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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운경 Dec 12. 2022

소설과 같이하는 묘제박물관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을 찿아서

파평윤 씨 정정공파 묘역 전경

깜짝 놀랄 조선시대의 묘제 박물관 이라고도 할 만한 숨은 장소가 있다. 수백 기에 달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묘가 파주에 집중적으로 산재하여 있다. 중세 도시의  골목을 숨 가쁘게 오가며 느끼는 흥분과 호기심을 이 곳에서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다. 시대를 넘나드는 빼어나고 다양한 스타일의 석물들은 숱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파평윤씨는 고려건국시 왕건을 도운 윤시달을 시조로 하여 고려의 이름 높은 명장 윤관장군을 배출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왕비만 4명이나 배출한 명문대가의 가문이었다. 이곳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에는 정희왕후 윤씨의 부친이며 정정공파의 시조격인 윤번묘역을 비롯하여 정승묘역 7기, 판서묘역 8기, 참판묘역 30기를 비롯해 약 600여기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이중 96기가 경기도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만큼 역사적, 미술사적으로 매우 가치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 전체를 국가에서 관리하는 사적지로 지정하여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이 곳의 묘역에 조성되어 있는 묘제 및 석물, 각종 묘비등은 조선 초기에서 후기까지의 시대별 특징과 함께 역사적, 묘제적, 미술사적, 복식사적 측면에서 상당한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이러한 조선시대 분묘의 특징을 한 곳에서 답사 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서 유일하다. 즉, 이곳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조선시대 분묘 야외박물관’ 이나 다름없다.


이야기는 조선 명종시대로 올라간다. 이미 세상에 널리 회자되고 극화되었던 이야기다. 명종 때 온 나라에 백성은 굶주리고 도적이 들끓었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고 용을 쓰고 빼앗기는 자는 더 빼앗길 것도 없었다. 홍명희는 소설 임거정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술하였다. 『전에 없는 큰 살년이라, 배 주린 까마귀 빈뒷간을 기웃거린다는 말이 동요가 되다시피하였다. 사람은 고사하고 까막까치까지도 먹을 것이 없어서 인분이나마 먹어 보려고 뒷간에 와서 기웃거린즉 인분까지 없어서 뒷간이 비었다는 말이니 이 말이 거의 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양반은 편지로 살고 아전은 포흠으로 살고 기생은 웃음으로 살지마는, 가난한 백성은 도적질 아니하고 거지짓 아니하면 굶어죽을 수 밖에 없었다인종 즉위 후 얼마 못가서 죽자 명종이 왕이 되었다. 문정왕후는 20여 년 동안 수렴청정하였고 그녀의 남동생 윤원로와  윤원형을 비롯한 윤임, 김안로등 대신들의 각축전이 살벌했다. 그동안 백성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갔다. 


천재작가 홍명희는 불후의 명작 '임거정'을 저술했다. 필력넘치는 월탄 박종화는 소설 '여인천하'를 저술하였다. 두 소설 모두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인물들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이 글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묘제의 답사에 있고 그 형식과 아름다움을 피력하기 위한것이다. 그러나, 핑계없는 무덤이 없다고 했던가. 말없는 죽은자에 대한 이야기도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참고로 소설이나 인용 등 관련된 내용은 글자의 색을 녹색으로 표기하였다.


윤번(1384~1448)의 묘


윤번의 묘. 계층석으로 조성되었고 문인석, 장명등, 묘비를 두루 갖추고 있다. 묘의 형태가 사각형인것은 고려말 조선초의 묘에 나타나고 있다.

윤번은 정희왕후의 아버지 이자 세조의 장인이다. 윤번의 관직은 그의 딸이 세조와 혼인하기 전까지는 군기시판관의 6품 정도에 머물렀다. 왕의 장인이 된 이후는 고속승진을 하여 우차참찬, 공조판서 용기를 불어넣어등을 지내고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파평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윤번의 시호가 정정(貞靖)이므로 이 곳 일대의 묘가 정정공파 묘역이라고 부른다.  


