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궁
외삼문에서 바라본 칠궁. 구불구불한 이야기가 흐르고 있는 듯하다
청와대안의 궁정동에는 칠궁이 있다. 칠궁은 조선의 왕을 낳은 친모임에도 왕비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후궁7인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이곳은 조선의 엄격한 신분위계 질서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에서는 정비가 아니고서는 아무리 왕을 생산하였어도 종묘에 배향 될 수 없었다. 왕을 생산한 후궁으로서는 세계문화유산 종묘에 배향되지 못한 아쉬움도 크리라. 아늑하고 고즈넉한 칠궁에 들어서면 칠궁의 냉천에서 샘물이 흐르듯 다양하고 흥미있는 궁궐의 이야기가 샘솟듯 흘러 나온다. 대중들은 세상에 널리 회자되는 정사에 익숙하다. 그러나, 그 밑에서 숙성되듯 감칠맛을 돗구는 후궁들의 애절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귀를 쫑긋거리고 숨을 죽인다.
내가 칠궁은 찿은것은 10여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는 칠궁을 관람하려면 반드시 신원조회를 거쳐 청와대 관람허가를 거친 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신분조회 후 버스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청와대 구경이 목적이었지만 나의 주목적은 칠궁관람 이었다. 당시 칠궁관람은 청와대방문객 중 희망자에 한하여 칠궁관람이 허용되었다. 많은 방문객 중 칠궁관람 희망자는 오로지 나 하나였고 칠궁을 소개하는 안내자로부터 극빈 대우를 받으며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왠지 '칠궁 '이라는 짧은 두 글자에 무엇인가 특별하고 흥미있는 것이 있겠구나 하고 직감했다. 특히 칠궁이라는 어감이 몹시나 마음에 들었다.
칠궁에 들리면 조선 선조 때부터 대한제국 말기의 고종 때 까지의 장구한 조선 왕실의 저변에 흐르는 지하수와 같은 맥을 살펴 볼 수 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예측할수 없는 곳으로 여러 여인들을 실어나른다. 수레바퀴가 닿는 곳마다 여인들의 희망과 절규가 뒤섞인다. 순헌왕귀비의 사당 덕안궁 앞에서면 구한말 대한제국 당시의 급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에 대응하지 못하고 결국 나라를 잃어버리는 애통한 사연이 우리들의 가슴을 친다. 현실의 국제정세는 옛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나라를 망친 위정자들을 탓하기도 보다 앞으로의 우리의 나아갈 지혜로운 방향키를 모색할 때다.
육상궁을 돌아보며 각각의 사당 뿐만 아니라 그녀들이 묻혀있는 묘를 찿아 보는것도 매우 의미있고 현장감있게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왕릉에 비견할 규모는 아니나 그 호젓함과 고요함 그리고 깊고 두터운 산림에서 뿜어나오는 자연은 왕릉조차 필적하기 어렵다.
저경궁(儲慶宮)
저경궁
저경궁은 조선14대 선조의 후궁으로서 인빈김씨(1555년 ~ 1613)의 신위를 모신 궁이다. 인빈 김씨( 1555 ~ 1613)는 본관이 수원인 사헌부감찰 김한우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났다. 인빈김씨는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후에 원종으로 추존되는 3남 정원군을 포함하여 선조와의 사이에 4남5녀를 두었다. 그러나, 선조의 첮째 후궁인 공빈김씨가 임해군과 광해군을 먼저 낳았으므로 인빈김씨의 아들들은 왕위에 오를 순위가 아니었다. 한편, 공빈김씨가 광해군을 낳고 얼마 안가 죽자 인빈김씨가 선조의 사랑을 독차지 하게 된다.
