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숙제 - 자세히 묘사하기
바스락, 바스락.
낙엽의 바스러지는 떨림이 들린다. 발자국을 내딛을 때마다 부서는 소리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다. 마치 내 안의 낡은 기억 하나가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듯하다. 바람이 스치자 지난해에 떨어진 낙엽 위로 또 다른 잎들이 소리 없이 내려앉는다. 푸르던 깃발로 나풀거리던 잎새들이 작별을 고하는 계절에 접어든다. 그 길 위를 '가을의 낭만'이라는 감성에 빠져 천천히 걷는다. 연한 노랑, 붉은빛을 띤 갈색, 옅은 갈색 등의 낙엽으로 쌓여 계절의 색을 입히고 있다. 양쪽 길모퉁이에 낙엽은 수북이 쌓여있다. 엊그제 내렸던 이슬비가 스며들었는지 축축한 기운이 감돈다. 비와 흙냄새가 섞여있다. 어쩌면 계곡에서 불어오는 냄새일지도 모른다.
폭 2미터 남짓한 길 양옆에는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 있다. 서어나무와 단풍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저마다의 빛깔로 가을을 붙잡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가드레일이 설치된 걸 보니 절벽이거나 계곡일 가능성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그 너머로 천아오름 등성이 살짝 드러낸다. 왼편 언덕 나무들이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 있다. 언덕기슭에는 고사리와 담쟁이넝쿨이 뒤엉켜 짙은 초록과 연둣빛을 뿜어낸다. 미세한 햇빛으로도 짙고 옅은 농도를 더해 입체적이다. 양쪽 나무들이 가느다란 것으로 보아 환경이 열약함을 감지할 수 있다. 가드레일 너머 나무의 그림자는 사선을 그으며 오른쪽으로 드리워진다. 오후 서너 시가 된 듯싶다. 햇살이 길 위에 볕뉘의 무늬로 명암을 새긴다. 낙엽이 덮은 길은 순간 자신의 본모습을 살짝 내비친다. 온전히 낙엽으로 수북하게 쌓여 있다면, 길은 흙길일 거라는 착각이 들만큼 내딛는 발밑이 딱딱하지 않다.
아직은 단풍이 완연하게 물들지 않았다. 더러는 여름에 머물러 있는 듯 연둣빛이 언뜻언뜻 살랑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이 보인다. 하늘빛은 물감을 엷게 푼 듯 희미한 파란색이다. 그 위로 솜털 같은 구름이 느긋하게 흐르고 있다. 햇살은 나뭇가지 끝을 스치며 잎새 하나하나에 금빛과 주홍빛으로 물들인다. 먼저 물든 단풍잎이 소리 없이 한 잎, 두 잎 떨어진다. 금방 떨어진 단풍잎 하나를 손에 쥐었다. 여섯 갈래로 나눠진 잎은 옅은 노란빛이다. 한때 책갈피에 넣어 뒀던 단풍잎이 스친다. 책갈피 속 단풍은 홍시처럼 붉었다.
길은 서서히 왼쪽으로 굽어 부드러운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내리막 끝자락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베이지색 옷을 입은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내려간다. 아이의 아빠는 회색 후드티, 엄마는 흰 티와 청바지 차림, 두 사람의 허리에 묶인 검은 외투가 바람에 살짝 흔들린다. 단풍을 보러 나온 가족일 것이다. 그들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사이, 청년이 오르막길을 오른다. 청년은 고개를 숙인 채 낙엽을 밟으며 걷는다. 그 발끝에서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사색에 잠긴 걸까, 아니면, 한때 이곳을 함께 걸었던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내리막 끝자락에 다다르면 천아계곡이 펼쳐진다. 계곡에는 물이 흐르지 않겠지만, 단풍이 울긋불긋 물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겹친다. 누군가와 함께 걷던 이 길. 그때의 웃음과 계곡의 바람 냄새가 스친다. 낡은 기억 하나가 내 손바닥에 내려앉는다.