윤번의 일곱 째 딸 정희왕후는 11세에 수양대군과 혼인을 하여 슬하에 의경세자와 예종을 두었다. 그녀는 남편인 수양대군이 계유정난(1453, 단종1년)을 일으켰을 때 주저하는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을 정도로 강단있고 결단력 있는 여인이었다. 그녀의 사랑하는 첮째 아들 의경세자의 요절은 간장을 도려내는 커다란 슬픔이었다. 그녀는 세조가 죽은 후 둘째 아들 예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그 또한 즉위 후 1년 2개월 만에 죽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예종 사후 손자인 어린 성종을 즉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성종의 수렴첨정으로 여장부로서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정희왕후는 백성들을 괴롭혔던 호패법을 폐지하는 등 정치역량을 발휘하였고 7년간의 수렴청정을 거두고 성종이 치세를 하는데 확고한 기반을 다져준 여걸이었다.


윤번묘역은 윤번및 그의 부인 인천이씨의 묘가 위, 아래로 위치하여 있는 합장묘다.  정정공파의 시조 묘역인 만큼 선산의 기슭 초입에 넓은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묘는 장방형으로 봉분을  둘렀는데 여말 봉분형태에서선초의 형식까지 많이 보여지는 형태이다. 원형이 아닌 장대석을 두룬 장방형의 봉분형태에서 더욱 세월의 깊이와  위엄이 느껴진다. 묘역의 규모에 비해서는 석물의 크기나 종류가 매우 조촐하고 과장되어 있지 않다. 계체석을 이용하여 나눈 3단계의 구역을 뚜렷하게 구분하고 있어 묘주의 높은 지위를 증명하여 주고 있다. 넓은 묘역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널찍하고 평안해 보이며 매우 여유가 있다.


묘역이 넓은 것 외에는 기타 봉분및 기타 석물에도 사치를 부리지 않아 지극히 소박하다. 상석에 괴여지는 고석이나  향로석 그리고 장명등에는  큰 특징이 없다. 장명등은 왕릉이나 지위가 아주 높은 관리에게만 허락 되어지는 석물이다.  장명등 화사석의 화창도 일반적인 사각형의 모습을 보이고 있고 매우 소탈하다.


문인석 또한 매우 조촐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 바래고 깎이고 하여 그 표정을 정확히 읽을 수 없다. 장승형의 눈에 복두를 썼으며 홀(笏)을 양손에 받쳐들고 있다. 각대를 한 공복형태의 사각형의 몸매 그리고 머리부분의 과대표현 등은 문인석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공복의 주름을 자세히 보면 제법 옷깃이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굴곡의 선이 표현되어 있고 옷 자락 끝부분에서는 유려하게 곡선으로 마무리 되어 있어 보기 아름답다. 머리에 쓴 복두도 뚜렷히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은 전형적인 공복의 복두 형태를 하고 있다. 고려말 조선초에 문인석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고 볼 때 어느 정도 형식적인 것을 갖추었다는 점에 의의를 두면 되지 않을까 한다


윤번의 부인 인천이씨(1383~1456)의 묘 


윤번의 처 인천이씨의 묘. 장명등과 문인석이 윤번의 묘보다 우수하다

윤번의 묘보다는 전반적으로 더 세련되어 보인다. 특히 상석앞에 위치한 장명등은 조선초기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윤번은 딸이 왕비가 되기 전에 세상을 떴지만 인천이씨는 그 뒤에 사망해서 국장(國葬)을 치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규모에 있어서는 왕릉의 장명등에 비할 바 못되나 조성형식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문인석의 표정과 옷 복식 등에 있어서도 윤번의 그것과는 윤곽과 표정이 뚜렷하다.


인천이씨묘의 석상. 비교적 형체가 뚜렷한 공복의 문인석과 팔작지붕의 장명등은 당시 매우 거대하고 호화로운 것이다
















윤사흔(1422~1485) 묘


윤사흔의 묘의 석물은 신도비를 비롯하여 매우 아름다운 조형을 구축하고 있다

윤사흔은 윤번의 아들이고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윤씨의 남동생이다. 그런 만큼 온갖 주요 관직을 두루 거친다음 64세의 나이로 일기를 마감하였다. 세조는 외척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왕비 윤씨의 외척 민씨세력을 제거하였고 처남되는 윤사흔에게도 방종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를 내렸다. 『 예로부터 외척으로서 자신의 몸을 망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 너는 후비의 친척으로서 달리 남다른 능력도 없이 경상의 지위에 올라 부귀가 이미 극에 달했으니, 항상 조심하고 두려함으로써 스스로를 돌보고 삼가서 남에게 교만하게 굴지 말라. 네가 교만하게 굴지 않더라도 남들이 저절로 공경히 대할 것이다. 국조보감 제13권 제조조 4』세조의 사흔에 대한 경고는 지금까지도 통용되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윤사흔은 장악원 제조의 역할도 담당했다. 장악원은 조선 왕실의 각종 행사에 필요한 음악의 연주및 훈련,  음률 및 춤, 그리고 악기의 유지및 수입  등 광대한 업무를 담당하는 매우 중요한 곳이엇다. 윤사흔은  악곡에는 꽤 안목이 있었나 보다.  윤사흔이 성종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는데 음악에 대한 상당한 소질이 있었는 듯 하다.