선조는 인빈김씨의 둘째 아들인 신성군을 지극히 사랑했고 세자로까지 삼으려 했다. 그러나, 신성군은 1592년 임진왜란중 어린나이에 병사한다. 선조가 죽자 광해군이 왕에 즉위하였다. 첫째 왕비인 의인왕후는 자식이 없었고 이어 계비인 인목왕후 김씨의 소생인 영창대군이 왕위에 올라야 할 일이었으나 4살에 왕위에 오르기에는 너무 어렸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필연적인 왕권강화의 명목아래 어린 영창대군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심지어 광해군은 인목왕후를 폐위하여 덕수궁에 유폐하였다. 정원군의 동생 능창군도 역모를 꾀한다고 하는 누명을 쓰고 강화도 교동도에 유폐된 후 그곳에서 자살하였다. 이에 대북정권에 큰 불만을 품고 있던 서인과 남인, 그리고 소북의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능양군은 반정을 일으켰다 (1623,인조반정). 소북은 본디 대북과 같이 같은 북인 이었으나 대북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인조는 반정에 성공한 후 마땅히 왕위를 물려받을 선대왕이 없었으므로 그의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서 왕(원종)으로 추존하였다(1627, 인조5년). 정원군은 인빈김씨의 아들이었으므로 인빈김씨는 왕을 생산한 후궁이 된것이다. 정원군이 원종으로 추존된 것이 인조5년의 일이었으므로 인빈김씨는 살아생전에 추존왕의 어머니이자 인조의 할머니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인빈김씨는 선조의 사랑을 배경으로 의인왕후와의 사이도 좋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의인왕후를 제쳐두고 인빈김씨를 대동하고 피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의인왕후는 공빈김씨의 자제인 임해군과 광해군을 적극 감싸고 옹호하였다. 인빈김씨는 공빈김씨와도 선조의 자식을 먼저 가지려고 애쓰는 등 경쟁적이고 사이가 매우 안좋았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광해군을 옹호하는 등 처신을 잘하여 그녀의 남은 생애를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인조10년에 인빈 김씨의 사당을 큰 규모로 하고 인조 14년에는 인빈김씨의 신도비를 보기드문 큰 묘모로 건립하였다. 영조는 인빈김씨를 예우하여 순강원에 직접 나가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인빈김씨의 위패는 순종2년에 육상궁으로 옮겨졌다.
순강원 능침구역. 곡장을 둘렀고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등과 석호, 석양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동자석은 왕릉에 있어서 매우 드믄 경우이며 조각 솜씨가 매우 우아하고 아름답다 순강원 일대의 숲에서 발견된 진박새, 어치, 곤줄박이
순강원은 인빈김씨의 묘로 경기도 남양주시에 위치한다. 순강원은 천겸산의 남쪽 기슭아래 왕릉으로서의 규모와 석물을 충실히 갖추어 조성되었다. 인조는 인빈김씨가 그의 할머니 였으므로 묘를 원으로 높여 순강원으로 하고 신도비를 세우는가 하면 정자각 및 비각을 조성하였다. 순강원의 능침구역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묘 앞 양쪽의 동자석이다. 동자석은 대개 사대부의 무덤에 조성되곤 하였다. 사후에도 죽은자의 시중을 들 거나 제례를 행하는 데 있어서 시중을 드는 역할이 있었던 것 같다. 순강원 동자석의 얼굴이나 옷 차림새는 매우 세련되어 왕릉으로서의 면모와 석물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사대부 묘의 동자석과 비교되는 세부묘사와 세련미가 돋보인다.
