민생이 피폐하여 가는 어려운 시기의 왕비의 무덤이라 그 측은함과 쓸쓸함이 마침 불어오는 3월의 쌀쌀한 봄바람에 잔잔한 서운함이 더하여진다.  가릉 입구의 안내표지를 따라서 비스듬히 굽은 길을 오르려니 서서히 능의 모습이 보인다. 서서히 긴장되기 시작한다. 얼핏 보아도 기존의 능의 형태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주변의 자연경관과 어울려 신비한 듯한 기분이 감돈다. 긴장되나 긴장감을 초월하는 호기심, 즐거움, 기쁜 마음에 발걸음을 오히려 천천히 옮겨본다. 이러한 긴장감을 한꺼번에 없애고 싶지 않다. 서서히 접근한다. 이 가릉이 이러한 기분을 자아내는 것은 여타의 능과는 달리 뚜렷한 지상식이어서 석실로 통하는 입구가 훤히 보이고 그 위에 봉분이 얹혀 있어 매우 특이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정형적인 석가탑과 같은 신라의 삼층석탑과는 전혀 다른 형태인 다보탑과 같은 이형석탑에서  느껴보는 새로운 습이다.


이밖에 우리가 왕릉을 보면서 대개 감상하는 것이 여러 가지의 석물(石物)인다.   먼저 문인석을 보면  무뚝뚝한 표정에 관모 및 관복을 착용하고 허리에 각대를 하였으며 홀(笏)1)을 양손에 들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조선왕릉에서도 크게 바뀌지 않는 형식이다. 과장되도록 위로 치켜든 눈은 조선시대를 훌쩍 넘어선 해학적이고 고고한 맛을 느끼게 한다.

홀을 두손에 쥐고있는 문인석. 올라간 눈과 표정이 해학적이다

한편 무덤의 뒤편에는 두 마리의 동물을 돌로 조각한  석수(石獸)를 배치하여 능을 수호하고 있다. 석수의  몸통은 사각으로 단순히 표현하여 손발이 생략되고 단지 머리를 호랑이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호랑이를 표현한 수족을 생략한 석수

이러한 종류의 석물들은 우리가 능을 답사할 때 특별한 재미와 흥미를 전달하여 주는  등 공신이다. 전체적으로 조선왕릉에 비하면 그 규모나 석물의 종류에 있어 확연한 차이가 있으나 항몽시대의 열악한 환경과 왕권의 약화를 감안해 볼 때 규모의 축약은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전체적으로 신비스러움이 느껴지고, 조선 5백 년 역사를 훨씬 뛰어넘는 깊은 역사에서 우러러 나오는 고풍스러운 맛을 만끽하게 한다. 이러한 감상은 아마도 평소 거대하고 웅장한 조선왕릉에 만 익숙해져 있기도 한 탓이기도 하겠거니와 , 주위의 호젓하고 그윽한 정취에서 우러나오는 요인도 있을 것이다.


                 강화능내리석실분(江華陵內里石室墳)

진강산 초입의 능내리석실분


능내리석실분은 가릉의 바로 위쪽에 있는 고려시대의 귀족의 능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이 능도 역시 가릉에 못지않은  신비함 품고 있다.  먼비스듬한 구릉지대에 펼쳐지는 석축으로 이루어진 4단의 시원한 묘역이 눈에 띈다. 대개 왕릉의 묘역은 주된 봉분과 봉분을 보호하는 병풍석, 봉분 주위를 두르는 난간, 무덤의 3면을 감싸는 곡장, 무덤 수호 및 복을 기원하는 기능의 석수 및 망주석등이 위치하는 1단, 그리고 그 아래 석축 등의 경계로 단차를 두고 장명등과 문인석이 위치하는 2단, 마지막으로  무인석이 좌우로 위치하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왕릉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리석실분에서는 능묘 감상의 감초  봉분을 둘러싼 난간석 및 석수 시야에 확연하다.  이 난간석에는 구성요소가 몇 가지 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소담스럽다.  먼저 난간석을 보면 가느다랗길고 둥글게 깎아 동자석주 및 대석주에 끼워 맞춘 죽석이 왠지 마음을 편안하고 부드럽게 해주는 듯하다. 동자 석주 및 대석주에는 머리 부분에 운문을 조각하였고 전체적인 인상이 저 조선왕릉의 화려하고 거대한 난간석에 비할 바 아니나 오히려 더 애착이 가고 한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유는 왜 일까?

