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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Dec 14. 2021

타임머신을 타고 '죽은 시인의 사회'로 가다.

영화 / 음악 이야기

"저, 저저... 저 선생이라는 작자가 하는 짓 봐라. 하는 짓이 완전히 빨갱이구먼."

"저 학생이라는 것들도 죄다 퇴학시켜야 돼! 저런 돼먹지 못한 것들!"


'아니, 배우도 미국 사람이고 영화도 미국에서 만든 건데 갑자기 웬 빨갱이 타령이실까.'

'오늘도 영화 조용히 보기는 글렀네.'


개인적으로 1989년 작품인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를 생각하면 자동반사적으로

입에 거품을 물고 '돼먹지 못한 빨갱이 선생'이라며 신랄하게 욕을 해대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서 참 당황스럽다.


정말 훌륭한 영화이고 수작이라고 생각하는데...

스토리도 감동적이고 배우들도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사람들인데...

특히나 여중과 여고를 다녔던 나로서는

말끔한 교복에 하나같이 잘생긴 모범생 스타일의 영화 속 남학생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대리만족을 하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텔레비전에서 영화가 방송되는 내내 짱을 끼고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지켜보시던 아빠는

마침내, 주인공 키팅 선생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며 교실을 떠나려고 하자

학생들이 하나둘 씩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로 올라가는 엔딩 장면에서 분노를 터트리고야 마셨다.


그리고 아주 심플하게 '빨갱이 선생이 아이들을 선동하는 영화'라는

오로지 아빠 기준의 한 줄 과 함께

나의 사춘기 시절 최애 영화 중 하나였던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렇게 별점 1점의 잔인한 평점 테러를 당하고 말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때도 그랬고 지금까지도

이미 고인이 된 영화배우 '로빈 윌리암스' 아저씨께 뭔가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미안합니다.


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9년엔 아이들을 위한 '참 교육'이라는 슬로건 아래

'전국 교직원 노동조합(전교조)'이 창설된 해였다.

당시 사립 재단 소속의 중학교를 다니던 나와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은

전교조의 시작부터 거의 모든 과정들을 보고 겪은 산 증인들이기도 하다.


내 기억 속 1989년의 교정은 참으로 살벌하고 냉랭했다.

같은 교무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마주치는 동료 선후배 교사들끼리도

'전교조 소속'과 그렇지 않은 쪽으로 나뉘어서 서로 적대시하고 으르렁거렸다.


선생님들 사이의 갈등은 교무실에서만 끝나지 않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실까지 이어졌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중학교 학생들은

그런 선생님들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며

학생들 사이에서도 전교조 선생님들을 지지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로 나뉘게 되었다.


자칭, '깨어있는 진보성향'의 전교조 소속 선생님들

아예 대놓고 수업 시간에 재단 이사장을 포함한 반대파 교사들과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 정도까지면 좋았을 텐데, 내 기억 속의 '윤리' 과목 선생님 중 한 명은

무슨 얘기를 마무리 지을 때마다 항상

"코쟁이 새끼들, 양키 놈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해서

상당히 듣기 거북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어떤 교육을 받고 자랐는가.

해마다 6월이면 반공 글짓기 대회와 웅변대회에 참가하며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쳐댔던

투철한 반공 정신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던가 말이다.

아직도 웅변대회 특유의 과장된 손동작과 표정을 지으며

"이 연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외칩니다!"를 정말 외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어수선한 학교 분위기로 인해

자칫 아이들의 수업과 교육에 지장이 있을까 걱정을 하던 학부모님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급기야 전교조 선생님들의 활동이나 집회를 반대하는 학부모들의 모임이 결성됐는데

그 중심에 우리 아부지가 계셨던 것이다.


혹여 자기 자식에게 불똥이 튈까 몸을 사리는 다른 부모님들과는 달리

가장 선두에 나서서 전교조 선생님들과 언성 높이고 싸우시는 건 기본이고

누가 보면 재단 이사장이냐고 할 만큼 온 학교를 휘젓고 다니셨다.


당연히 그 여파는 고스란히 나와 동생에게 미쳤다.

전교조 소속 선생님들의 수업 시간이 다가오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고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면서부터 묘하게 나를 노려보는 선생님의 눈빛을 느끼는 걸 시작으로 해서

'야, 너희 아버지가 그렇게 대단해? 왜 그렇게 나대고 난리야?' 하는 표정으로

수업 시간 내내 경멸스럽게  쳐다보는 그 분위기와 함께

차라리 대놓고 뭐라고 말을 할 것이지

은근히 빙빙 돌려가며 비야냥 거리기까지 하는 걸 겪고 나면

정말이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 내가 우리 아빠한테 그러라고 시켰냐고요! 왜 나한테 그러는데요!"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1989년 노태우 정부가 교단에서 쫓아낸 전교조 교사들은 어떤 교사였을까?

놀랍게도 당시 문교부가 일선 교육청에 보낸 공문에 따르면

'전교조 교사 식별법'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미처 몰랐던 사실이라 충격적이긴 하지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89년 문교부 일선 교육청 공문 내용 '전교조 교사 식별법'



아니, 도대체 그럼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가르치라는 소리인가.


늦은 나이에 이곳 대학에서 교육 학과를 졸업한 후

2년 동안 사이판 한글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5학년 아이들을 가르쳤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내게 가장 행복을 준다는 걸 

사십 대 후반의 나이에 깨닫게 된 소중한 시간들이었지만

고등학생이 된, 두 거북이 녀석들을 신경 써야 하는 상황 때문에 아쉽게도 올해 초에 그만두게 되었다.


'전교조 교사 식별법'에 따르면

나 역시 상당히 많은 항목에 해당이 됐었다는 사실에 씁쓸한 웃음이 나고 말았다.

그러니 당연히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속 키팅 선생님은

그 시절, 아빠 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눈엔

전교조 교사 정도가 아니라 특수하고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학교에 침투한

간첩이나 빨갱이로 보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키팅 선생님이 빨갱이라니...


언젠가 두 거북이 녀석들이 아닌 다른 아이들을 다시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키팅 선생님을 닮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비록, 세월과 상황이 많이 변한 탓에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의식이나 윤리관이 조금 달라지기도 한 듯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직도  '교사'는 일반 회사원이나 사무직 종사자와는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참으로 어렵고 중요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교사의 말 한마디나 눈빛, 사소한 행동 하나가

아이들의 사고방식이나 관점에 큰 영향을 주고

나아가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는 마인드로 아이들 앞에 서야 한다고 믿는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 얽힌 추억이 남들과 조금은 달라서

본의 아니게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이런저런 회상을 하게 되었지만

어수선했던 그 시절, 그다지 밝고 즐거웠던 추억이 떠오르지 않던 그 시간들이

오늘 밤 조용히 내게 찾아와 작은 위로의 말을 건네고 다시 사라진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그래, 현재가 중요하지. 이 순간을 누리고 감사하며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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