대빈궁(大嬪宮)
대빈궁. 사당의 기둥을 둥글게 하여 세웠다. 장희빈은 한때 국왕의 왕비였으므로 대우를 달리 한 듯하다. 대빈궁은 조선숙종의 후궁이며 경종의 생모인 희빈 장씨의 신궁이다. 숙종27년 (1701년) 희빈이 사망한 후 신위를 정동에 있는 집에 모셨다가 경종 2년(1722년)에 희빈에게 옥산부대빈의 칭호를 내리면서 사당을 현재의 교동인 경행방에 세웠다. 대빈궁은 고종7년(1870년)에 육상궁으로 옮겨졌으나 얼마후 경행방으로 다시 돌아갔고 1908년에 다른 궁들과 함께 다시 육상궁으로 옮겨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장희빈에 관한 이야기는 숙종시대의 왕을 둘러싼 인현왕후와 장희빈 그리고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최씨등 여인들의 사랑과 갈등 그리고 암투가 잘 그려져 있다. 이러한 여인들은 각 정파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명종때 태동한 동인과 서인의 당쟁은 변화무쌍한 우여곡절을 거쳐 숙종에 이르러서도 당쟁의 성시를 이루는 때였다. 숙종은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노련함과 과단성있는 정책으로 당파를 아우르며 국정을 이끌어갔다. 숙종은 갑인환국(1674,숙종즉위년)을 시작으로 하여 당시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의 세력을 배척하고 재빠르게 남인정국으로 몰아갔다. 오래만에 정권을 잡은 남인은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허적과 윤휴 등 주요 재상직을 차지한 탁남과, 허목과 윤휴등 학문에 전념하였던 청남으로 갈려 서로 다투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남인의 서로 다투는 정국에 질린 숙종은 다시 한번 환국을 통하여 남인에서 서인으로의 권력이동을 실시하였다. 경신환국(1680,숙종6년)이었다. 이때 서인은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나뉘어 다시한번 정파싸움을 치열하게 벌여 숙종을 진저리치게 한다. 때를 틈타 경신환국을 통한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던 남인은 남인과 연관 있는 장희빈을 이용하여 숙종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장희빈은 11세에 궁녀로 입궐하여 숙조의 첫째왕비 인경왕후가 1680년에 천연두로 병사 한 후에 숙종과 인연이 맺어진다. 한편 인현왕후는 인경왕후의 후비로서 왕비가 되었다(1681,숙종7년). 1688년 숙종14년에 장희빈이 왕자 균을 낳자 숙종은 기쁜나머지 생후 100일도 안된 왕자 균을 원자로 책봉한다(1689,숙종15년) . 숙종이 이렇게 재빨리 음직인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장희빈을 무척 총애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데 반대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숙종은 송시열을 귀양 보내고 마지막에는 사약을 내렸다. 서인 오두인과 박태보가 국문중 죽는 등 서인은 큰 화를 입게됬다 (기사환국.1689,숙종15년).
이때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이 서인의 거두였고 인현왕후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때문에 그녀도 덩달아 폐비되어 궐밖으로 쫓겨나고 장희빈이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숙종은 후에 영조의 어머니가 될 무수리출신 숙빈최씨를 총애하게 되었고 숙빈최씨는 연잉군(영조)을 잉태하게 되었다(1694). 숙빈최씨가 연잉군을 잉태하자 장희빈 등 남인에 비상이 걸렸다. 장희빈은 숙빈최씨에게 갖은 고초를 가했고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는 숙빈최씨를 독살하려고 하는 독살설에 연루되기도 하여 숙종의 큰 분노를 샀다. 숙종은 이때쯤 남인에 다시 크게 실증을 느끼고 있었던데다 폐위한 인현왕후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숙종은 다시 환국을 결심한다. 갑술환국(1694,숙종20년)이었다.
갑술환국으로 폐비 인현왕후가 복원되어 대궐로 돌아왔다. 숙종은 자신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현왕후는 대궐로 입궐한 후 병으로 죽었다 (1701,숙종26년).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다시 입궐하자 인현왕후의 처소에 접근하여 저주를 하는 만행을 저지르다 발각되었다. 숙종은 장희빈 행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결국 사약을 내렸다. 이렇게 되니 숙빈최씨의 연잉군이 새롭게 떠오르고 장희빈의 아들인 왕자 균(경종)의 처지가 매우 위태롭게 되었다. 그러나 경종의 지지세력인 소론등의 도움등 우여곡절 끝에 균은 왕위에 오를수 있었다. 이로써 장희빈이 비록 패악을 저질렀다고는 하나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을 생산하게 된 후궁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대빈묘 전경. 능역이 좁고 아담하다 따사로운 저녁햇살이 장희빈을 위로 하는 듯 하다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의 한편에는 장희빈의 대빈묘가 자리하고 있다. 대빈묘는 왕릉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구조만 갖춘 채 햇빛이 잘 들지않는 서쪽의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묘인 명릉이 그나마 같은 서오릉에 있으니 장희빈으로서는 위안을 삼을 수 있을까. 장희빈에 측은지심이 발동한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현실이 장희빈 시대의 삶과 다르다면 얼마나 다를까 하고,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각박하고 치열한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육상궁 (毓祥宮)
육상궁과 연호궁은 같은 한체의 사당이다. 연호궁 현판 뒤쪽에 육상궁의 현판이 걸려있다 육상궁은 조선 숙종의 후궁이며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1670 ~ 1718)의 신궁이다. 숙빈최씨는 1676년 당시 겨우 7세에 궁녀로서 입궁하여 인현왕후를 모셨다고 전해진다. 인현왕후는 숙종이 단행한 기사환국(1689, 숙정15년) 이후 폐비되어 궐밖으로 쫒겨났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증은 서인의 거두였고 숙종은 당시 서인을 증오하여 남인을 대거 등용하였던 것이다. 숙종은 이후 숙빈최씨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이 때는 숙종도 기사환국을 계기로 등용한 남인들에 대한 염증이 더해진데다 장희빈의 숙빈최씨 독살설이 퍼져 더욱 분노하고 있던 참이었다.
