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관에는 다양한 동아리가 있었다. 청소년들의 재능을 보여줄 무대를 마련하는 일은 언제나 설레는 순간이었다. 마침 핼러윈데이에 맞춰 작은 축제를 열자는 의견이 모였다. 비록 소박한 무대였지만, 아이들이 직접 준비한 공연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리만큼은 특별하게 만들고 싶었다. 댄스, 치어리딩, 우쿨렐레, 난타, 음악줄넘기, 독주와 노래까지… 프로그램은 어느새 풍성하게 채워졌다.
그 가운데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사회자였다. 축제에서 사회자의 역할은 작지 않다. 또렷한 발음과 침착한 태도, 그리고 분위기를 이끌어갈 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나는 이 무대를 통해 청소년들이 조금 더 성장하길 바랐다. 그래서 지도자가 써준 대본으로 앵무새 흉내가 아니라, 청소년 스스로 사회자가 되기를...., 고맙게도 학습동아리 회장과 총무가 사회를 맡겠다고 했다. 나는 공연 순서만 알려줬을 뿐인데, 그들은 스스로 시나리오를 써 와서 나를 놀라게 했다. 준비된 마음은 그 자체로 무대를 반짝이게 하는 빛이었다.
행사 전날까지 지도자들은 무대를 꾸미고 점검하느라 늦은 밤까지 분주했다. 그리고 드디어 공연 당일, 쌤들은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출근했다. 무대 음향과 체크리스트를 다시 점검했다. 그런데 그때, 믿기 힘든 소식이 전해졌다. 전날 밤, 이태원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들어 참사가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시에서는 행사를 취소하라고 권고했지만, 이미 오랜 시간 준비해 온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다짐으로 우리는 무대를 지켜내기로 했다.
-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압사 참사로 많은 젊은이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이로 인해 시 관계자는 모든 행사 취소를 권고했다.-
무대의 주인공이 될 동아리 회원들과 관객들이 공연장으로 들어서면서, 텅빈 좌석들이 조금씩 메워졌다. 드디어! 청소년동아리 축제가 시작됐다. 무대에 오른 사회자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차분히 말했다.
“어젯밤, 이태원에서 많은 청춘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을 위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묵념을 올리겠습니다.”
순간 공연장은 숙연해졌다. 청소년들의 작은 축제는 추모의 마음으로 시작됐다. 묵념을 마친 사회자는 또렷한 목소리로 관객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준비한 무대가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모두 질서를 지켜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등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기엔 너무도 성숙했다. 그 한마디에 공연장의 분위기는 차분히 가라앉았고, 모두 무대를 향해 설레는 마음으로 집중했다.
이어진 무대에서 청소년들은 그동안 갈고닦은 실력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사회를 맡은 두 학생은 또렷하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공연을 이끌었고, 재치 있는 멘트로 관객들의 웃음과 박수를 끌어냈다. 그 순간, 나는 무대 위에서 한 뼘 더 자라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시 관계자는 공연을 지켜본 뒤, 서귀포시 청소년 동아리 축제의 사회를 제안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학사 일정으로 성사되진 않았지만, 그날의 무대는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았다. 무대 위에서 아이들은 사회자가 되었고, 관객 앞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 작은 경험이 언젠가는 더 큰 세상에서도 빛을 발할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날의 무대는 단순한 축제가 아니라, 청소년들이 스스로 빛을 만들어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