원통의 난간석이 동자석주 및 대석주에 걸쳐있다. 동자석주  머리부분에 운문이 새겨져 있다.

이 석실분에서는 저 조선 세조대왕의 광릉에서 볼 수 있는 난간석이 문득 생각난다. 세조는 본인의 능을 조성할 때 백성의 노고를 고려하여 능을 조촐하게 조성할 것을 명하였다. 그 조촐함과 소박함 오히려 병풍석을 위용 있게 두른 여타의 왕릉보다 오히려 더 잔잔한 위엄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세조의 광릉(오른쪽)에서 볼수 있는 난간석

한 가지 우리를 즐겁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석수(石獸). 학자들은 이 석수를 해태나 호랑이로 이해하고 있는 듯한데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뚜렷이 구분이 가지 않는다. 다만, 이 석수에지극히 해학적이고 무덤을 수호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할 때의 흥미진진함이 있다. 이곳의 석수에서는 가릉과는 달리 어느 정도 동물의 모습을 닮았고 두 다리의 표현도 명확하다.

다리의 모습을 명확히 표현한 석수

숲에 둘러싸인 비교적 안정되고 넓은 공간감의 쾌적함 느껴진다. 봉분 주위의 석재의 절제와 결구의 간단함은 오히려 사무침과 위엄이 깃들어 보인다.


                                      석릉(碩陵)

낮은 암산을 배경으로 탁 트인 석능

석릉은 고려 제21대 왕 희종의 능이다. 희종은 재위기간 내내 무신정권의 최고 실력자인 최충헌에 의해서 억눌려 살다가 급기야 강화도로 귀양 간 후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왕이다. 최충헌은 명종 때 당시 무신정권의 실력자인 이의민을 제거한 후 명종을 강화도로 유배시키어 그곳에서 죽게 하였다. 이어서 신종, 희종, 고종 때에 이르기까지 왕권을 농락하며 긴 권력의 최정상에 군림하였다. 이러한 막강한 최충헌의 위세에 눌린 희종은 그야말로 가련한 처지에 놓이는 신세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석릉으로 가는 굽디 굽은 긴 오솔길은 한층 적막하고 착잡하게 다가온다. 신발에 밟히는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는 세상만사의 온갖 상념 소환한다.  석릉으로 가는 길은 수림이 우거진 호젓한 숲길을 구불구불 돌아며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곳을 찿는 또 다른 이유다.

석릉으로 가는 길. 강화도의 고려왕릉 답사길은 늘 자연이 함께한다

한편으로는 강화도의 아름다운 숲길에 쾌재를 부르며, 또 한편으로는 애상에 젖으며 능에 도착하니 ㄷ 자로 감싸는 듯한 곡장이 눈에 띈다. 이미 권력을 잃은 왕릉이라 규모 면에서도 매우 소탐 하다. 다만, 능에서 바라보는 얕은 앞 산의 줄기 넘어 탁 트인 전망만이 불우했던 희종을 로하고 있다. 비록 규모는 작더라도 봉분 및 문인 석등이 위치하는 구역을 계층석으로 뚜렷이 구분하고 있다. 문인석의 모습은 정교하지 않고 정방형의 몸통의 모습만을 갖추고 있고 옷자락 등은 간단하게 표현하였다. 관모를 착용하였으며 전체적인 얼굴의 모습도 턱이 지나치게 뾰족하게 묘사되어 있고, 얼굴의 모양에서도 기교가 없이 무뚝뚝하고 표정도 매우 어둡게 느껴진다.

문인석

반대쪽의 문인석은 몸통에서 잘려나간 머리 부분이 몸통 위에 올려 놓여 있는데 한층 더  측은하게 다만 앞을 바라보고 있다.

목이 잘려나간  문인석

                                        곤릉(坤陵)


곤릉은 고려 강종의 비 원덕태후(? ~ 1239) 유씨의 능이다. 고종은 원태후의 아들이다.