숙빈최씨는 숙종과의 사이에서 연잉군(영조)을 잉태하였는데 장희빈으로서는 후에 에 왕권의 경쟁자로서 달갑지 않는 일이었다.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이 1688년 출생이고 숙빈최씨의 아들 연잉군 즉 영조의 출생은 1694년 이었다. 둘 사이는 불과 6년의 차이여서 후에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의 치열한 정파싸움을 초래하였다. 숙종은 연잉군을 지극히 사랑하였고 숙빈최씨는 장희빈에게 모진 시련을 격었다.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숙빈최씨 독살설 등으로 장희빈의 지지기반인 남인에 숙종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다시 환국이 시작되었다.
갑술환국(1694)의 시작되었다. 갑술환국으로 장희빈을 포함하여 남인이 세력은 처절하게 붕괴되었고 서인이 재집권 하였다. 인현왕후는 다시 복위되어 궁궐로 돌아왔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병으로 죽었고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였다는 사실을 숙빈최씨가 숙종에게 고하였다. 숙종은 분개하여 장희빈을 사사하였다. 이후로 숙종은 원자 균(경종)을 멀리하고 연잉군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숙종은 내심 원자 균에게 대리청정을 시켜 일의 처리가 잘못된 것을 이유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교체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고 했지만 소론의 반대 등으로 뜻을 관철 할 수 없었다. 숙종 사후 경종이 즉위하였다. 연잉군이 왕으로 즉위하기까지는 경종을 옹호하는 소론과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 사이의 심각한 갈등과 음해 그리고 죽임이 있었다. 신임옥사 (신축옥사와 임인옥사)는 노론의 무리한 경종 축출시도에 오히려 소론이 반격을 가해 노론에 치명상을 입힌 사건이었다. 신임옥사를 통하여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를 비롯한 많은 노론 대신들이 희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잉군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왕세자의 지위와 경종이 연잉군을 배려하여 결국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따라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숙빈최씨는 살아생전에는 영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으나 왕을 생산한 후궁으로서 칠궁에 배향되게 되었다. 영조는 후에 어머니인 숙빈최씨를 지극히 사랑하여 육상궁을 200여회 찿았고 숙빈최씨의 묘인 소령원에도 자주 오고가곤 하였다.
숙빈최씨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위치하고 있다. 장희빈에게 갖은 모욕과 환난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숙빈최씨 묘역의 능과 석물 등은 장희빈의 묘역을 훨씬 능가하는 거대한 것이다. 영조는 몸소 소령원을 12차례나 오고가고하였다. 숙빈최씨의 묘인 소령원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외에도 주변의 높고 울창한 전나무 및 울창한 숲이 아름다워 경탄을 자아낸다. 소령원은 조선 숙종 및 영조시대로 돌아가 보는 역사적인 산책코스로 추천 할 만한 곳이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울창한 산림으로 둘러싸인 소령원 비록 영조때에 건립된 신도비여서 숙빈최씨의 장점만을 추리기도 하였겠거니와 그녀의 신도비의 내용의 일부분이라도 발췌하여 참고하여 보겠다.
