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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라토너 거북 맘 Jan 04. 2022

 털과의 전쟁

반려묘 이야기

코끝이 간질간질, 얼굴이 근질근질

누구냐, 누가 강아지풀로 장난치는 거냐?


잠시 누워 비몽사몽 선잠을 자다가 코끝 간질거림에 살짝 눈을 떠 보니

엄마 껌딱지 집착 냥, 베리가 내 얼굴을 바짝 들여다보며 골골거리고 있다.

'이 녀석, 또 예뻐해 달라고 왔구나.'

어김없이 겨드랑이를 파고들며 얼굴을 사정없이 문질러 대는 녀석을

'우쭈쭈, 오구구' 하며 쓰다듬어 주다가

우연히 침대 시트에 눈길이 머물렀다.

'하... 저 털들을 어쩔 것인가.'

녀석의 새하얀 털들로 뒤덮인 침대 시트는

그 비싸다는 거위털 이불보다 더 푸근해 보인다.



두 냥이를 모시는 집사가 되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게다가 집사가 결벽증 환자라면 이야기는 비극이나 호러물로 끝나기 십상이다.

특히,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걸 용납 못하고

 침대 시트나 베개에 머리카락이 뒹구는 꼴을 못 보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집사가 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녀석들이 우리 식구가 되면서부터

예전보다 청소기 돌리는 횟수가 더 많아지고

물티슈와 끈끈이 롤러 사용량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게다가 녀석들이 털갈이를 하는 요즘은

심각할 정도로 집안 곳곳에 털들을 사정없이 뿜어대는 통에

저러다가 뱀처럼 허물이라도 벗을듯한 기세다.


검은색 옷이나 색상이 진한 티셔츠는 당연히 털옷이 되고

책상, 이불, 식탁 위 등 집안 구석구석을

녀석들의 털들이 장악하기 시작하자

그동안 녀석들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쏟아붓던 집사도 당황하며

심한 스트레스와 강박증에 시달리게 됐다.


하루 온종일, 시간만 나면 틈틈이 청소기를 돌리고

끈끈이 롤러를 열심히 굴려대 보지만

두 녀석이 뿜어대는 털들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 오랜만에 깨끗이 목욕을 시켜보자.'


예전에 키우던 녀석들은 그렇게까지 강하게 목욕을 거부하진 않았었다.

물론, 내가 냥이들을 능숙하게 잘 다루기도 하지만

물을 싫어하는 냥이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대체로 고분고분하고 나의 손길을 크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특히 체리와 베리 두 녀석 중

업둥 냥 베리는 정말 너무너무 목욕을 싫어하는 녀석이다.

이건 뭐, 내가 어찌해볼 수가 없이 강력하게 거부를 하는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고 완전히 전쟁 난 것 같은 상황이 된다.

덕분에 처음 우리 집에 들어와

어리고 멋모를 때 한번 목욕을 한 이후로

지금껏 제대로 샤워를 시켜 본 적이 없다.


물론 냥이들은 스스로 그루밍을 하는 깔끔한 동물이라

굳이 너무 자주 목욕을 시킬 필요가 없다는 건 알지만

녀석들의 털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한 번은 제대로 목욕을 시켜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렇게 털이 무지하게 빠진다면

하루에도 수차례 자기 몸을 핥으며 그루밍을 해대는 녀석들인지라

결국 그 털의 상당량이 녀석들의 뱃속에 들어가게 되므로

냥이들의 소화불량이나 식욕부진은 물론

나아가 냥이의 생명을 위협하는 원인인

헤어볼 관리 차원에서도 털 관리는 필수인 것이다.

종종 힘들게 헤어볼을 토해내기도 한다.


나름대로 완벽하게 녀석의 목욕 준비를 마쳤다.

샤워기도 미리 틀어서 온도를 맞춰놨고

전용 샴푸와 수건도 대기 중이다.

너무 심하게 난동을 부릴지도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라텍스 장갑까지 끼고 녀석을 욕실로 데리고 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실패.


몸에 물이 닿기도 전에, 정말 생지롤 난리를 치며

내 손을 벗어나 욕실 안에서 길길이 날뛰고

미친 듯이 퍼덕거리는 녀석을 보면서

조용히 녀석을 욕실 밖으로 내보내고 목욕 용품을 다시 정리했다.

그 짧은 순간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어느새 장갑은 갈기갈기 찢어져서 걸레가 됐고

내 손에는 영광의 스크래치 자국이 남았다.


