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로 둘러보는 한반도 화장실의 변천사

by 전운경

화장실과 관련한 기록이 기원전 3,000년~1,400년 사이에 나타났고, 이미 수세식 화장실이 기원전 2500년 중반 모헨조다로의 공중목욕탕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20세기에 내가 살던 옛집에 푸세식 '변소'라는 명칭으로 사용했던 화장실을 생각하면 실로 5천 년 전의 사람들보다 열악한 시설에서 생활한 것인가 보다. 고대 로마 시대에도 수세식 화장실이 발달되었다고 하니 실로 옛사람들이 사용한 시설에 놀랍거니와 현재까지도 푸세식 변소를 사용한 것도 또한 놀라운 것이 아닌가 하는 푸념 아닌 웃음이 나온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경우에는 화장실 문화가 어떻게 전개되었나 하는 의문이 불현 든다. 여러 논문을 참고하여 시대적으로 정리해 보기로 한다.




삼국시대(*참조:고대 한일 변소 유구의 비교 검토)


변소 유구의 가장 기본적인 구분은 소위 푸세식과 수세식으로 나는 수 있을 것이고,재래식의 경우 일본의 용어를 빌린다면 급취식(汲取武)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급취식은 한반도에서 소위 재래식 혹은 푸세식으로 불리는 방식으로 수혈에 분뇨를 짧은 시간 저장하였다가 퍼내거나 그대로 폐기 장소로 이용하는 경우이다.


삼국시대의 변소에 관한 유구는 백제와 신라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부여와 익산 그리고 경주를 중심으로 발견되고 있다.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재질별 등장시기를 중심으로 토기, 토광, 석제 순으로 발견되었다. 토기 변조는 3세기 중반경에 등장하여 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토광변조와 석제 변조는 대체로 6~7세기 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여기서 변조라 함은 분뇨가 발생하여 1차적으로 담기는 저장 장소를 말한다.




백제(*참조:한국 화장실 구조를 통한 비교 연구)


백제시대의 궁장, 석축, 대형건물지, 정원과 공방 유구 및 대형화장실 등이 발굴되었다. 신라나 조선시대의 유구보다 백제의 화장실이 많이 확인된 이유는 그동안 백제 유적의 발굴이 왕궁지나 공방 유적과 같은 생활유적을 중심으로 한 발굴에서 이들 건물지와 함께 화장실의 유구를 발굴한 사례들이 보고되었다.

백제에서 확인된 화장실의 형식은 재래식 4곳, 수세식 4곳, 혼합형 1곳으로 에서 비율을 따져보면 재래식 44%, 수세식 44%, 혼합형 12%로 익산 왕궁리 유적을 제외하고 왕궁지와 공방 유적에서는 수세식을 사용하였다. 수세식은 외부에서 물을 끌어와 오물이 발생할 때마다 짧은 간격을 두고 오 물을 씻어내 화장실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방식이다. 물로 씻어내는 방법은 수로와 연접해 직접 설치한 후 항상 흐르도록 하는 방식과

오물이 생기면 저장해 놓은 물을 부어 제거하는 방식이 있었다.




신라(*참조:한국 화장실 구조를 통한 비교 연구)


경산, 왕경, 동궁과 월지 등에서 유구가 발견되고 있다. 신라 화장실의 형식 총비율을 따져보면 재래식이 67%, 수세식이 33%의 결과가 나왔으며 재래식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참조:한국 화장실 구조를 통한 비교 연구)


양주 회암사지,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별서 유적, 경복궁 동궁권역 대형화장실 유적에서 조선시대의 화장실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형태는 장방형이면서 재질은 석재인 화장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는 토광, 토기, 석재를 혼용해서 사용하였지만 조선시대는 모두 석재를 사용하여 좀 더 진화되고, 또한 분뇨처리 방식이 과학적으로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또한 재질에서 백제가 토광과 토기의 형태로 구분되는 것에 대해 신라는 토기와 석재라는 재질로 구분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조선시대에 와서 완전히 재질에서 석재라는 것으로 귀착되었을 가능성 또한 충분히 예상되게 하는 점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화장실의 구조분석에서 비록 그 분석 유구는 적지만 형태에 서는 장방형, 재질에서는 석재라는 것으로 대표된다는 결론을 맺어도 무난할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화장실 형식 총비율을 따져본 결과 재래식은 2곳으로 67%, 수세식은 1곳으로 33%의 결과 나왔다.