『빈은 타고나신 자질이 침착하고 진득하며 과묵하여 기쁨이나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두 내전을 모시되,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게을리 하지 않았고, 장엄하고 공경하며 삼가고 조심함으로 스스로의 몸가짐을 바로 하였다. 모든 비빈이나 궁인을 접할 때 공손하고 온화하여 모두 그 환심을 샀고, 임금께서도 마음속으로 애중히 여겼다. 인현왕후와 혜순, 자경 두 대비도 역시 특별한 대우를 했으나, 빈은 더욱 겸손하고 두려워하였다. 더욱 남의 장단점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아, 옆에서 모시는 자들이 어쩌다 이런 일이 있으면 곧 꾸짖었으니 한 궁 안이 한결같이 칭찬하였다』
연호궁 (延祜宮)
연호궁. 연호궁 현판 뒤에 육상궁의 현판이 있다 연호궁은 조선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진종(효장세자)의 생모인 정빈 이씨(1694~1721)를 모신 사당이다. 정빈이씨가 왕을 생산하게 된 경위는 실로 흥미롭다. 영조는 정비인 정성왕후와 계비 정순왕후로부터 자식이 없었다. 영조는 연잉군때부터 첩이었던 정빈이씨로부터 1719년 효장세자를 얻게되었는데 그녀는 2년 후 28세의 약관에 세상을 마감하게 된다. 효장세자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기를『“세자(世子)의 휘(諱)는 행(緈)이고 자(字)는 성경(聖敬)이며, 기해년 숙종(肅宗) 45년 2월 15일 신시(申時)에 순화방(順化坊) 창의궁(彰義宮)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그를 잉태하게 되자, 꿈속에서 상서로운 새가 방에 모여드는 것을 보았고, 다시 금빛 거북을 보기도 하였으니, 곧 정빈 이씨(靖嬪李氏)가 낳은 바이다. 겨우 두 서너 살 때 마치 어른과 같음이 있어 행동거지가 보통 아이들보다 뛰어났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효장세자는 안타깝게도 약관 10세의 나이에 세상을 마감한다. 그후 영조는 1735년 후궁인 영빈이씨 로부터 장헌세자(사도세자)를 얻게 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사도세자는 불과 2세에 세자로 책봉된 후 당시의 노론과 소론의 심각한 당쟁 및 사도세자 자신의 괴팍하고 난폭한 성격변화등의 문제로 인하여 영조로부터 뒤주에 갇히어 죽고만다(1726, 임오화변). 이후에는 영조의 자식이 없었으므로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정조)이 왕위를 물려받았다. 사도세자의 죽음으로 정조는 마땅히 이어받을 선대왕이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은 정빈이씨의 아들 효장세자를 추존왕(진종)으로 올리고 그의 아들로 이산(정조)를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케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선대로부터의 정당한 왕위계승이 어려울 때는 적합한 왕가의 자손으로 입적하여 왕위를 계승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추존왕 진종의 부인이었던 영빈이씨는 저절로 왕을 생산하게 된 후궁의 지위가 되었으니 실로 흥미롭다. 여기서 이미 지난 역사이기는 하나 효장세자가 요절을 하지 않았더라면 사도세자의 불행은 없었을 테지만 운명의 수레바퀴는 방향을 알 길이 없다.
박달산을 바라보는 시원한 경관을 자랑하는 수길원 영빈이씨의 묘인 수길원은 그녀의 시어머니였던 숙빈최씨의 묘에서 불과 계곡하나를 사이에 두고 가차이 조성되어 있다. 평소에 숙빈최씨와 사이가 좋았다라고 하는데 묘도 가깝게 이웃하거니와 칠궁내에서도 육상궁과 현판만을 각기 달리할 뿐 같은 사당내에 신위가 모셔져 있다. 실로 연관깊고 우애있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인 셈이다. 정빈이씨의 수길원도 소령원과 같이 비교적 넓게 조성되어 있으되 다만, 시어머니인 숙빈최씨의 소령원에는 미치지 못하는 석물의 배치나 무덤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선희궁 (宣禧宮)
선흭궁은 경우궁과 같은 건물에 있다 선희궁 터
선희궁은 조선 영조의 후궁이며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신궁이다.