'너 진짜... 너무하다.'

'그토록 목욕이 싫더냐. 엄마는 너무나 섭섭하구나.'

사태의 심각성이 고스란히 남은 상처와 찢어진 장갑


이대로 털과의 전쟁을 포기하기엔

녀석들의 무수한 털들로 인한 집사의 스트레스가 꽤나 심각해서

이번엔 다른 방법을 고민해 본다.

서로에게 힘들지 않으면서 가장 최선인 방법이 무엇일까.


'옳거니, 녀석들에게 옷을 입혀보는 건 어떨까?'

'완벽하지는 않아도 옷으로 몸이 어느 정도는 커버가 되니까

털 빠짐도 좀 덜할 테고

무엇보다, 녀석들도 목욕할 필요가 없으니 서로에게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실행력과 추진력이라면 번개맨이 울고 갈 만큼 잽싼 집사는

바로 녀석들의 셔츠를 사들고 와서

'이번엔 또 뭐냥?' 하는 표정으로 경계하며 나를 쳐다보는 녀석들에게

차분하게 옷을 입혀본다.


얼떨결에 난생처음으로 옷을 입게 된 녀석들은 냥이둥절 해 있고

그 모습을 본 식구들을 한바탕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들,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잖아!'


탁월한 핏으로 캣워크를 시연하는 녀석들


하지만, 이 방법도 완벽하진 못했다.

무엇보다, 늘 본능적으로 그루밍을 하는 녀석들에게 옷을 입혀 놓으니

자꾸 옷 위를 핥아대며 갑갑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휴... 결국엔 본질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결국 남은 방법은

목욕도 옷도 아닌

매일매일 최소한 20~30분 이상씩

녀석들의 털을 빗질하고 마사지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두 녀석을 꼼꼼하게 빗질해 주는 일은

사람의 머리카락을 빗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빗도 한 가지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서

최소한 두세 개 정도의 빗이 있어야 한다.

각각의 역할이 다른 이 빗들

녀석들의 죽은 털들을 빗어내면

정말 감당이 안 될 만큼 엄청난 털들이 빗에 묻어 나온다.


게다가 냥이 털은 얇고 가벼워서

빗질을 통해 나온 뭉텅이 털들은

온 거실 바닥을 솜털처럼 뭉실뭉실 굴러다닌다.


빗질이 어느 정도 끝나면

고무 재질의 장갑으로 녀석들의 몸을 마사지하고 훑어서

남아있는 털들을 제거하면 대강의 과정이 마무리된다.


녀석들이 참 희한한 게

목욕은 그렇게 질색을 하고 싫어하면서도

귓속 청소나 빗질을 할 때는

가만히 몸을 맡기고 누워있거나

빗을 들고 나타나기만 해도 알아서 냥냥 거리며 다가온다.


'그래, 바로 이거라고.'

'아, 시원하다. 좀 더 부드럽게 잘 빗어봐요, 엄마.'


바닥에 드러누워서 천역 덕스럽게 몸을 맡기고

빗질을 즐기는 녀석들을 보면서

조용히 속삭여 본다.


"미안하다, 얘들아."

"엄마가 좀 더 편한 방법을 찾다 보니

너희들이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계속 고집했었구나."


누군가 그랬다.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거라고...

내가 좋아하는 걸 상대방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걸 들어주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녀석들의 털과의 전쟁이 아닌

나 자신 스스로의 강박과 결벽증과의 전쟁을 치르는 것이 우선이라는 걸 깨달았다.


쉽지 않은 전쟁이겠지만

늘 예민하게 병적으로 청소기를 들고 다니며

집안 곳곳을 눈을 부릅뜨며 체크하고 다니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언젠가는 승리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렇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녀석들이 아닌 나에게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과의 마찰이나 남편과의 갈등, 타인과의 감정싸움도

사실, 알고 보면

나 자신이 부족했던 부분이 문제의 원인이 되거나

스스로 일을 크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음을 느낀다.


너무 조급하거나 여유가 없을 때

마음공부가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일 때

스스로를 돌아보기보다는

상대방이 원인 제공자라고 생각하고 공격하거나

남 탓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게 사실이다.


오늘도 냥이들 덕분에 작은 깨달음을 얻은 집사는

빗 3종 세트와 장갑을 조신하게 대령하고

세심하고 섬세한 빗질을 하고 있다.


만족한 표정의 냥이들이 오늘따라 더 행복해 보인다.

덩달아 나도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렇지, 거기! 좀 더 부드럽게 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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