"1.제향과 조회에 쓰이는 편종을 잃어버리거나 깨뜨렸는데, 공조에서 간수인으로 하여금 잡동철을 징수하게 하여 법칙대로 주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음률이 맞지 않습니다. 그 잡동철은 호조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고, 정동을 써서 법칙대로 고쳐 주성하게 하소서. 또 세종조에 주성한 편종이 화재로 없어진 뒤에 교정을 지금까지 행하지 않고 있으니, 모름지기 교정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편경도 많이 헐고 깨어졌는데, 지금까지 만들지 않았으므로 소리의 움률이 완전하지 않으니, 매우 마땅하지 못합니다. 때에 미쳐서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1.예조에서 기생과 악공이 열악(閱樂)할 때에 아울러 아악을 연주하는데, 악기가 모두 제향에 쓰이는 바이므로, 운반할 때에 더러워지고 헐게 될 뿐만 아니라 무례하기가 막심합니다. 지금부터 열악할 때와 본원에서 습악(習樂)할 때에 쓰이는 악기를 별도로 만드는 것이 어떻겠숩니까 " 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시대 장악원의 악인과 움악교육 연구, 송지원) .

윤사흔 묘의 석상

 묘역은 그리 크지 않은 규모에 묘비와 상석 1기, 장명등 1기, 문인석 2기가 남아 있는데 계체석은 일부 손실되어 새로운 돌로 구성하여 놓았다. 장명등은 하대석의 크기가 몸체에 비례하여 빈약하고 옥개석의 크기에 눌리는 형국이어서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것은 아니다. 팔작지붕의 형태에 지붕위에 보주 2개가 보인다. 문인석은 공복형태의 복두가 확연하고 전체적인 조각을 간략히 하여 비범함이 느껴진다. 얼굴은 뚜렷한 장승형의 모습이다. 화려한 관직을 두루 지낸 세도있는 관리로서는 묘의 규모는 매우 검소하고 조촐해 보인다. 윤사흔 묘의 백미는 역시 1486년에 건립한 그의 신도비에 있다. 윤사흔 신도비는 이곳 정정공파 묘역 전체의 백미요 이 나라 전체의 으뜸이 아닌가 한다. 조각품의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은 보는 이로 하여금 ‘ 아! 이곳에 잘 왔다 ’ 라고 하는 경탄을 자아낸다. 윤사흔 신도비는 '윗부분을 연꽃잎처럼 말아올린 화관석(花冠石) 양식으로서 불교의 영향이 남아있던 조선시대 초까지만 유행하다 사라졌고 윤사흔 신도비는 현존하는 화관석 양식 중 가장 걸작(조선일보기사 발췌 2006.2.25/파주시청 이윤희 문화재전문위원 )' 이라고 한다. 실로 하늘에 순간적으로 강렬한 빛을 발산하고 사라지는 초신성같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신도비는  햇살과 푸른 겨울하늘에 자태를 발한다.

 윤사흔 신도비의 좌우측에는 연꽃과 연잎 등이 조각되어 있어 한층 더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신도비의 받침석에 복련의 연화가 조각된 것과 이 신도비의 석물전체를 화려하고 섬세하게 감싸고 있다. 이러한 비신의 좌우측면에 문양을 조각하는 것은 고려시대 법상종 탑비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요소이지만 조선시대 의 비석 중에 이곳에 문양을 조각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리고 한다.

신도비 양면에 연꽃 문양이 빽빽히 채워져 있다
















윤여필(1466~1555) 묘



윤여필1466~1555은 중종의 두 번째 비 장경왕후(1491~1515) 윤씨의 아버지이다. 