선희궁은 순조의 어머니인 수빈박씨 경우궁과 같은 사당에 모셔져 있다. 영빈이씨는 6세에 대궐로 들어와 후궁이 되어 1남6녀를 두면서 영조의 사랑을 듬뿍받았다. 그녀는 잘 알려진 임오화변(1762)으로 유일한 아들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사도세자를 낳았을때에는 영조가 일찍이 첯째 아들인 효장세자를 잃는 큰 슬픔을 겪고 난 후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 그 기쁨이 영조뿐 아니라 온 조정의 경사였다. 여기서 조선왕조실록의 한 부분을 소개하는 것이 이때의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영빈 이씨(暎嬪李氏)가 7)원자(元子)를 집복헌(集福軒)에서 탄생하였다. 그때 나라에서 오랫동안 저사(儲嗣)가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온 나라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시임 대신(時任大臣)·원임 대신(原任大臣) 및 여러 재신과 옥당(玉堂)에서 모두 나아가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이들을 인견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하례하는 말을 올리니, 임금이 말하기를,
“8)삼종(三宗)의 혈맥이 장차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히 돌아가서 열성조(列聖祖)에 배알(拜謁)할 면목이 서게 되었다. 즐겁고 기뻐하는 마음이 지극하니, 그 감회 또한 깊다.”』
사도세자는 후에 왕으로 추존(장조)되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이산이 그의 할아버지인 영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으므로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존한 것이었다. 영빈이씨는 사도세자가 추존왕이 되었으므로 결과적으로 왕을 생산한 후궁이 되었다. 그녀의 손자인 이산이 왕위(정조)에 오른 이래 순조, 문조, 현종, 철종대까지 모두 그녀의 직계자손 이었으니 비록 후궁이언정 대대로 왕통을 잇는 보기드문 혈통을 과시하였다. 그녀가 사도세자를 잃게 된 이유로는 말년에 사도세자가 의대증 등 정신질환을 앓았고 결과적으로 온깆 패악을 저질러 영조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같은 노론끼리도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을 응원하는 부홍파와 홍봉한을 척신으로 몰아 견제하려는 김상로를 중심으로 하는 공홍파의 대립이 있었다. 공홍파는 홍봉한의 세력을 견제해야 했고 세자의 비행을 들추어내어 제거하려고 온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는 점점 패악을 저지르며 미쳐가는 사도세자를 방어하기에 역부족이었고 홍봉한조차 사도세자를 포기 할수 밖에 없었다. 영빈이씨도 아들의 패악을 더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영조에게 아들의 온갖 비해을 고하였던 것이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조한 이가 곧 영조의 후궁 정순왕후였다.
사도세자는 정순왕후의 자식도 아니었고 사도세자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도 공홍파에 가담하였는데 정순왕후와 함께 사도세자의 비행을 계속 들추어가며 문제를 삼았다. 영조자신도 사도세자의 성격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완벽하게 부왕의 욕심대로 세자가 성장하기를 바랬으나 세자의 생각은 부왕과 같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나 후에는 무술에 더 관심이 있었고 집권세력인 노론보다는 소론이나 남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도세자는 당시의 냉정한 현실에 잘 부합하지 못하고 불우한 인생을 마감한다. 사도세자의 3년상이 끝난 다음날 영빈이씨도 생을 마감하였으니 애통하게 자식을 잃고 그 뒤를 따라간 그녀에게 측은지심이 느껴진다.
애뜻한 슬픔을 위로하듯 영빈이씨의 묘역을 가을햇살이 따뜻히 감싸주고 있다.
그녀의 무덤은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의 수경원이다.
수경원은 녹음 짙은 서오릉의 동쪽 구릉에 화려하지도 않고 장엄하지도 않게 조성되었다. 온화하고 아늑한 주변의 숲과 어우러져 옛 사도세자의 불행을 애써 잊으려는 듯 고요하고 잔잔한 기운이 묘역을 감싼다. 영빈이씨에 대한 영조의 애틋한 사랑과 슬픔을 영조자신이 글을 짖고 쓴 비문의 일부를 소개함이 매우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수경원영빈이씨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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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즉위한지 2년째에 후궁의 지위에 나아가고 즉위 40년인 갑신년(영조 40, 1764년) 7월 26일 병자일에 경희궁 양덕당에서 나를 이별하고 떠나가니 아아! 이제 그만이구나.
