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26일, 손목에 찬 러닝용 시계가 밤 11시 59분을 지나 드디어 자정을 가리키자
갑자기 살짝 긴장이 되면서 입술이 마르는 듯하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섞여있는 기분.
밤 12시. 이제 날짜는 3월 27일로 바뀌었고, 나는 드디어 50세가 되었다.
그 첫 순간을 차분히 음미하며 드디어 고요하고 적막한 자정에 50 킬로미터를 향한 첫 발을 뗐다.
74년생인 나는, 예전 한국식 나이로는 51세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2024년이 50세가 되는 해이다.
1월 1일, 밝아오는 새해를 맞이하며 불현듯 '50세가 되는 기념으로 내 생일에 맞춰 50킬로미터 러닝을 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지역 러닝 동호회 소속으로, 주구장천 달리는 게 취미인 러너이기에 가능한 생각이긴 했지만, 남편을 비롯한 가까운 친구들의 반응은 너무 무모한 계획 아니냐는 것이었다.
풀코스 마라톤도 이제 겨우 두 번 완주해 본 게 다인 초보러너 주제에, 자정에 혼자서 그것도 밤새 50킬로를?
그러나 내 생일이 다가올수록,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던 계획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야겠다는 결심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음을 느꼈고 결국 진짜로 하게 되었다. 생일이 되는 첫 번째 순간, 자정에 말이다.
원래 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만의 러닝을 하려고 했었지만, 자주 함께 모여 훈련도 하고 대회 준비도 하던 달리기 친구들이 내 계획을 듣고는 흔쾌히 그 여정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각자 자신이 가능하고 편한 시간대에 나와서 나와 함께 달려주겠다는 것인데... 몇 명이 나와서 얼마나 긴 거리를 달려주느냐와 상관없이 그 마음들이 너무 고맙고 감동스러웠다.
먼저, 자정이 되자마자 첫 스타트를 함께 끊어 준 친구들은 Taflinger 부부였다.
두 부부와 아이 셋, 식구 다섯 명 모두가 달리기에 재능이 있는 이 집안은 거의 모든 대회 때마다 메달을 휩쓸고 있기도 하다.
바로 하루 전날이 41세 생일이었던 Angela는 참 밝고 쾌활한 성격의 금발 머리 친구인데 남편인 Chad와 자정부터 나와 함께 8킬로미터를 달려주었다.
그 후, 거의 3시간 동안은 제대로 혼자만의 러닝에 푹 빠질 수 있었다. 좋아하는 음악도 들었다가, 아예 음악을 끄고 적막한 새벽의 공기와 소리들에 집중하며 달리기도 했다가, 잠시 멈추고 어두운 바닷가의 풍경을 음미하기도 하며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즐기면서'지천명'이라고도 불리는 50세 생일을 자축했다.
그러다가 새벽 4시쯤 되었을 무렵, 점점 지쳐가는 50세 아줌마 러너의 눈앞에 저 멀리서 두 손을 흔들며 요란하게 다가오는 두 여자들이 보였다.
생일 축하한다며 두 팔을 벌리고 땀에 절은 나를 얼싸안아주며 축하해 준 이 여인들은 Kathy와 Kethleen.
3월 9일에 있었던 사이판 마라톤 준비 훈련도 함께 했던, 달리기 친구들이다. 늘 유쾌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두 여인들. 참 좋은 사람들이다. 선물이라며 와인 한 병을 내 차 앞 유리에 놓아둔 센스까지...
이제 혼자가 아닌 여자 세 명이 새벽을 달리고 있다.
그런데 또 저 멀리서 반갑게 달려오는 두 사람.
'Sheila'라는 본명보다 'Yhobie'라는 닉네임으로 더 많이 불리는 유머러스한 내 친구 요비와, 새벽 조깅 때마다 마주치면 늘 굿모닝 인사를 하는 친절한 청년 Philip이다.
두 사람은 오늘이 휴무라며 출근 걱정 안 해도 되니 신경 쓰지 말란다. 재밌는 친구들이다.
인원이 늘어 이제 다섯 명이 그룹을 이뤄 달린다. 참 행복하다.
달리던 중 요비가 전화를 받는다. 필리핀 말로 뭐라고 쏼라대더니 두 명이 더 합류할 거란다.
우리가 지금 어디쯤에 있다는 걸 알려 준 모양이다.
한 10분쯤 지나자, 활짝 웃으며 두 명의 여인이 저쪽에서부터 달려온다. 우리들 중 가장 연장자인 55세 Malou 언니와 의리 있고 심성 고운 내 절친 Rose이다.
생일 축하한다는 인사와 함께 끌어안으며 따뜻하게 미소 짓는 그들을 보자 갑자기 울컥하고 눈시울이 붉어짐을 느낀다.
'나, 정말 복 많은 사람이었구나.'
달리기가 뭐라고, 내 생일이 뭐라고... 이들은 이 시간에 기꺼이 나와서 함께 달리며 땀을 흘리는 걸까.
게다가 주말도 아닌 평일이라 출근도 해야 하고 각자의 스케줄도 있을 텐데...
이제 나를 포함한 무려 7명이 새벽 해변가를 달린다. 웃고 떠들며, 중간중간 기념 촬영도 해가면서 행복한 생일 기념 추억들을 만들고 있다.
각자의 시간에 맞게 달린 친구들 중 몇 명은 굿바이 인사와 함께 돌아가고, 이제 출근 걱정 없다던 두 명의 친구만 남았다.
이미 지친 그들을 쉬게 하고 이제 다시 나 혼자 달린다. 50킬로미터를 채우려면 아직 10킬로 정도를 더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42킬로를 넘어서 43킬로미터를 달리던 순간, 속에서 짜릿하고 묘한 전율이 느껴졌다. 풀마라톤 거리 이상을 달려 본 적이 없던 내 기록을 깨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해낼 거라고, 반드시 끝내고야 말 거라고 수없이 다짐했던 대로, 드디어 50세 기념 50킬로미터 러닝을 완주했다.
참 유별나고 특이한 생일 기념이지 않은가 말이다.
얼얼하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기념 촬영을 해야 한다는 친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며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 와중에 이 순간을 위해 준비했던 50세 생일 기념 티셔츠도 걸치고 기억에 남을 인증샷도 찍었다.
그렇게 나는 이제 50살이 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을지 장담할 순 없겠지만, 가능한 순간까지 달리고 있을 거라는 건 확실하다.
'그때쯤이면 지금 같은 달리기 폼도 아닐 것이고, 스피드도 떨어진 지 오래일 테지...'
'다소 구부정한 자세에 쭈글쭈글한 팔과 다리를 사력을 다해 휘저으며 힘들게 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중요한 건, 어쨌든 여전히 달리고 있다는 것 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