윤여필은 1506년의 중종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올랐다. 그의 딸이 왕비로 책봉되자 파원부원군에 봉해지고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소윤인 김원로, 김원형과 대립한 대윤 윤임은 그의 아들이었다. 장경왕후는 중종 즉위년에 후궁이 되었고 단경왕후가 폐위되자 왕비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길지 못했다. 그녀는 중종과의 사이에서 효혜공주와 인종을 낳고 25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인종의 탄생은 후에 그를 지지하는 윤임과 명종을 지지하는 윤원형과 문정왕후의 치열한 정쟁의 발단이 되었다.

묘역은 왕비의 아버지 임에도 불구하고 윤번이나 윤지임의 묘역에 비하여 규모가 조촐하다. 윤여필이 죽었을 때는 문정왕후가 권력을 쥐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정적이었던 윤지임의 묘조성에 소홀했으리라 짐작간다. 

윤여필의 묘에는 조금 색다른 것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조복을 입은 문인석이다. 이러한 조복형 문인석은 중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해서 차츰 공복형 문인석을 대체하기 시작하였다. 왕릉에는 거의 사용 되지 않은 조복형 문인석이 사대부들의 묘에서 일찍이 사용된 것은 극히 재미있는 현상이다. 왕릉에서의 금관조복 문인상은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에 나타나는 것으로 사대부의 묘에 적용한 것 보다 한 참 뒤의 일이다. 이러한 조복은 머리에 쓴 복두의 형태가 앞뒤 높이의 차가 없는 원형 복두의 착용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것으로 묘역 답사의 진미가 아닐 수 없다. 묘의 좌측에 위치한 묘비는 오랜 세월을 먹은 흔적이 묘비 전체에 역력하다. 검게 그을린 묘비의 앞, 뒤에는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다투는데 생생하고도 매우 역동적이다.  장명등과 망주석은 왕릉과 형식을 같이하는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윤지임(1475~1534다)의 묘


전면에서 본 윤지임 묘역. 거대한 신도비의 이수에는 맹렬한 용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윤지임은 문정왕후(1501 ~ 1565) 윤씨, 그리고 윤원로와 윤원형 형제의 아버지이니 곧 중종의 장인이 된다. 윤지임에 관해서는 월탄 박종화의 소설 여인천하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윤지임은 구차하게 사는 호반 이었다. 장경왕후의 오라버니인 판부사 대감(윤임)이 별안간 불러서 딸의 나이와 아들 들의 나이를 묻는 것을 보자, 속증으로서는 웬일인가 아들들을 발인을 시켜 주고 딸은 좋은 사윗감을 골라 주려나 하고 판부사 대감의 동정만 바라보고 있었다』당시 정쟁의 일환으로 윤임과 김안로는 중종의 계비를 같은 일가로 정하여 남곤과 심정이 지지하는 경빈박씨와 대응 하려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문정왕후의 데뷔와 원로, 원형의 세도는 윤임의 영항력이 작용하였던 것이다. 종6품인 행충무위부사과에 머물렀던 윤지임은  왕의 장인이 된 이후 고속승진을 거듭한다. 그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고 1552년 파산부원군에 봉군되었다.


문정왕후는 17세에 중종의 비로 간택되어 동생인 윤원로와 윤원형등과 합세하여 가문의 권력을 구축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먼저 궐내의 경쟁자인 복성군을 낳은 중종의 후궁 경빈박씨를 제거하였다. 이어 중종비 장경왕후의 딸인 효혜공주를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등 인종을 지지하였던 김안로를 제거하였다. 인종은 문정왕후로서는 눈안의 티끌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다시 그녀의 마지막 정적인 윤임이 제거대상이 되었다. 윤임은 당시 대윤으로 불리었는데 그 역시 인종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후 효심이 지극한 인종이 죽고 명종이 왕이 되었다. 인종의 죽음에는 문정왕후의 의도적인 심중도 작용하였다. 인종 사후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을 내세워 섭정을 20여년 이나 하면서 여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문정왕후의 아버지 윤지임의 묘역은 실로 광대하여 왕릉에 비견할 바는 아니나 일반 사대부의 묘와는 규모를 불허한다. 경사진 구릉에 조성된 거대한 신도비까지 갖춘 묘역은 마치 왕릉의 묘역과도 흡사해 보인다. 신도비및 묘비의 거대함이나 용의 형상을 조각하여 놓은 이수(螭首)에 새겨진 용의 모습을 보면 문정왕후의 세도가 지금까지 전해져 올듯 오싹한 느낌 마져 든다. 묘비및 신도비의 이수에는 이무기가 여의주를 놓고 격렬히 다투는 모습을 조각하여 놓았는데 몸을 뒤틀리게 조각하여 생동감 넘치는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신도비의 전면 이수. 두 마리의 이무기가 여의주를 서로 물고 다투고 있다