푸른 소나무와 탁 트인 전망은 방문자에게 휴식과 즐거움을 준다

강종 또한 무정권의 필요에 의해서 무신에 의해 옹립된 왕으로 무려 60세에 왕으로 추대되어 불과 1년 8개월간의 재위기간에 불과하였다. 말할 것도 없이 짧은 재위기간 내내 최충헌의 통제하에 제 뜻을 편 일은 하나도 없었고 다만, 고종이 강종의 뒤를 잊게 한 것뿐이었다. 원덕태후는 강종 사후에도 25년을 더 살다가 고종 26년 때 죽었다. 강화도의 여타 왕릉과 마찬가지로 곤릉 또한 도굴꾼들에 의해  완전히 도굴되어 그 흔적들이 크게 훼손되어 버렸는데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는 봉분을 보호하는 병풍석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장대석과 봉분 앞의 비석과 능역을 구분하는 계층석만이 남아 있다. 곤릉에서는 지형적인 특색으로서 봉분 및 비석 구역의 밑에 있는 하계구역에 비탈진 언덕을 축대로 쌓아 올렸고 축대의 맨 위에는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주춧돌이  4개가 남아있는 것이 눈에 띈다.

건물 추정지로 생각되는 축대

 조선왕릉의 정자각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협소한 능역 구역을 최대한 활용하려고 하는 흔적이 엿보인다. 보통 왕릉에는 모두 갖추어져 있는 문인석 등은 소실되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곤릉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강화도의 산야는 왕릉 답사 이외의 특별한 기쁨을 선사한다.   


                                       홍릉(洪陵)


고려왕릉은 자연경관이 뛰어난 곳에 조성되었다

홍릉은 고려 제23대 고종(1192~1259)의 능이다. 고종 역시 계속되는 무정권 하에서 실세 없는 왕이었다. 1219년에 최충헌이 죽자 그의 아들 최우가 권력을 승계하였고 본격적인 대몽항쟁의 시기로 접어든다. 1232년 대몽항쟁을 위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겼고 최우는 1249년 병사한다.  그의 아들 최항이 권력을 승계하였고 1257년죽고 그의 아들 최의가 권력을 승계한다. 그러나, 최의는 다시 유의와 김준에게 죽임을 당하여(1258년) 최씨정권의 기나긴 막을 내린다. 그러나 고종이 죽은 이후에도 김준에 의한 무신정권은 계속 이어진다. 이렇듯 고종도 막강한 무정권에 휘둘리며  밖으로는 몽고와의 어려운 항쟁을 계속해야 하는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다.  

홍릉은 강화도 고려산의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강화 읍에서 고려산 방향으로 기분 좋은 녹음의 길로 몇 분 달리면 곧 나타난다. 여타의 고려왕릉과 마찬가지로 능으로의 길은 푸른 녹음의 길이다.  강화 고려왕릉 답사는 전원의 길이요, 숲의 길이요, 녹색의 향연이다.  능이 조선왕릉과 같이 커다란 규모로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상쾌한 자연의 길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며 능의 신비함은 답사의 즐거움을 더한다.

봄이면 진달래의 향을 맡으며 오를 수있다

강화 고려왕릉의 특색 중 하나가 넓지 않은 자연적인 지형을 잘 이용하여 능역을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홍릉에서도 뚜렷이 느낄 수 있다. 각 능역의 구획이 비교적 단차가 높아 계층석 높게 조성하였다.  비탈진 언덕을 구불구불 오르다 전망이 탁 트인 곳에 절묘하게 위치하다.

봉분은 둘레를 장방형의 석재로 둘렀고, 문인석은 양쪽에 2기 씩 총 4기가 세워져 있는데 강화 고려왕릉 중에서는 문인석의 수가 많다. 문인석은 관모를 쓰고 있고 표정은 여타 고려왕릉에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위로 치켜 올라간 눈, 튀어나올 듯 과장된 눈망울, 늘어진 귀 등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세부묘사에 있어서의 차이는 있어도 조 선왕릉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홍릉의 문인석

화도의 고려왕릉은 극히 최근에 ( 석릉2001년, 가릉, 곤릉 2004년, 능내리석실분 2006년~2007년) 발굴된 것으로, 그만큼 귀중한 고려문화재가 하마터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매우 높았다고 생각된다. 거기에다, 강화도에서의 대몽항쟁의 특수성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우리가 발길을 닿을 수 있는 곳에 고려왕릉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강화 고려왕릉을 답사한다는 것은 매우 뜻깊고 반드시 한 번쯤은 들려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 홀(笏)은 조선 시대에, 벼슬아치가 임금을 만날 때에 손에 쥐던 물건으로서 예부터 왕이 이야기를 하면 신하들이 이 홀에 받아 적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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