39년간 해로한 것이 지금 하나의 꿈이 되어 버렸구나. 내 마음 매우 슬픈 것이 마치 다섯 달을 지난 것 같으니 나이 칠순에 측량하기 어려운 세상일이로구나. 빈은 타고난 성품이 따뜻하고 착하며 자애롭고 인자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나를 받들고 자식들을 기름에 사랑을 골고루 나누었다. 임오년의 일에 이르러서도 나라가 능히 편안하고 신하와 백성들이 능히 보존된 것이 바로 빈의 공이었으니 이 어찌 아녀자가 능히 갖출 수 있는 것이겠는가? 내가 어찌 터럭만큼이라도 과장하여 말을 하겠는가? 이는 우리 동방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는 일이다. 참고 3년을 지나더니 아아! 담제(禫祭 : 사도세자의 담제)를 지내는 달에 조용히 돌아가며 그 충성스럽고 깨끗한 마음 보전하니 그 마음 양쪽으로 잘 보전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아! 슬프구나.
생략』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경우궁 (景祐宮)
경우궁의 안쪽에는 선희궁의 현판이 걸려있다
경우궁은 조선 정조의 후궁이며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의 신궁이다.
정조(1776-1800재위) 그의 첫째 왕비인 효의왕후는 자식이 갇지 못하였다. 정조는 왕으로 즉위하기 전부터 의빈성씨와 각별한 사랑을 나누었고 의빈성씨와의 사이에서 문효세자를 얻었다. 그러나 문효세자는 3세에 세자에 책봉된 후 5세에 요절하고 말았고 정조가 그토록 사랑했던 의빈성씨도 임신중에 같은 해 원인모를 병으로 애석한 죽음을 맞이했다.
수빈박씨의 아버지 반남 박씨 박준원은 노론의 명문가였으나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박준원의 시가와 산문을 엮은 금석집을 그의 아들 박종보가 간행하였는데 수빈박씨도 아버지의 학문적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정조 초기에는 영조시대로부터 넘어오는 노론, 소론의 대립에 공홍파며 부홍파며, 시파이니 벽파이니 하는 치열한 당쟁의 소용돌이를 어느정도 정립하고 정조의 후반기 치세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에 수빈박씨는 그야말로 정조를 내조하는 장본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수빈박씨는 왕손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던 정조에게 구세주와도 같이 1790년 정조의 나이 39세에 순조를 낳아 왕통을 있게 하였다. 당시 순조를 낳았을때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아무래도 과장되었을 수도 있었겠으나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순조의 탄생의 기쁨을 엿볼수 있다.
『신시(申時)에 창경궁 집복헌(昌慶宮集福軒)에서 원자(元子)가 태어났으니, 수빈 박씨(綏嬪朴氏)가 낳았다. 이날 새벽에 금림(禁林)에는 붉은 광채가 있어 땅에 내리비쳤고 해가 한낮이 되자 무지개가 태묘(太廟)의 우물 속에서 일어나 오색광채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앞을 다투어 구경하면서 이는 특이한 상서라 하였고 모두들 뛰면서 기뻐하였다.』
반남 박씨의 등장에 이은 순조의 생산은 후에 김조순을 필두로 하는 세도정치의 교두보가 되기도 하였다. 김조순의 딸이 정조가 살아있을때 순조와 정혼하기로 하였으므로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던 것이다. 정순황후가 순조에 대한 수렴첨정을 거두자 김조순은 순조의 외척으로서 당시 세력을 쥐고 있던 벽파등 정적을 제거하고 기나긴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의 막을 연 것이었다.
수빈박씨의 무덤은 휘경원이다. 휘경원의 자연은 문화유적 만큼이나 소중하고 아름답다. 시원하게 뻗은 소나무와 전나무는 하늘 높이 뻗어 오른다.