문인석은 좌우에 2개를 세웠는데 윤번의 묘와는 시대적 차이가 있어 얼굴의 모습은 장승형에서 어느정도 벗어난 편안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각대를 두르고 있는 것도 매우 평범한 것이며 복두에 있어서도 앞이 낮고 뒤쪽이 높은 2중 관모를 착용하고 있다. 넓적한 홀을 양손에 떠받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큰 특징은 없다. 머리부분이나 귀의 표현은 여전히 전체 신체적 비례에 있어서 과장되게 크다. 

전체적으로 왕릉이나 왕가의 패밀리의 그것에서 볼 수 있는 거대한 석상에 비할건 못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의 묘를 조성하는데 있어서 과한 사치로 흐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각 관리들의 등급에 맞게 석물등의 크기를 제한하여 왔다.

문인석

한편, 장명등에 있어서는 전체적으로 옥개석의 크기가 과대하게 보여 불안정한 형태이다. 옥개석의 위에는 보주를 조각해 놓아 위엄을 더했으며 지붕처마의 네면도 뚜렷하다. 하늘로 치솟는 팔작지붕 형태로 화려한 모양을 갖추었다. 장명등의 하대석및 중대석은 사각을 이루고 있고 각 면에 안상을 만들어 조각하여 놓았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정교하며 기품있는 모습이다. 화사석의 창은 각 면에 4개를 내어 놓았는데 창의 크기가 과장되게 크지 않고 적당한 크기로 되어 있다. 장명등은 종2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에 한해 조성될 수 있었다. 윤지임의 묘의 장명등은 크기에 있어 소탈함을 지켰고 기품에 있어서는 규모는 작되 왕가의 기품에 많이 접근한 듯 보인다.

가분수적인 장명등에서 해학이 느껴진다. 

윤지임의 향로석은 무덤앞의 상석 혹은 혼유석 바로 앞에 놓여 향을 피우는데 사용하는 것인데 기품있고 우아하다.  고급 앤틱가구에서 볼 수 있는 빼어난 디자인으로 6각의 모서리에 각각 안상을 마련하여 각 안상에 간단한 조각을 하여놓았다. 몸통은 유려한 곡선을 이루었고 기품 있게 네 다리를 표현하였다. 나는 실제로 묘를 답사 할 때마다 이 향로석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곤 한다. 묘역의 예술성 점수를 매긴다면 향로석에 높은 가점을 주고 싶다. 윤지임 묘의 신도비에는 윤지임의 시조인 윤신달및 윤관장군 그리고 파평윤씨 일가의 가계도및 윤지임의 생애를 새겨 놓았다. 그 중에는 윤지임의 죽음을 애도하는 왕이 직접 지어 하사한 글도 있는데 이러한 것을 보면 당시 세도가의 아버지였던 윤지임의 위치가 어떠했으리라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경의 모습 송죽 같고 바탕은 빙옥 같네/높은 관직 세습하여 경의 자리 더욱 빛나

자손을 잘 길러 어진 왕비 배출하여/나라의 장인 되고 가문이 빛났네

무성한 복록 길이 길이 누려야 하는데/어찌 한 번의 병으로 이 지경에 이르는가?

처음 부음을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거늘/하늘의 빼앗음 신속해 애통함만 맺히네그만두자! 그 모습 다시는 볼 수 없네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기품있어 보이는 향로석










윤원필(1496년~1547)의 묘


윤원필은 윤지임의 1남이니 문정왕후의 오빠요 곧 윤원로, 윤원형의 형이다. 그의 행적에 있어서는 “명리를 일삼지 않고 명철하게 몸을 보존했다(파평윤씨 가승후기) ”라고 하는 기록이 있듯이 그는 동생 원로와 원형의 죽음을 각오하는 치열한 싸움에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난국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향로석은 지극히 우아하고 고풍스러운데 마치 이태리의 전통있는 고급 가구 디자인을 보는듯 매우 세련된 모습이다. 육각의 탁형을 받치는기둥은 죽절문이 아닌 평범한 기둥으로 네면의 안상을 만들고 정면의 안상에는 당초문을 조각하여 놓았다. 나머지 5면의 안상에는 별다른 문양이 없다. 중단부와 하단부에는 운문을 조각하여 놓았고 하단부에는 운각의 형태로 하여 다리와 다리사이의 공백을 깊이 파내어 다리의 입체감을 확연히 드러내었다. 멋과 운치를 잔뜩 살려낸 향로석에 감상자의 마음을 누그러지고 잔잔한 평화감을 느껴진다. 윤여필의 묘에서는 금관조복의 문인석의 좋은 예를 찿아 볼 수 있다.  머리에 쓰고 있는 복두와는 달리 각이 없는 둥근 모자를 쓰고 있고 의복의 뒤쪽 좌우에 늘어 찬옥(패옥)과 아래로 늘어뜨려 수놓은 천(후수)이찬옥 선명하다.