한국에서 발굴된 화장실 형식 총비율을 보면 재래식 53%, 수세식 40%, 혼합형이 7%로 백제, 신라, 조선을 다 합쳐서 재래식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재래식과 수세식은 화 장실과 관련된 유적 중 수로나 배수로의 유무로 분류하였다. 수로나 배수로가 없으면 재래식, 이에 반하면 수세식으로 분류하였다. 백제 익산 왕궁리 유적은 오물을 퍼낸 흔적으로 재래식과 배수로를 연결시킨 수세식 조건을 둘 다 갖추 고 있기 때문에 혼합형으로 분류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는 사정이 어땠을까? 15세기 중엽의 농사직설이래 각종 농서를 통해 조선에서는 똥오줌을 재와 섞은 똥재 종류를 밑거름으로 널리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초 고상안의 농사월령 이후, 특히 19세기 전반이 되면 오줌을 따로 모 았다가 웃거름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소개되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서울에는 수레가 없어서 말 잔등에 실어내는 정도로는 1만 가구의 똥을 성 밖으로 다 운반할 도리가 없고, 오줌은 대개 마당 한 귀퉁이나 길거리에 쏟아버리므로 우물물이 짜지고 길과 개천이 더럽기 짝이 없다고 썼다. 도성 안의 똥을 쳐 가는 사람 은 있었으나, 그것이 전문업종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개항기 이래 개화론자들이나 조선을 여행한 외국인들의 눈에 비친 서울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함부로 똥오줌을 누거나 변소가 넘쳐 길과 도랑, 개천이 더럽고 악취가 나는 불결한 도시였다.




189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까지(*참조:서울의 똥오줌 수거체계의 형성과 변화)

19세기말 풍경 '똥장사'

서울의 변소 사정과 똥오줌 치기의 실상을 제대로 엿볼 수 있는 것 은 1896년부터다. 재미있는 것은

“어른과 아이를 물론하고 길가에서 오줌과 똥 누는 것을 금하며 길갓집 들창밖에 요강과 더러운 물 버림을 금지”한다는 내용도 있는 것을 보면 얼마나 거리가 오물로 널브러져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똥오줌을 옹기 등에 담았다가 똥장수가 처리하였으니 지금과 비교하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19세기 초 일본 및 열강이 국토를 유린하고 있을 때 일본인이 남산 근처에 많이 살아 나름대로 청결을 유지하는 등 '한성 내 청결법 시행규정'이 생겨났다. 재미있는 항목 중 몇 개를 소개하면 '똥통[屎尿桶]을 만들어 나눠주니 규정대로 설치할 것'이나 '공중변소를 세울 터이니 인민은 그 변소에서 똥오줌을 누고, 길거리에서 오줌 누는 폐를 엄금할 것임'이라고 하여 적나라하게 똥통 이라던가 똥오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후에도 '한성위생위원회규정'이나 '한성위생회규약' 등이 발표되고 한성위생회는 일본에서 말 67마리를 구입하고, 똥통 2천 개도 마련하기도 했다. 똥 치는 인부는 매년 연인원 7만 명에서 9만 명을 고용하는 등 거리의 위생에 힘을 쏟는 모습도 보였다. 1932년의 경성부 오물처리비 일람표를 보면 당시 똥통 이 1,200개에 똥 푸는 인부가 32,120명이라는 기록이 있었다. 1936년에는 조선오물소제령이 공포되었다.


구한말 시대에 외국인이 조선을 방문할 때의 모습을 이야기한 대목을 보면 당시 거리가 얼마나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거리였는가를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다.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94~1897년 체류)은 '도시는 악취가 심하며 거리에는 쓰레기와 오물이 흘러 다녔다'라고 했고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 1880–1910년 조선 체류)는 거리에는 사람이 버린 것들이 쌓여 있고 악취가 난다 '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하수도, 도시지역 보급률은 2024년 현재 97.2%이며 농어촌지역 보급률은 78.8%를 자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매설된 하수관로의 총길이는 17만 3천717㎞에 달한다. 가동 중인 공공하수처리시설은 총 4천469 개소이며 서울에는 4개소가 있다. 최근에는 하수처리의 본래기능에 더하여 주민친화시설로도 탈바꿈하며 하수처리장을 휴게시설, 주차장, 교육 및 문화시설, 생태공원 등 주민친화시설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서울의 경우 서울물재생시설공단의 서남물재생센터에는 더러운 물이 어떤 과정을 거쳐 깨끗한 물로 방류되는지 훌륭한 시청각 교육시설을 갖춰 방문객의 호평을 받고 있다.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