덕안궁 (德安宮)
덕안궁은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이며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신궁이다. 엄귀비는 약관 5세의 나이에 궁녀로서 입궁하여 후궁으로서는 최고의 대우인 황귀비에까지 이른 고종이 총애하는 현명하고 권모와 지략에 능했던 여인이었던 같다. 궁녀로 입궐하여 지밀상궁에 이르기까지 당시 민비인 명성왕후로부터 신임을 두텁게 받았다. 그러나 엄귀비가 고종의 은총을 받은 후 민비는 엄귀비를 궐밖으로 쫒아낸다. 구한말의 외세의 간섭등 어지러운 정세는 엄귀비의 운명을 다시 대궐로 돌아오게 하였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당시 민비가 러시아의 힘을 빌어 일본을 견제하려고하는 음직임을 보이자 일본의 자객을 동원하여 민비를 살해한 것이다.을미사변(1895)이었다.
천인공노할 만행으로 민비가 죽자 고종은 엄귀비를 10여년 만에 다시 궁으로 불러들었다. 그만큼 고종은 엄귀비를 무척 사랑했고 이후로는 정식으로 다른 정비를 맞이하지 않았다. 고종은 엄귀비를 아예 정비로 하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으나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 뜻을 이룰수는 없었다. 일찌기 숙종 때 후궁을 정비로 해서는 안된다라는것이 통념으로 이어져왔던 것이다. 순헌왕귀비의 신위가 종묘에 배위되지 못하고 칠궁에 안치된 경위다. 그러나 실제로는 순원황귀비는 정비와 다름없는 옷을 입었고 그녀의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여건이 보장되어 있었다. 정비인 민비가 시해되고 고종이 새롭게 정비를 맟이하지 않았으므로 않았으므로 순원황귀비 이상 지체가 높은 여인은 궁궐에 없었다. 순원황귀비는 고종이 일본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러시아공관으로 아관파천 할때 적극 가담하였고 파천시에는 러시아공사관에서 생활을 같이하며 고종에게 큰 위안을 주었다. 고종의 그녀에 대한 총애는 식을줄 몰랐다.
순원황귀비는 국난의 시기에 근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여성의 교육에도 온 힘을 쏟았다. 그녀는 양정의숙, 명신여학교, 진명학원 등을 설립하였는데 오느날의 양정고등학교, 진명여자고등학교 그리고 숙명여자대학교 이다. 당시 독립협회에서는 독립신문을 통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계몽하였고 미국의 선교사들도 학교를 세워 근대교육을 장려하는 시기였다. 엄귀비의 교육에 관한 관심과 노력 그리고 지원은 실로 주목받고 평가받아야 할 업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선 역대 왕비중 과연 이 만하게 나라를 위한 선진적인 훌륭한 사고와 실행을 한 왕비가 있었을까. 조선의 엄격한 신분에 따른 자격을 차치한다면 엄귀부는 마땅히 칠궁이 아닌 종묘에 배위되어야 하지 않을까. 고종은 왕위를 민비의 소생인 순종에게 조선의 마지막 왕을 양위한다. 한편 고종과 엄귀비사이에서도 아들이 있었는데 곧 영친왕이다. 고종은 영친왕을 황태자로 삼았고 끝까지 엄귀비를 사랑했다.그러나 국운이 다한 대한제국은 일제의 강압에 어린 영친왕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고 엄귀비는 이후로 영친왕을 보지 못하고 사무치는 한을 품고 죽었다.
영휘원은 도심의 한 복판에 녹지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영휘원은 도심의 한 복판에 녹지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순헌황귀비의 묘는 영휘원이다. 영휘원은 서울 도심의 녹음이 우거진 홍릉숲과 천장산에서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영휘원의 묘역은 도심인의 휴식처로서도 손색이 없다.
칠궁의 이모저모
좌:자연, 우:냉정천. 냉정천에서 흘러 나오는 물은 이곳 자연으로 흘러 연못을 이룬다
칠궁 뒷편의 감나무에 잘 익은 감이 하나 걸려있다
신주를 임시로 모시는 이안청. 원래는 건물 마다 배치되는 것이나 하나로 통합되었다
250년 이상된 고목의 느티나무가 칠궁을 수호하는 듯 하다
좌: 영조이 어진 봉안소 냉천정, 우: 연호궁으로 향하는 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