오른쪽 문인석의 허리에 넓게 찬 띠(각대) 의 양쪽 옆에 구슬 모양의 패옥이 늘어져 있고 그 사이의 문양이 후수이다

이러한 문인석은 형식적으로 매우 대동소이하나 여기에서 보는바와 같이 그 특징을 확연하게 나타내어주는 조각을 관조하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윤원로 (1502년? ~ 1547)의  묘


윤원로는 윤지임의 아들이고 윤원형은 그의 동생 이었다. 그의 누이인 문정왕후가 왕비가 되자 권세를 누리기는 원형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질이 좋지 못한데다 동생 윤원형과 사이도 좋지 않았고 결국 비참한 죽음이 그의 말로였다. 홍명의의 소설 임거정에는 원로와 원형이 싸우는 대목이 생생히 묘사되고 있어 흥미를 끈다. 『…원로가 체면까지도 돌보지 않고 원형의 상투를 감투 껴서 움켜잡고 앞으로 끄숙이었다. 원로는 원형의 뺨을 치고 원형을 몇 번 걷어차기까지 하였으나, 원형은 그중에 형 대접한다고 계집아이 싸우듯이 원로의 팔을 꼬집고 원로의 얼굴을 할퀴었다』. 나중에는 그의 동생 원형가의 정권을 둘러싼 싸움에서 지고 유배 후 사사되었다. 비록 원로는 원형과의 경쟁에 밀려 불행한 최후를 맞이 하였으나 그의 묘는 원형의 묘보다 규모와 형식을 갖추었다. 윤원로의 묘는 이 시대(16세기) 사대부 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부가 합장될 때 묘의 가운데에 묘비를 세우고 상석과 향로석을 배치하였다.

윤원로의 묘. 부부가 합장 되어있고 묘의 가운데 묘비가 세워져 있고 상석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장명등 화사석 안으로 묘비의 일부가 보인다

상석 밑에는 고석(鼓石)을 괴었는데 묘의 답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고석에는 재미있는 의미가 숨어 있다. 고는 북을 의미하고 북고자를 쓴다. 고석이 북의 원둘레를 장식하는 문양으로 되어 있어서다. 고양시에 있는 월산대군 묘의 고석은 고석의 진수를 보여준다. 장구 모양의 돌이 확연하고 돌에는 문과 자물쇠를 

상석 밑에 고석의 상하에 장구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하여 놓았다. 묘주의 혼령은 이 고석을 통하여 묘로 출입을 하며 그 의미로 문과 자물쇠를 조각하여 놓은 것이다. 윤원로 묘의 고석은 세월을 직감하는 색바랜 돌이지만 상하 테두리에서 고석의 의미를 명확히 알수 있다. 문화재 감상의 묘미다.


 윤원로 묘의 향로석도 간과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육각형으로 돌을 다듬어 하부에는 4개의 다리를 모각하여 놓았다. 다리는 유려하고도 입체감 있으며 다리의 사이에는 구름모양을 조각하여 부드러운 인상을 더하고 있다. 이 향로석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향로석의 탁자를 받치고 있는 3개의 둥근 공형을 이어 올린 기둥으로 찿아보기 힘든 세련된 조형이다.

윤원로 묘의 향로석


















윤원형(1503∼1565)의 묘


윤원형의 묘. 뒤에 원형의 보름달 인듯 정난정의 묘가 위치해 있다


윤원형은 윤지임의 아들이고 문정왕후의 동생이다.  윤원형의 시대는 본격적인 조선시대의 당쟁의 시작은 아니었다. 그의 시대는 명종말기에 이르러 붕당의 조짐이 일어나기 전까지 자기편끼리의 일시적인 정권장악에 불과하였다.그는 을사사화와 정미사화(벽서의 옥)를 통하여 정적을 무차별하게 제거하였다. 을사사화는 인종을 지지했던 대윤인 윤임과 명종을 지지하는 소윤인 윤원형과의 싸움에서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첨정을 하게 된 후 윤원형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대윤 윤임은 경남 남해로 유배가던 중 충주에서 사약을 받았다. 한 때 정권을 쥐고 부귀영화를 누렸던 그의 묘소는 고양시 봉산의 한적한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정미사화는 일종의 사기극이었다.  소윤 일파는 잔재해 있는 대윤의 세력을 척결하고자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을 조작한다. 내용인즉 '위로는 여주 아래로는 가신이 있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것'이라는 내용이 양재에서 발견되어 보고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대윤세력이 모함을 받아 사사되거나 유배당하였다.  이렇듯 원형은 간계는 부리는것이 샘솟듯  하였다.  윤원형은 그의 첩 정난정과의 이야기로 매우 유명하다. 정난정은 원래 서녀출신으로 윤원형의 첩이었으나 정실부인의 자리를 꽤차고 윤원형의 세도를 이용하여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다. 난정은 꽤 미인 이었나보다. 윤원형이 난정을 처음 보았을 때 박종화는소설 여인천하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보름달덩이 같은 처녀였다. 윤원형은 글에서 서시전을 읽어서 서시의 아름다움을 글자로 보았고, 시로 백낙천의 장한가를 읽어서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한숨 쉬어 한탄한 일이 있었으나, 미인의 아름다움운 태깔이 이같이 고운 줄은 몰랐다』원형은 난정의 아름다움을 서시와 양귀비에 비유하였다.  원형과 난정은 서로 죽이 잘 맞아 한 팀이 되어 온갖 술수를 부려가며 갖은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백성의 등골을 빼먹는데 앞장섰다. 윤원형이 세도를 얼마나 부렸는지는 홍명희의 소설 임거정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을사년에 십이 세 된 어린 왕이 등극한 후 윤원형이 왕대비의 동기로 권세를 잡기 시작하여 한 해 두 해 지나는 동안 발호가 차차로 심하여져서 주고 빼앗는 것은 차치하고 살리고 죽이는 것까지 거의 임의로 하게 되니 조정이 왕의 조정이 아니요, 곧 윤원형의 조정이라 왕이 연세가 이십이 가까우며부터 내심으로 윤원형을 몹시 꺼리었다』그러나, 윤원형과 정난정의 권세와 부귀영화는 그들의 배후 버팀목 이었던 문정왕후가 죽자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였다.  윤원형의 묘는 중종 때의 등장인물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떠 올리면 더욱 더 실감나고 흥미진진하다. 중종반정 이후 정권을 잡은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의 정권농락, 이들을 견제하며 새로운 도학의 정치를 추구하는 조광조, 인종을 보위하려고 힘쓰는 장경왕후와 그의 오빠 윤임, 그리고 이에 대적하는 명종의 후원자 문정왕후와 윤원형, 그의 첩 정난정,  김안로 등 그밖의 수많은 인물들이 얽히고 섫힌 이야기는 이 묘에서 정점을 찍는 듯 하다. 그녀가 그렇게 정실부인이 되고자 현처를 쫒아내고 기어코 그 자리를 차지 하였건만 죽어서는 윤원형과의 합장은 현처에게 돌아가고 뒤편에 원형의 보름달인 듯, 늘 자리잡고 있다.


윤원형의 묘는 문인석이 조복형 문인석의 특징이 있는데 앞서 이야기 한 윤원필 의 묘에서와 같다. 이러한 금관조복의 형식은 복두를 한 공복과는 머리에 쓴 모자가 판이하게 다른데  조각의 정교함과 세련미와 더불어 권위가 있어 보인다.









후기

 

파평윤씨 정정공파 묘역은 실로 광대하여 모든 묘와 석물을 기술하려면 500 페이지를 넘길 것이다. 다만, 대표적인 묘와 석물을 시대순으로 나열하여 비교하여 보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해 보고자 함이었다. 묘와 석물을 들여다 보고 있으려니 자연히 숱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이야기들을 정리하고 배경이 되는 소설을 인용하면 꽤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작업이 즐거웠다. 앞으로 시간을 가지고 자료를 보충하고 내용을 추가하면 더욱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파평윤씨 정정공파의 묘역에는 아직도 쓰지 못한 무수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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